<다윈 영의 악의 기원>, 악은 그렇게 전형적이지 않다
정말, 이게 다인가?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제목이기도 하고 세상사의 금과옥조이기도 하지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작가들에게 이 말은 빈칸을 채워야 하는 퍼즐이기도 하다. 대개 퍼즐은 두 갈래로 맞춰진다. ‘끝이 좋으(려)면 다 좋(아야 한)다’이거나 아니면 ‘끝이 좋으면 다 좋(게 보인)다’이거나. 흰말 궁둥이 백마 엉덩이처럼 비슷비슷하게 들릴지 몰라도 집어 드는 퍼즐 조각에 따라 각각 완성되는 두 갈래의 그림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전자의 끝은 이야기의 시작과 과정이 축적된 자연스런 결말이지만, 후자의 끝은 작품의 의미를 확정하려는 인위적인 결말일 때가 많으니 말이다. 서사 이론을 공부한 어느 학자가 그랬다. 능숙한 작가는 이야기를 말하고 미숙한 작가는 자기 생각을 말한다고. 모든 서사의 끝에는 작가의 의도가 함축되는 게 맞지만, 그것이 이야기에서 비롯되는 말이 아니라 작가 자신의 말일 때 이야기의 끝은 마무리가 아니라 난데없는 시작이 되고 만다.
뮤지컬 <다윈 영의 악의 기원>을 보고 나서 이런 생각이 더 깊어지는 것은 이 작품의 결말 때문이다. 원작의 내용 그대로 이야기가 흘러오다가 마지막에서 원작의 어둠과 달리 ‘빛이 있는’ 결말로 마무리되는데, 이 희망을 ‘좋은 끝’이라고 보기엔 여러모로 석연치가 않은 거다. 단지 원작의 끝과 공연의 끝이 다르다는 데 시비를 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왜 달라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이 없을 때 각색의 시도는 온전히 무의미해진다.
사실 이희준은 창작보다는 각색에서 대본의 완성도가 더 높은 작가이다. <내 마음의 풍금> 같은 정감 있는 영화에서 <미남이시네요> 같은 트렌디 드라마에 이르기까지, 장르의 스펙트럼에 구애받지 않고 원작의 재미를 공연의 규모로 최대한 담아내는 솜씨는 작가들 중 앞자리였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여러모로 의아하다. 요약으로 봤을 때는 비어 있는 틈이 너무 많고(9지구의 반란자 러너가 어떻게 1지구에서 살게 됐을까?), 해석으로 봤을 때는 방향성에 대해 의구심이 드니 말이다. 작가는 800장이 넘는 원작 소설의 이야기를 오로지 삼대에 걸친 가족사의 숨겨진 범죄로만 축약해 놓았다. 주인공이 살인을 감행하는 이유를 환경에 적응한 자만이 살아남는 적자생존의 원리가 아니라 가족애(난 아버지를 사랑해!)로 바꿔버릴 때, ‘종의 기원’이라 쓰고 ‘악의 기원’이라 읽을 수 있는 다윈의 새로운 진화론은 사라져버리고 마는 거다. 정말, 이 이야기는 그저 대를 이어 반복되는 배신과 살인의 역사에 불과한 걸까?
이 이야기를 단순한 한 가문의 연쇄살인(?)의 역사로 확증하는 장면은 마지막 루미의 결의에서이다. 원작 소설에서의 루미는 다윈의 변화된 모습에 압도되면서 삼촌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찾겠다는 뜻을 완전히 접어버리지만, 뮤지컬에서의 루미는 끝까지 죽음의 진실을 찾겠다고 결심한다. 관객은 누가 범인인지 알 뿐 아니라 그들 가문의 영광이 대대손손 이어질 것이라는 사실까지 다 아는데 루미만 모른다. 어쩌다 밝혀낸다 치자. 그래 봤자 드러나는 것은 살인의 범인이지 악의 실체는 아니다. 진실은 사람(범인!)이 아니라 더 큰 맥락(계급! 구조!)에 있음을 분명히 짚지 않은 서사의 틀 위에서, 이런 루미의 결심은 악을 상징해야 하는 다윈 집안의 역사를 은폐된 살인의 추억으로 쪼그라지게 만들 뿐이다. 정말, 이런 순진함이 희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원작과는 다른 결말을 통해 원작이 던진 문제의식이 더 깊어지고 넓어져야 하건만, 오히려 원작의 의미를 축소시켜버리는 결과만 남은 각색은 그저 실망스럽다. 이야기의 맥락을 만들지 못한 채 작가의 의도로만 떠다니는 희망의 장치에 ‘악의 기원’이라는 제목이 과분할 뿐이다. 극작의 논리로 볼 때 비어 있는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젊은 작가가 던져놓은 아직은 성글게 보이는 악이라는 화두를, 연륜이 있는 중견작가가 넓고 깊게 받아 안지 못하고 오히려 소설의 표층마저도 소화하지 못한 채 겉돌다 말았다는 사실이 가장 아쉽다. 정말, 이것이 악에 대한 상상력의 전부인 걸까?
