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 두 남자의 이야기
“피부색도 이렇게 다른데 우리가 어떻게 형제야!” 조정석이 소리를 지르면, 객석에서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첫눈엔 달라도 너무 다른 오만석과 조정석이지만 두 사람의 궁합이 이렇게 잘 맞을 줄이야. 어느 주말 저녁, 두 배우를 만나 첫 ‘호흡작’인 연극 <트루웨스트>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했다.
요즘 ‘석브라더스’에 대한 반응이 뜨거워요. 두 사람의 동반 연극 출연을 반기는 팬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트루웨스트>는 어떻게 참여하게 된 건가요?
오만석 언젠가 ‘무대가 좋다’ 시리즈에 참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트루웨스트>를 하자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오랜만에 연극을 하고 싶기도 했고, 게다가 작품이 <트루웨스트>니까. 15년 전쯤 한양레퍼토리에서 공연한 <트루웨스트>를 본 적이 있는데, ‘나이 좀 더 먹고 형 역할을 해보면 어떨까’ 라고 생각했던 작품이라 해보고 싶었죠. 정석이는 내가 같이하자고 꼬여서 하게 됐고요.(웃음)
조정석 형하고 드라마 <왓츠업> 촬영도 같이하고 있거든요. 촬영장에서 형이 ‘무대가 좋다’에서 <트루웨스트>라는 작품을 한다며 대충 설명해주는데 욕심이 나더라고요. 그때 형이 “정석이, 너 괜찮겠다” 하고 살짝 이야기한 걸, 제가 잡아챘죠.(웃음)
2인극이기도 하고, 형제 이야기라 두 사람의 호흡이 중요한 작품인데 파트너로 정석 씨를 떠올린 이유가 있나요?
오만석 워낙 친해요. 형 동생처럼 지내는 사이인 데다 마침 드라마도 같이 촬영하고 있어서 스케줄 맞추기도 어렵지 않으니 좋고. 정석이하고는 더블 캐스트로만 작품에 참여해봤지 한 무대에 서본 적은 없거든요. 이번에 겸사겸사 같이하면 즐겁고 재밌겠다 싶었죠.
소재도, 텍스트도 미국적 색이 강한 작품이라 한국적으로 풀어내는 데 고민이 많았다고요.
오만석 (유)연수 형이 워낙 열려 있는 연출가고, 작품에 대한 해석이 명쾌해서 즐겁게 작업했어요. 각색 작업을 할 때 어떤 부분은 나한테 맡겨서 각색을 같이했어요.(웃음)
조정석 영어 대본 찾아가면서 진짜 열심히 했어요. 영어 공부도 같이했죠.(전원 웃음)
<트루웨스트>는 체력적으로, 감정적으로 힘든 작품일 것 같아요. 이 작품을 연습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은 뭐였나요?
조정석 두 남자의 육체적 공방전, 이런 식으로 홍보가 돼서 액션이 궁금해 보러 오는 분들도 있지만 체력적인 건 힘들지 않았고, 그것보다는 구심점을 찾아서 오스틴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게 힘들었어요.
오만석 대본이 상당히 촘촘하고 섬세한 감정의 변화가 많기 때문에 한번 놓쳐버리면 다시 끌어올리기가 쉽지 않아요. 미묘한 감정의 대립과 일치가 반복되는데, 그게 잘 표현될수록 생명력을 갖는 작품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 집중하는 게 어려웠죠. 감정을 잡는 게 힘들다기보다는 힘 있게 끌고 갈 수 있는 집중력이 필요하니까 그게 쉽지는 않죠. 근데 연출님이 디렉션도 잘 주시고, 정석이가 워낙 잘하니까요.
조정석 이런 이야기는 흘려들으세요. 형이 워낙 농담을 잘하세요.(웃음)
리와 오스틴은 한집에서 나고 자랐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다른 성격을 지닌 형제죠. 극 중 상황이니까 좀 더 극단적으로 대조적이지만, 실제로도 한집안의 두 형제가 다른 성향을 띤 경우가 많더라고요. 이런 성격 차이는 어떤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하세요?
