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록키호러쇼> 전예지, 야무진 성장기
이름 없는 코러스 걸 페기 소여가 하룻밤 만에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이야기를 그린 <브로드웨이 42번가>. 이 꿈같은 이야기를 현실로 만든 이가 있으니 바로 2013년 페기 소여를 연기한 신예 전예지다. 불과 열아홉의 나이에 대극장 뮤지컬 주인공 자리를 따낸 드라마틱한 스토리는 앞으로도 배우 전예지를 소개하는 모든 글에서 도입부를 차지할 것이다. 그런데 이 도입부에 이어 두고두고 회자될 만한 역할이 하나 추가됐다. 바로 요새 그가 ‘인생캐’라는 말을 듣고 있는 <록키호러쇼>의 콜롬비아다. 고양이처럼 앙큼하고 팅커벨처럼 깜찍한 전예지의 콜롬비아는 사실상 이 역할의 비중이 크지 않다는 사실을 잊게 할 만큼 놀라운 존재감을 발한다. ‘인생캐’라는 칭호가 단순히 운 좋게 이미지에 잘 맞는 역할을 만나 얻어진 게 아니라는 결론은 그의 무대를 보면 알 수 있다. <브로드웨이 42번가>에서부터 갈고닦은 탭댄스, 목을 아끼지 않는 까랑까랑한 하이 톤 목소리, 뒤에 서 있을 때조차 손끝까지 사랑스러운 포즈. 이 모든 게 노력과 실력으로 야무지게 다져진 느낌을 팍팍 주니까 말이다. 실제로 인터뷰 자리에서 만난 전예지는 예상과 달리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성격이어서, 그의 콜롬비아가 꼼꼼한 캐릭터 연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리라는 생각에 확신을 더해 줬다. 깔깔거리며 무대를 휘젓는 콜롬비아는 잠시 잊고, 배우 전예지가 한 마디 한 마디 신중하게 꺼내놓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시길.
학창시절 어떤 학생이었나?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말을 잘 못하고 성격도 조용한 편이라 한동안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그런 나를 걱정한 부모님이 입이라도 떼라며 연기 학원에 보내주셨다. 2006년 학원 선생님의 권유로 <애니> 아역 오디션을 봤는데 운 좋게 타이틀롤로 발탁됐다. 그때는 무대에 서는 게 즐겁기보다 어른들이 시키니까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부모님도 내가 공부를 하길 바라셨기 때문에 아역 활동은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이후 일반고를 다니다가 뒤늦게 연기에 빠져들었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게 한 작품이 있나?
<캣츠> 공연 실황 영상을 보고 뮤지컬에 꽂혔다. 부모님이 성악가이셔서 오페라에 익숙해져 있다가 뮤지컬을 접하니 너무 신선하고 재밌었다. 무대에서 살아 움직이는 배우들의 모습에 매력을 느꼈다.
<브로드웨이 42번가> 캐스팅에 얽힌 에피소드가 있다면?
고등학교 재학 중 연극영화과 입시를 준비하면서 <브로드웨이 42번가> 오디션을 봤다. 오디션 원서란 걸 처음 써봐서 멋모르고 페기 소여 역에 지원했다. 주인공 오디션 콜을 받았을 때도 그게 얼마나 굉장한 일인지 몰랐다. 그냥 내가 오디션을 보고 싶어 하니까 보게 해주는 줄 알았지. 그런데 오디션장에 가보니 대기 중인 배우가 몇 명 없는 데다 나만 빼고 서로 모두 아는 사이라 어리둥절했다. 심지어 다들 예쁘게 꾸미고 왔는데 나만 민낯에 레오타드 차림이더라. 오디션 끝나고 망했다고 엉엉 울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스무 살에 처음 참여한 <브로드웨이 42번가>는 사실 잘 기억이 안 난다. 울면서 연습했던 기억뿐. 당시 설앤컴퍼니에 계셨던 알앤디웍스 오훈식 대표님은 나를 캐스팅한 뒤 사직서를 품에 넣고 다녔다고 하시더라. 다음해 다시 참여한 <브로드웨이 42번가>의 첫 공연이 끝난 뒤 처음으로 주변에서 칭찬을 들었다. 예지야, 너 많이 늘었다. 그 얘기를 1년 만에 들었다.
<록키호러쇼>의 콜롬비아를 연기하기 위해 참고한 게 있다면?
<록키호러쇼>와 관련된 공연 영상과 영화를 구할 수 있는 대로 봤다. 그리고 영화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마고 로비가 연기한 할리퀸을 참고했다. 또라이이면서 사랑에 맹목적인 점이 콜롬비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당신에게 완벽한 행복이란?
아무 약속도 없는 주말에 집에서 엄마 아빠랑 밥 해 먹기. 사실 나는 집에 가만히 있는 걸 좋아하는 집순이다. 집안일과 반신욕을 좋아한다. 요새 콜롬비아를 보고 내 원래 성격도 활달하고 애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신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재미없는 인간이라 걱정이….
당장 집이 무너진다면 첫 번째로 챙겨 나올 물건은?
손으로 쓴 일기장 겸 연습 노트. 내 마음속 이야기를 가장 솔직하게 털어 놓는 곳이다. 만약 이 일기장이 외부에 유출된다면 너무 창피해서 한국을 떠야 할지도!
가장 멀리하고 싶은 유형의 사람은?
가십을 좋아하고 타인에 대해 쉽게 말하는 사람. 재미로 한 말이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나부터 말을 아끼려는 편이다. 책임지지 못할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하지 않을 행동이 있다면?
내 생각이 아닌 걸 내 입으로 말하는 것.
배우에게 가장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덕목은?
끈기. 단숨에 인기와 유명세를 얻기보다는 오래 버티는 배우가 되는 것이 목표다. 잘난 배우, 예쁜 배우는 많지만 내가 가장 존경하는 배우는 30여 년째 무대를 지키고 계신 최정원, 남경주 선배님이다. 그렇게 오래가는 배우가 되기 위해서는 화려한 무대 뒤 반복되는 일상과 훈련을 끈기 있게 버텨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히 공백기를 잘 견디는 게 어렵다. 텐투텐 연습을 견디는 건 오히려 쉽다. 하지만 아무런 계획도 보장도 없이 일이 생기길 기다리며 붕 떠 있는 상태가 몇 달이 될지, 몇 년이 될지 모를 때, 꿈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앞으로 맡고 싶은 꿈의 배역을 꼽는다면?
특정 역할을 꼽기보다는 연기력이 요구되는 역할을 맡고 싶다. 쇼 뮤지컬도 즐겁지만 연극적인 작품에 더 도전해 보고 싶다.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재미를 느낀다.
인터뷰에서 받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역으로 질문을 던지고 싶다. 저에게 어떤 역할이 어울릴까요? 저한테서 어떤 모습이 보고 싶으세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0호 2018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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