어두워질 때까지
하지만 이런 표피적인 결과물의 책임을 대본에만 돌릴 순 없다. 이 대본에는 원작의 내용이 자질구레하게 느껴지는 부분까지 거의 대부분 담겨 있다. 이 말인즉슨, 대본이 담아놓은 재료를 어떤 방식으로 엮어내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다시금 방향을 잡을 수도 있었다는 거다. 일례로 살인자의 진실뿐 아니라 죽은 자의 진실이 그렇다. 즉 죽은 자는 피해자임이 맞지만 사실은 살인자보다 더 악에 가까운 인물(자기와 다른 사람을 향해 ‘척결’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는 사람!)임이 그 이유와 더불어 극에서 제시되는데, 이런 부분에 어떻게 강조점을 찍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또 하나의 질문을 만들어낼 수도 있을 터.
그런데 이 작품의 만듦새를 보면 무대화의 상상력은 대본보다도 더 좁아져 있음을 금세 알 수 있다. 작가는 악의 기원을 축소시켜버렸지만 연출은 악의 기원에 아예 관심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가장 분명하게 관객에게 드러나야 할 장면이 모호한 것이나(다윈이 아버지의 말을 들은 거 맞아? 다윈이 레오의 목을 조른 거 맞아?) 의도와 달리 우스꽝스러워진 장면(제이의 추도식에 조악한 컵케이크 먹으면서 라인댄스를 추는 1지구 사람들!)은 그냥 그렇다 치자. 안무다운 안무가 하나도 없었을뿐더러 춤이었다면 더 인상적이었을 전투 장면에 화약 다발총을 다다다 등장시킨 단순한 상상력도 그냥 아쉽다 치자.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이 작품이 무엇을 이야기하는가에 집중하기보다는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클리셰에 이야기를 접어 넣는 모양새가 빈번하다는 점이다.
이야기가 시작되는 학교 장면부터가 그렇다. 절대적인 계급의 상징을 덧입었어야 할 주인공들에게 흔하디흔한 스쿨 뮤지컬의 외피를 입혀버렸을 때, 학교와 관련된 모든 장면은 클리셰의 박물관이 되고 만다. 교복은 그냥 유니폼이고, 학생은 모범생이어야 하며, 선생은 언제나 권위적이다. 배우의 전형적인 연기는 설상가상이다. 프라임 스쿨의 법학 교수라는 캐릭터에서 출발하지 않고 지금껏 해왔던 권위적인 선생 이미지를 반복하는 기계적인 연기는 클리셰의 정점을 찍는다. 게다가 교복 입은 레오가 교복 입은 다윈에게 ‘자유’를 이야기하며 춤을 추는 장면이란! 필요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는 이 장면의 유일한 유익함은, 마치 볼링공이 레인을 벗어나 도랑에 빠지는 것처럼, 전형적인 장면 연출이 어떻게 이야기의 결을 흐트러뜨리는지를 알게 해준다는 데 있다. 이런 양상은 극 전체에 걸쳐 이어진다. 그 결과 이 작품의 연출은 대본의 빈틈을 해석으로 채워 넣기는커녕 오히려 그 틈새를 열린 대문만큼이나 넓혀놓고 만다.
그 열린 대문 사이로 보이는 더 큰 클리셰의 풍경은 희망에 대한 강박과 밝음에 대한 집착이다. 이런 전형은 결국 이 작품이 마땅히 가져야 할 고유한 스타일을 망쳐버리고 만다. 뮤지컬이 어두운 주제를 다루면 안 되나? 의미를 담은 비관으로 끝나면 안 되나? 관객에게 결론이 아니라 질문을 던지면 안 되나? 깊은 곳을 바라보면 거기는 언제나 어둡다. 뒤집으면, 어둠을 탐색할 때에 깊이 있는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거다. 이 작품에는 그럴 만한 가능성이 아직 있다. 그 힘의 근간은 바로 음악이다. 이 작품의 음악은 음역뿐 아니라 감정과 사유에서 넓은 진폭을 보여준다. 부드러움 안에 불안함이 섞여 있고 음울함 위에 웅장함이 더해지는 등 심정의 안쪽과 사건의 바깥쪽을 넘나드는 음악의 극적 해석은 유려하다. 이 작품 안에서 가장 예민하게 어둠을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어둠에 대한 음악적 천착은 자주 흔들려버리고 만다. 어색하게 밝았다가 부자연스럽게 끊긴다. 왜 이런 걸까. 이유는 지금까지 말한 바다.
작품의 성과는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 해도 사실 이런 원작 소설을 국공립 예술 단체에서 기획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이 지니는 의미는 선명하다. 서울예술단이 이제는 다양한 스타일을 시도하는 ‘과감한 제작사’임을 이 작품은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자면 이 시도는 나름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 하지만 작품의 진짜 성공을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그 길을 가기 위해 이 작품이 마음껏 어두워지길 기대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2호 2018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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