오만석 유전자로 성격이나 성향 차이가 난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환경의 영향이 더 큰 것 같아요. 저는 개인적으로 친하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대가 가지 않은 길을 택하려는 습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형제들의 성격이 다 다르게 형성되는 거고요. 예를 들어, 형이 뭘 잘하면 나는 형하고 다른 방식으로 잘해서 인정받고 싶은 거죠. 그런 심리를 누구나 다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서로 달라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조정석 (공감하며) 맞는 말이에요. 제가 그랬어요. 어머니가 편애가 좀 심한 편이셨어요. 작은형을 그렇게 예뻐하셨죠. 어머니가 외할아버지를 되게 좋아했는데 작은형이 외할아버지를 그대로 닮았거든요. 당신도 모르게 마음이 가나 봐요.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작은형이 군대에 있을 때 3년 동안 6번 빼고 매주 면회를 갔어요. 나는 엄마가 데려가니까 토요일에 학교 끝나고 면회를 가면 거기서 자고 일요일에 오는 게 생활이었어요. 내가 막낸데, 엄마가 작은형만 예뻐하니까 ‘나는 작은형이 하는 대로 안 해’ 이런 심리가 있었어요. ‘형하고 다른 방식으로 엄마한테 예쁨 받아야지’ 라는 생각을 은근히 했던 것 같아요.
형제의 이야기지만 양면성을 띤 한 사람의 내면이라고도 해석되잖아요. 리와 오스틴처럼 자신 안에 가장 대조되는 성향은 뭐예요?
오만석 사람은 누구나 이중성을 가졌다고 생각해요. 단지 더 드러내느냐, 덜 드러내느냐의 차이죠. 저는 가끔 저한테서 어떤 폭력성도 느껴요. 다혈질적인 면도 있고 어떤 때는 정말로 차가울 정도로 냉정하기도 하고. 저도 제 자신이 어떤지 모르겠어요. 이중적이라고 하기도 부족하고 다중인 것 같아요.(웃음)
조정석 저도 그 말에 굉장히 공감해요. 누구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듯이 모든 사람은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트라우마 때문에 폭력성이 나오지 않나 싶고요. 근데 그게 갑작스럽게 표출될 때는 저도 제 자신이 누군지 모르겠는 거죠. 저도 그럴 때가 있어요.
극 중에 등장하진 않지만 형제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지배적이에요. 형제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오만석 우선 이 극에서 아버지는 기능상으로는 매개 역할을 해요. 감정의 소통, 정보의 소통마저도 없었던 형제가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서로 몰랐던 것을 깨닫고, 느끼게 하는 기능적인 역할을 하는 거죠.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동생도 그렇고 특히 형은 우리 가족이 아무 걱정 없이 남들처럼 평범하게 잘살길 바라는 마음이 큰데, 그걸 이루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부분이 아버지 문제예요. 아버지는 두 형제가 이루어야 하는 첫 번째 목적이자 다가갈 수 없는 두려운 존재인 것 같아요.
자신의 꿈을 향해 착실하게 내달리던 오스틴이 모종의 사건을 겪고 형처럼 거칠게 변하는 건, 자신이 인정할 수 없는 누군가가 한순간에 기회를 가로채 갔다는 좌절감 때문인가요?
조정석 그렇죠. 좌절과 더불어 내 안에 있는 양면성이 드러나는 거겠죠. 물론, 그 사건이 완벽한 계기는 아니고 제 안에 계속 쌓인 것들이 있었겠죠. 여기서 중요한 건 인정하면서 인정하기 싫은 것과 연관돼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인정하기 싫은데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오스틴을 한순간에 무너지게 만드는 것 같아요.
리는 정말 내기에서 이겨서 시나리오 작업을 할 기회를 얻게 된 것이 맞나요? 오스틴이 “형이 협박한 거지?” 라고 물을 때, 리가 순간 멈칫하면서 표정에 미묘한 변화가 있어서 그 의미가 궁금했어요.
오만석 동생은 형이 늘 그런 방식으로 일을 해결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리는 본능적으로 도박에 대한 기질이 있는 인물이에요. 그러니까 사울 키머한테 “핸디가 어떻게 되세요?”, “시시하게 티비 쪽을 하시는 건 아니죠?” 하면서 승부욕을 불러일으키잖아요. 리는 단순하게 도박을 통해서 기회를 얻어낸 건데 동생은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고,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라고 믿고 싶은 거죠. 리는 동생의 그런 마음이 느껴지는 것에 대해 반감을 표출하는 거고요.
자유로운 방랑자인 리도 한편으로는 모범생 오스틴의 삶을 부러워하고요. 말하자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동경이었던 걸까요?
오만석 그렇죠. 그런 해석도 좋은 것 같네요. 나도 저렇게 살고 싶지만 난 그게 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못하는 일을 해내는 동생의 삶이 부러운 거예요. 공부도 잘하고, 어머니한테 사랑을 받고, 착실한 삶을 살아가는 동생을 동경했겠죠. 동생을 쫓아가지 못하는 내 자신에 대해서 자괴감도 느꼈을 것이고, 그걸 더 이상 견딜 수 없으니까 나가서 산 거죠.
실제로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누군가를 동경했던 경험이 있나요?
