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벳> 신영숙, 당신과 함께 꾸는 꿈
2012년 초연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뮤지컬 <엘리자벳>. 3년 만에 돌아오는 작품에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탄탄한 실력과 안정된 연기력으로 다양한 작품에서 활약을 펼쳐온 신영숙이 새로운 엘리자벳으로 출연한다는 것. 그녀는 인터뷰라는 딱딱한 이름의 편안한 수다를 통해 “삶은 도전이라고 생각해요”라고 밝혔다. 신영숙이 선택한 <엘리자벳>이란 도전은 과연 어떤 결과를 그려낼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인생을 바꾸는 계기는 의외의 순간 찾아온다. 유학을 준비하다가 좋은 기회를 잡아 한국을 대표하는 뮤지컬 <명성황후>로 데뷔를 이룬 신영숙. 그녀는 이후 서울예술단에 입단해 기본기를 다졌고, 프리랜서를 선언한 이후에도 다양한 작품으로 무대에 섰다. 1999년부터 2018년까지, 훌쩍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녀는 <명성황후>의 명성황후,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 <모차르트!>의 남작 부인, <맘마미아!>의 도나로 주·조연을 아우르며 어느 작품에서나 안정된 실력을 보여줬다. 올해 신영숙의 새로운 도전은 여성 배우라면 한번은 꿈꾸었을 <엘리자벳>의 엘리자벳이다. “<엘리자벳>이 한국에 소개되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데뷔 초부터 지금까지 옆에서 ‘신영숙의 뮤지컬 세월’을 응원해 줬던 팬들이 이 작품을 번역해 노래와 함께 선물했거든요.” <엘리자벳>의 엘리자벳은 그녀의 팬들이 먼저 점찍어 놓았던 셈. 이들의 애정이 듬뿍 담긴 응원에 힘입어 <엘리자벳>은 신영숙에게 당연히 꼭 참여하고 싶은 작품 위시리스트의 상위권에 자리 잡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엘리자벳>을 “혼자 꾸는 꿈이 아닌 오랜 시간 자신과 함께한 팬들과 함께 꾸는 꿈”으로 의미 깊은 작품이라 칭하며 애정을 드러냈다. <엘리자벳>은 초연 전 김준수의 뮤지컬 콘서트에서 소개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무대에서 신영숙은 작품의 대표적인 뮤지컬 넘버인 ‘나는 나만의 것’을 열창했다. “그때 한국에서 가장 먼저 <엘리자벳>의 노래를 부르게 됐어요. 당시엔 ‘나는 나만의 것’의 전후 상황을 충분히 잘 몰랐고, 엘리자벳의 감정을 완벽하게 공부하지 못한 채 무대에 올랐죠. 그런데 노래가 정말 아름다워서 짜릿한 기억으로 남았어요. 지금도 엘리자벳으로 정식 무대에 오르기 전이지만, 그때보다 훨씬 더 그녀를 잘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엘리자벳>은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꾸었던 꿈이잖아요. 기대해 주시는 많은 분에게 실망을 안겨드리고 싶지 않기도 하고, 잘 해내고 싶다는 기분 좋은 부담감이 있어요.” 당시 콘서트에서 얻은 좋은 평가 때문이었을까, 2012년 초연 당시 신영숙의 캐스팅을 바라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초연이 지나도 쉽사리 신영숙의 엘리자벳을 만나기는 어려웠다. 돌고 돌아 오랜 시간 기다린 작품은 그녀에게 더욱 애틋한 인연으로 다져지는 중이다. “작품은 엘리자벳의 일생을 펼치면서 그녀의 변화를 그려요. 엘리자벳이 나이를 먹어가며 겪는 감정의 변화가 다양하게 나타나요. 이런 과정을 섬세하게 보여줘야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을 이끌어가는 힘이 생길 것 같아요. 그리고 이런 힘이 있어야 관객이 작품 속으로 확 빠져들거든요. 전 관객 분들이 엘리자벳의 삶에 푹 빠지게 만들고 싶어요.”
