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큐 베리 스트로베리>, 서툴지만 따뜻한
SF 활용법
영국으로 추정되는 나라의 1인 가구가 모여 사는 ‘싱글 마을’. 이 마을에서는 정부가 독거노인을 위해 도우미 로봇을 보내준다. 사람보다 더 사람 같은 (잘생긴) 외양. 나의 필요에 언제든 응답할 준비가 되어 있는 만능 도우미. 내가 감정적으로 보상하지 않아도 전혀 불만을 갖지 않고 그 자리에 있어주는 삶의 동반자. 집안일은 물론, 종종 산책도 시켜주고 이야기도 들려주는, 나만 보는 나만의 로봇. 탐나는 설정이다. 비혼을 생각하는 여성의 입장에선 더더욱. 나이 들면 집안일은커녕 내 몸 하나 건사하기 어렵고 친구도 없을 것 같은데 도우미 로봇을 무료 보급하는 복지 정책이라니 환영이다. 뮤지컬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의 설정은 가까운 미래에는 이루어지기 어려울 달콤한 환상이다. 그리고 당연히, 작품의 주인공은 그런 ‘행운’을 행운인 줄 모르고,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꼬장꼬장한 노인 여성이다. 설정이란 게 원래 그렇지. 처음엔 주인공 눈에만 그 행운이 안 보이는 법이다.
혼자 사는 엠마는 과거의 상처로 인해 집안에만 머무른다. 하지만 이내 그 고립이 깨지는 날과 맞닥뜨리게 된다.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가 멈추지 않고 괴롭게 울리는 탓에 문을 열어보니 정부에서 보낸 로봇이라는 게 와 있고 어쩌다 ‘활성화’를 시키게 되는데, 아무리 로봇을 내쫓으려 해도 ‘주인의 5m 반경에 머물러야 한다’며 멀리 가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같이 살긴 하는데 꼭 사람같이 생긴 게 어찌나 잔소리가 심한지, 어둡던 방에 커튼을 걷어 햇볕을 들이고, 곳곳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고, 노령에는 산책이 필수라며 밖에 나가자고 호통이다. 낯선 존재가 일상에 훅 들어와 지금껏 공고하게 쌓아온 자기만의 성을 어지르는데,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해 숨어 지내온 엠마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달가울 리 없다. 하지만 어영부영 지내는 사이 엠마는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이 뮤지컬은 SF 장르인 듯 인간과 로봇을 주인공으로 내세우지만, 사실상 로봇이라는 설정은 단지 인간의 끝없는 투정을 지치지 않고 받아낼 수 있는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활용되는 데 그친다. 상대가 사람이었다면 진즉 나가떨어졌을 것을, 스톤은 로봇이기 때문에 주인의 갖은 변덕에도 낙담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매일 똑같이 웃으며 엠마를 대한다. 꾸준한 관심과 지속적인 두드림이 결국 엠마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다.
‘힐링’의 오류
작품의 무대는 켜켜이 먼지가 쌓인 것처럼 회색이다. 벽에는 서랍과 잡동사니가 곳곳에 숨겨져 있다. 마치 엠마의 머릿속 같다. 이웃과 대면하지 않고 혼자 살지만 정작 무엇에 상처받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엠마의 머릿속처럼 무대에는 그의 기억들이 봉인되어 있다. 그리고 스톤은 로봇임에도 참 호기심이 많아서 청소를 한답시고 엠마의 창고와 머릿속을 자꾸 헤집는다. 혼자 살아도 아무렇지 않던 엠마가 스톤에게 의지하게 된 그 타이밍에 스톤은 사라지고, 혼란스러운 엠마 앞에 과거의 기억이 펼쳐진다.
뮤지컬 내의 심리 치료는 언제나 과거를 되살려 직면하는 데에서 시작되는 법. 과거의 기억이 너무 고통스러우니 자기방어기제로 봉인한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내 되짚고,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고,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는 ‘힐링’ 과정은 관객도 힐링 되는 기분을 맛보게 한다. 엠마는 전보다 강한 사람이 되어 집을 벗어나 밖으로 한 발 내딛는다. 사람 마주치기를 무서워하던 그가 이웃에게 말을 걸고 차를 권한다. 따뜻한 결말이다. 괜히 딴지를 걸고 싶어질 만큼.
언젠가부터 ‘힐링극’이라는 말이 흔해졌다. 개인적으로 힐링에 알레르기가 있어 곱게 보이진 않는데 이 뮤지컬에는 아무리 꼬아 보려 해도 어쩔 수 없이 감화되는 따뜻함이 있다. 휘몰아치는 과거 회상 전개와 그 폭풍우가 걷힌 후 다시 스며드는 햇살은 시각적으로도 사람을 간지럽게 한다. 무대 벽에 박힌 영상 패널은 아기자기하게 분위기를 환기하고, 무대 전체를 매핑하는 영상이 시각적 재미를 준다. 가까운 미래 SF임을 증명하려는 듯 회색의 아날로그에 영상을 더해 놨다. 과거 부분이 늘어지는 것 같고, 저래서 엠마의 상처가 치유될까 싶고, 결론의 훈훈함 너무 갑작스럽고, 마을을 지킨다고 돌아다니는 버나드는 너무 많이 나오는 것 같고 등등 분명 이 극에는 서툰 매무새가 있다. 하지만 최고조의 감정을 쏟아내는 엠마와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보면, 어느새 약간의 위로도 받는다. ‘따뜻한 힐링극’에서 예측 가능한 클리셰가 흩뿌려져 있는데도 넘길 수 있게 한다.
무엇보다 나이 든 여성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가치가 있다. 뮤지컬 무대가 쉽게 주인공 자리를 내주지 않는 노인 여성의 삶과 기억이 작품을 지탱한다. 젊고 생기 있게 연애하던 시절을 지낸 후에도 삶은 계속된다는, 어쩌면 외면하고 싶은 사실을 가시화한다. 젊지 않은 배우가 표현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배우들의 연기력은 흠잡을 데 없었다.
로봇이라는 희망
로봇이 등장하는 SF 장르는 20세기의 상상력이지만 최근 들어선 겉보기만으론 인간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인간과 닮아 있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들이 등장한다. 사람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로봇이 로맨스의 영역에서 활용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다만 훈훈한 결말을 보면서도 SF 철학적인 의문들이 떠올랐다. 이제 따뜻하게 로봇과 더불어 살면 되나? 엠마가 죽으면 혼자 남은 로봇은? 데이터를 리셋하고 다른 주인에게 가나? 아니면 고장이 날 때까지 영원히 혼자 사나? 아니면 비활성화? 기왕 로봇이란 소재를 택한 김에 더 깊이 파고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결말이야 어쨌든,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는 비혼인에게 희망을 준다. 어서 과학기술이 발전해서 정부가 가사도우미 로봇을 가구마다 지원하는 시대가 왔으면 하는 새로운 희망. 빨래 해주고, 청소 해주고, 산책 시켜주는 로봇이라니. 비혼 독거노인의 필수템 아닐까. 초연작임을 고려할 때 어쩌면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는 창작뮤지컬의 작은 희망일지도 모르겠다. 왜냐면 요즘 같은 때 이 정도의 완성도만 보여줘도 ‘땡큐 베리 스트로베리’다. 괜한 사족을 달아보자면, 작가가 <라라랜드>를 재미있게 봤나 보다. 주인공이 ‘엠마’, 로봇이 ‘스톤’, 딸이 ‘미아’. 게다가 남편의 직업은 피아니스트. 아니면, 그 배우를 좋아하시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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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80호 2018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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