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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내가 사랑한 무대 속 여성, 김여진 [No.180]

글 |박보라 2018-10-01 5,238

뮤지컬 역사를 만든 여성들
올겨울 국내에 상륙할 디즈니 뮤지컬의 자랑 <라이온 킹>을 설명할 때 절대 빠지지 않고 첫 번째로 언급되는 이름이 있다. 거대한 밀림의 왕국을 훌륭하게 무대로 옮긴 <라이온 킹>의 수장 줄리 테이머 말이다. 1997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라 벌써 20년이 넘도록 여전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작품답게 초연 이듬해 열린 토니상의 연출상은 당연히 줄리 테이머의 차지였다. 그런데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가. <라이온 킹> 이후 탄탄대로에 올라섰을 것 같은 줄리 테이머가 거머쥔 또 다른 토니상은 무엇이었을까? 또한 이런 궁금증도 생길 것이다. 깊은 역사를 자랑하는 뉴욕과 런던 공연예술계의 상징적인 시상식 토니 어워즈와 올리비에 어워즈에서 트로피를 차지한 여성 창작자로는 또 누가 있었을지. 남성 중심의 공연계에서 역사를 일구어낸 여성 예술인들의 이야기. 이것이 바로 이번 호 특집 기사의 주제다. 

내가 사랑한 무대 속 여성
여성으로서 사회의 높은 벽에 부딪칠 때마다 절감하는 점은 우리에게는 더 많은 여성 롤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작품으로 용기를 주는 생면부지의 창작자부터 바로 앞에서 직접적으로 좋은 영향을 준 배우까지, 한 명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내가 사랑한 훌륭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     

김여진,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질 때까지 이어지는 외침 




배우 김여진이 연극 <리차드 3세>에서 리차드 3세의 형수이자 피로 얼룩진 권력 쟁탈전의 경쟁자 엘리자베스 왕비로 무대에 오른다는 소식을 듣고 최적의 캐스팅이라 생각했다. 최근 상업 예술 속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여성은 순수한 첫사랑 혹은 술집 여자, 악녀 등의 그저 그런 인물이었는데, 엘리자베스 왕비는 리차드 3세와 대적하는 강한 여성이었으니까. 심지어 내게 김여진은 할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다소 센 이미지의 배우였다. 마치 불의를 보면 참지 않고, 침묵하기보다는 소수 의견에 목소리를 더하기를 택한 비주류, <위키드>의 초록 마녀 엘파바처럼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김여진은 이화여대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하다 우연히 연극을 보고 무대로 뛰어들었다. 이후엔 임신한 몸으로 여성의 성(性)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파격적인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에 출연했고, 성범죄를 다루는 검사들의 이야기로 사회의 인식 변화를 위한 목소리를 냈으며(KBS2 드라마 <마녀의 법정>) SNS를 통해 활발하게 꾸준히 약자를 향한 자기 생각을 전했다. 물론 서슴없이 행동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녀는 대학 청소 용역 직원의 처우에 대해 말하고, 성접대 가해자에게 일침을 날리거나 한진중공업 정리 해고에 반대하는 크레인 농성 현장을 찾아다녔다. 하필이면 김여진과의 만남은 허공에만 존재한다고 했던 지난 정권의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실재했고, 그녀가 그 리스트 안에 있었다는 사실로 세상이 시끌벅적했을 때였다. 강한 그녀의 이미지에 ‘쫄아버린’ 내가 오죽하면 김여진과 마주 앉은 자리에서 인사 이후 건넨 첫 말은 ‘까칠하실까 봐 걱정했어요’였을까. 그 순간 책이 빼곡하게 꽂힌 카페 안에 울려 퍼지는 웃음소리는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도대체 내가 어떤 이미지야?” 공연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묻는 질문부터 자연스럽게 그녀의 아이 이야기가 나왔다. 지면에서는 순화했던 이야기를 이제야 날것 그대로 풀어놓자면, 김여진의 아이는 ‘엄마랑 떨어지는 화를 못 이겨’ 열이 38도까지 올랐고, ‘연극을 하는 사람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는 짐짓 진지한 배웅을 했다고 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공연이나 사회적인 문제보다 연애와 결혼 그리고 육아를 비롯한 여성의 삶에 대해 꽤 오랜 대화를 나누었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까워졌던 소재는, ‘여성이라 생긴 일’에 대한 공감이었다. 당시에 난 (이 지면에 쓰기 민망하지만) 절친한선배의 추천으로 다른 언론사에 이력서를 넣은 상태였고, 면접도 보지 못한 채 낙방했다. 후에야 건너 듣게 된 탈락 이유는 바로 ‘여자’이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김여진은 “아휴, 속상했겠다”라면서 ‘여성’이기 때문에 주어지지 않았거나 밀려난 기회에 대한 아쉬움을 쏟아냈다. 그녀는 지난해 ‘뉴스1’ 인터뷰에서 “남자에 비해서 여자 배우들은 기회가 많이 없다. 여자 캐릭터가 많이 나오면 재미가 없나 생각도 한다. 꼭 주인공을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조연이어도 주체적으로 다양한 면이 있는 여성 캐릭터들이 별로 없다”며 고충을 털어놨다. 이게 끝이 아니었다. 직장 여성이 결혼하고 홀로 육아를 도맡는 현실에 대한 일침도 이어졌다. “어쩜 내게 결혼과 육아가 이렇게 힘들다는 걸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어! 정말로! 심지어는 우리 엄마도 말을 안 해줬다니까요. 얼마나 배신감이 느껴지던지.” 그녀는 2017년 ‘여성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하는 여성 중 페미니스트가 아닌 사람이 있나요? 사소한 차별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내 안에 리트머스지가 있다는 거죠. 차별에 불편해하고, 화를 내고, 참기도 하는 모든 순간이 다 페미니즘이죠”라며 목소리를 냈다.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비주류라고 여겨지는 여성의 위치를 수없이 주류로 끌어올리는 김여진에게 동경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레드북>의 씩씩하고 똑똑한 주인공 안나가 생각났다. “당연한 것들이 당연해질 때까지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어요”라고 외치며 세상에 절대 굴하지 않았던 그녀 말이다. 




종종 ‘여성’으로서, ‘여성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닥치면 김여진이 생각난다. 그녀는 올해 초 ‘여성중앙’과 진행한 인터뷰에서 어떤 어른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일단 동등한 관계에서, 나도 편안하고 상대도 편안해져야 서로 웃기고 장난도 치지. 그렇게 할수록 관계는 더 좋아진다. 어릴 때는 사람 사이가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사람 사이는 웃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멋진 선배와의 만남 덕분에, 내가 여성으로 씩씩하게 이 세상을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위로와 유대감을 느낀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0호 2018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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