<엘리자벳>에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황후 엘리자벳의 일생이 무대 위에 펼쳐진다. 16세의 어린 소녀부터 죽기 직전의 모습까지 말이다. 특히 죽음이라는 초월적인 존재와 사랑에 빠진 엘리자벳이 자유를 갈망하는 모습이 강조된다. 여기에 유럽의 정치적 상황이 더해져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으로 완성됐다. “엘리자벳은 죽음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어요. 삶 속에서 자유를 얻지 못한 그녀는 죽음과 사랑에 빠지고 결국 자유를 찾거든요.” 그렇다면 신영숙의 엘리자벳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엘리자벳이 느끼는 답답함, 우울함, 텅 비어버린 공허함 같은 아픔이 느껴지더라고요. 대본을 읽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는 거예요. 살짝 겁도 났어요. ‘이렇게 읽는 것만으로도 깊은 감정이 휘몰아치는데…’라는 생각이 들었죠. 전 엘리자벳의 다양한 감정을 그저 쉽고 단순히 그리고 싶지 않아요. 제 안의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감정을 과하지 않게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가장 커요. 스무 해 가까이 된 제 연기 경력과 경험을 모두 녹이려 하고 있죠. 무대에서 돋보이거나 아름다운 엘리자벳이 아니라 그녀가 느낀 모든 것을 작품 안에 스미게 만드는 것이 제 목표에요.”
밤하늘의 별처럼
‘뮤지컬 배우 신영숙’ 하면 떠오르는 캐릭터가 있다. 바로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과 <모차르트!>의 남작 부인이다. 두 역할 모두 신영숙의 대표적인 캐릭터로 꼽히며 큰 호평을 받았다. 신영숙은 초연부터 네 시즌에 연달아 출연한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으로 음침하지만 강렬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다. 또 그녀의 별명이 된 ‘황금별 여사’는 <모차르트!> 남작 부인의 대표적인 뮤지컬 넘버 ‘황금별’을 본떠 붙여진 것이다. “사실 뮤지컬 배우들에겐 온전히 ‘내 노래’라고 할 수 있는 곡이 없잖아요. 그래서 ‘내 노래’를 가지고 싶다는 갈증이 있어요. 그런데 <모차르트!>의 ‘황금별’ 하면 제가 떠오른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행운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특히 ‘황금별’은 누군가의 도전을 응원하고 힘을 건네는 노래예요. 그래서 작품 속에서도, 작품 밖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았죠. 이렇게 노래로 누군가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건 정말 감사한 일이라 생각해요.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으로도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처음 <레베카>의 공연 영상을 보았는데, 그 순간 소름이 돋을 정도로 꼭 출연하고 싶었어요. 작품은 여러 가지 운이 따르고 인연이 닿아야 만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계속 무대에 설 수 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관객의 사랑과 인정이에요. 감사하게도 <레베카>는 관객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 초연부터 계속 출연했다고 생각해요. 두 작품 모두 신영숙을 대중에게 알릴 수 있었던 소중한 작품이에요.” 특히 ‘황금별 여사’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녀의 팬들은 신영숙을 위해 실제 밤하늘의 빛나는 별을 선물했다고. 이 사랑스러운 선물이야기를 꺼내자마자 그녀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퍼진다. “별의 이름은 ‘마마님의 황금별’이에요. 북두칠성 옆에 있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의미 있는 선물이죠. 황금별은 제 이름을 알린 ‘황금별’과도 깊은 연관이 있어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문득 밤하늘 볼 때면 ‘나를 응원해 주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면서 힘을 내죠. 사실 팬들에게 제가 이번에 <엘리자벳>에 출연하게 됐다는 소식을 전했더니 어떻게든 제게 힘과 응원을 건네려고 신경 쓰는 것 같더라고요. (웃음) 요즘은 특히나 이런 소중한 마음을 느끼고 있어요.”
신영숙은 뮤지컬 작품 속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주로 맡아 소화해 냈다. 스스로 “인형같이 예쁜 외모가 아니라 개성을 가진 배우”라 자신을 소개했고, 그래서 다양한 캐릭터를 할 수 있었노라 말하는 신영숙. 그녀는 <맘마미아!>의 도나, <웃는 남자>의 조시아나 공작 부인, <팬텀>의 카를로타, <두 도시 이야기>의 마담 드파르지처럼 자기 주장이 강하거나 자신이 느낀 감정에 충실하고 주도적인 성향을 지닌 역할로 주로 무대에 섰는데, 이런 성격은 사실 그녀의 실제 성격과도 많이 닮았다. 신영숙은 본인의 생각을 거침없이 말하면서도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녀는 자신의 개성으로 캐릭터에 다양한 색을 입 힐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코믹, 공포, 카리스마 등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각양각색의 캐릭터를 향한 갈망을 포기할 수 없단다. 신영숙이 관심을 가진 캐릭터는 바로 ‘이중성’을 지닌 인물.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거의 대부분 섭렵한 그녀에게 도전하고 싶은 남성 캐릭터를 꼽아달라고 말하자, 곧 바로 대답이 튀어나온다. 대중에게 오래도록 사랑받는 <지킬 앤 하이드>의 지킬·하이드와 지금 무대에 오르고 있는 <웃는 남자>의 그윈플렌을 꼽았다. 지킬과 하이드의 간격에서 오는 이중성, 그윈플렌이 지닌 괴기스러우면서도 순수한 면모가 탐나기 때문이란다. 당장 신영숙이 지킬·하이드나 그윈플렌으로 무대에 설 수는 없겠지만, 앞으로 그녀가 도전할 캐릭터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진다.