오만석 글쎄, 누군가를 그렇게 동경했던 적은… 잘 모르겠어요. (웃음)
조정석 저는 우리 형들을 동경했어요. 저하고는 다른 능력을 가진 형들이라 어려서부터 동경했죠. 어떻게 보면 사소한 건데, 제가 어렸을 때 태권도를 해서 운동은 누구한테 지는 걸 싫어했거든요. 그런데 우리 큰형이 운동 신경이 정말 좋아서 운동은 다 잘하는 거예요. 나한테는 큰 형이 꼭 성룡 같았어요. 큰형이 뭐하면 나도 따라하고, 형이 뭐 사면 그것도 꼭 사고, 그런 식으로 저도 모르게 형을 되게 동경했던 것 같아요.
관객들은 오스틴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고 하더라고요.
조정석 내가 형한테 괴롭힘 당하다 형한테 형이 했던 대로 갚아주니까 관객들이 통쾌해 하죠.(웃음)
오만석 이 작품의 시점은 오스틴의 시점이라고 생각해요. 관객들도 오스틴의 입장에서 작품을 보고요. 오스틴이 형과의 관계에 어떻게 적응해 나가고 어떻게 풀어나가느냐가 관객들의 가장 큰 관심사라는 생각이 들어요. 보통의 사람들이 사는 방식이 오스틴의 방식이니까요. 그런 점에 동병상련을 느끼는 거겠죠. 오스틴이 나중에 널브러지고, 안 하던 짓들을 하는 것에 대리 만족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아버지의 치아나 토스터의 상징적 의미는 뭐예요?
오만석 토스터는 쉽게 생각하면 우리나라의 밥솥이에요. 생각해보세요, 집집마다 돌아다니면서 다른 건 다 그대로 두고 밥솥 하나 훔쳐오는 거예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걸고, 집착하고, 그것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 그 꼴이 얼마나 웃겨요. 우리가 얼마나 아옹다옹 살고 있는가에 대한 메타포죠. 아버지의 치아는, 대사를 들어보면 “믹스 커피 말고 원두 커피냐”, “모조품 말고 진짜를 원해” 같은 유독 ‘진짜’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요. 꾸며내고 만들어진 것 말고 ‘진짜’를 느끼고 싶은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는 진짜 이를 다 뽑히고 그걸 대신할 수 있는 틀니마저도 잃어버리죠. 진짜가 아닌 다 만들어진 세상, 이젠 그것마저도 잃어가고 있다는 은유가 아버지의 치아인 거죠. 전 그렇게 해석했어요.
진정성에 대한 현대인들의 갈망이라는 얘기네요. 아까 각색 작업에도 참여했다고 말했는데, 각색을 할 때는 원작자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하잖아요. 샘 셰퍼드가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했다고 생각하세요?
오만석 명쾌하게 한 줄로 ‘이 작품의 주제는 무엇이다’고 이야기하긴 힘들어요. 샘 셰퍼드도 복합적인 느낌을 가지고 이 극을 쓴 거지, 하나의 주제에 대해 쓴 건 아닌 것 같아요. 결말 역시 열어놓고 싶어 했던 것 같고. 인간의 이중성, 물질 사회에서 무너져가는 가족의 이야기, 우리가 얼마나 수박 겉핥기식으로 그저 살고 있는가, 진짜 삶이란 무엇일까 등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런 것들이 다 섞여 있는 상황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기보다는 당신이 느끼는 만큼 취사선택해서 느끼라는 게 작가의 의도라고 생각했어요.
조정석 저는 <트루웨스트>를 하면서 샘 셰퍼드 작품을 알게 됐는데, 대본을 처음 봤을 때도 그랬고, 각색을 하면서도 느낀 거지만 미국적인 색이 강하더라고요. 서브 텍스트를 찾으려고 고민하다 떠오른 생각이 아무리 미국색이 강하다고 해도 결국은 형제 이야기라는 거였어요. 주변에서 이 작품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숨어있는 의미 하나하나도 중요하지만, 있는 그대로 형제 이야기로 받아들이면 더 재밌게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요.
그럼 ‘진짜 삶’이란 어떤 삶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오만석 글쎄요. 결국 진짜 삶은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삶이 진짜 삶인데, 자꾸 이게 진짜가 아니고 더 나은, 다른 무언가를 바란다는 게 문제라는 거죠. 오스틴의 대사에도 있잖아요. “형, 우리는 천국에 살고 있는 거야. 우리가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굳이 하나를 뽑자면 이게 샘 셰퍼드가 가장 하고 싶었던 이야기 중의 하나인 것 같아요. 우리가 단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우린 그 천국 안에 있다는 그런 이야기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8호 2011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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