배우라는 천직
신영숙의 데뷔 무대는 1999년 예술의전당 오페라 하우스에서 공연한 <명성황후>다. 명성황후의 조력자 손탁이자 앙상블로 무대에 오른 그녀는 다른 뮤지컬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너무 떨려서 기억도 안 난다’며 당시의 설렘을 회상했다. 신영숙은 손탁을 연기하는 동시에 사다리를 타고 등장하는 서양 공사를 연기하기도 했고, 10벌이 넘는 옷을 갈아입으면서 무대 위를 뛰어다녔다고 밝혔다. 앙상블로 시작한 뮤지컬 무대, 그녀는 긴 시간을 견뎌 2015년 <명성황후>의 주인공 명성황후로 다시 돌아왔다. “명성황후로 참여했던 시즌도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공연했어요. 첫 등장을 준비할 때, 홀로 깜깜한 무대의 차막 뒤에서 기다리고 있거든요. 무대는 불이 켜지지 않았지만, 반대로 객석은 환한 불이 켜져 있어요. 그래서 객석에 차 있는 관객을 볼 수 있어요. 또 오페라하우스는 둥그런 구조라 포근히 감싸주는 느낌이 들거든요. 무대에 서 있는데 ‘마치 그동안 네가 정말 열심히 무대에서 사랑하고 연기하고 노력했구나. 여기서 데뷔했는데 시간이 흘렀고 명성황후로 서고 싶다는 꿈을 이뤘구나’ 하고 응원해 주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저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웃음) 마치 이 많은 관객이 저를 응원해 주면서 안아주는 것 같이요. 뮤지컬 무대에 서고 많은 시간이 흘렀는데, 제 자신에게 칭찬해 주고 싶기도 하고 여러 감정이 교차했어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은 신영숙의 곁에서 빠르게 지나갔다. 이제 그녀의 인생에서 뮤지컬 무대는 ‘당연히 곁에 있는 존재’다. 물론 세상을 살면서, 뮤지컬 배우로 무대에 서면서 힘들지 않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무대에 오르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단다. 신영숙은 무대를 떠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는 진심도 덧붙인다. 무대에 대한 애정을 유쾌하게 내뿜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뮤지컬 배우라는 직업은 하늘이 내려준 천직이 아닌가 싶다.
<더뮤지컬>은 5년 전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으로 캐스팅된 신영숙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당시 ‘10년 후의 신영숙의 모습’에 대한 질문에 그녀는 여전히 배우를 하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진솔한 마음과 <맘마미아!>에 출연하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신영숙은 뮤지컬 배우로 무대에 서고 있고, 꿈에 그리던 <맘마미아!>의 도나로 참여했다. “벌써 5년이 흘렀네요. 다시 그때가 생각났어요. 꿈꿨던 목표를 이뤘네요. 사실 <엘리자벳>도 제겐 꿈의 작품 중 하나였는데, 이 작품을 통해 <더뮤지컬>과 다시 만났어요. 전 꿈을 꾸고 있으면 언젠간 이뤄지는 걸 알게 됐어요. 솔직하게 말하면 전 역할이나 작품에 욕심을 부리는 성격은 아니에요. 그래서 제게 역할이 하나하나 주어질 때마다 감사해요. 이렇게 열심히 해 나가다 보니 제가 꿈꿨던 것들도 어느 순간 제 앞에 있더라고요. 때로는 내려놓았던 것들도 다시 잡을 수 있고요. 앞으로는 멀리 내다보는 꿈을 꾸고 싶어요.” 인터뷰의 마지막 질문으로 앞으로 ‘신영숙의 10년’에 대해 물었다. “10년 후에도 제게 주어진 역할을 매력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목표예요. 역할의 크고 작음을 구분하지 않고요. 음, ‘신영숙이 하면 그 역할이 빛이 난다’거나 ‘신영숙이 못 하는 역할이 어딨어. 신영숙에게 맡기면 다 해내’라는 말을 듣는 거요. 무엇보다 10년 후까지도 항상 배우라는 이름과 무대와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런데 5년이 이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다니, 시간이 정말 빨리 가네요. (웃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1호 2018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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