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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웃는 남자>, ‘웃는 남자’는 웃을 수 있을까? [No.179]

글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 사진제공 |EMK뮤지컬컴퍼니 2018-08-23 6,290

<웃는 남자>, ‘웃는 남자’는 웃을 수 있을까?



 

규모의 기회비용

언제부턴가 EMK뮤지컬컴퍼니의 신작 앞에 붙는 수식어가 있으니 바로 ‘세계 초연’이다. 라이선스 작품이 아닌 창작 작품을 선보이면서 사용하는 말인데 생각해 보면 참 생뚱맞은 표현이다. 초연되는 작품 앞에 국내니 세계니 하는 수식어는 아직 의미를 얻지 못한 비어 있는 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시작은 국내 시장이지만 작품의 목표는 해외 시장임을 분명히 드러내는 의욕 충만한 자기 다짐이라는 건 물론 알겠다. 문제는 이 호기로움이 허세가 아님을 보여줄 만한 뚜렷한 수가 작품 안에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세계 시장에 통하기 위해서는 작품 자체의 매력과 완성도가 가장 중요할 텐데, ‘첫 번째 관객’에게 제시된 검증의 근거가 작품의 면모보다는 배우의 스타성일 때 이 공연은 수출용이라기보다는 내수용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제작의 규모만으로 보자면 이런 말이 억울할 수도 있겠다. 새롭게 선보인 창작뮤지컬 <웃는 남자> 역시 전작 <마타하리>에 버금가는 엄청난 시각적 규모를 자랑하니 말이다. 비단 EMK뮤지컬컴퍼니뿐 아니라 국내 제작사에서 만든 수출용 대형 뮤지컬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만듦새는 단연 무대이다. 해외 시장을 겨냥한 대형 창작뮤지컬의 무대는 대부분 웅장하고 그 위에는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스펙터클과 사진으로 간직하고 싶은 그림이 즐비하다. 하지만 이런 엄청난 규모의 무대가 단지 보기에 화려하고 멋진 사진으로 소비되는 데 그친다면 이 무대를 경쟁력 있는 좋은 무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같은 함정에 빠진 작품이 벌써 여럿이다.  
 

<웃는 남자>도 마찬가지다. 난파되어 침몰하는 배를 그려낸 첫 장면을 제외하고 이 작품이 무대를 채우는 원리는 공간의 상상력이 아닌 설명적 재현에 가깝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새롭게 등장하는 무대 세트도 그렇거니와, 지나가는 장면 하나까지도 한 번 쓰일 장치로 설명하는 이 성실함(?)은 효율성과는 거리가 멀다. 경제적인 이유로? 그건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다. 무대의 효율성이란 공간의 상상력에 다름 아닌바, 대형 창작뮤지컬에서 정말 아쉬운 것은 무대에 대한 투자의 규모는 커지는 반면 공간을 채우는 예술적 상상력은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그냥 다 만들어서 다 무대 위에 올리는 식이다. 재현의 기술은 놀랍게 발전하지만 공간을 다루는 상상의 반전은 점점 찾아보기 힘들다. 제작의 규모가 커질수록 결과가 불확실한 상상의 기회비용보다는 결과가 확실한 기술의 기회비용이 커지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새로운 상상이 없는 곳에 세계 시장을 향한 도약의 발판은 깔리기 어렵다. 이 화려한 무대가 매력적이지 않은 이유이다. 


문제는 서사다

이것이 비단 무대 세트만의 문제일까. 보기엔 그럴듯한 만듦새이지만 이 작품이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핵심적인 이유는 바로 이야기에 있다. 표면적으로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이야기를 압축하는 방식의 문제이다. 원작인 빅토르 위고의 소설은 무대라는 한정된 시공간으로 장르를 전환하기에 쉬운 텍스트가 아니다. 역사극이라고 이름 붙여도 무방할 만큼 구체적인 시대성을 가지고 있고, 그 시대의 맥락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인간군상의 묘사가 세밀하며, 사건의 ‘무엇’보다 마음의 ‘왜’에 주목한다는 면에서는 심리극이면서도, 인물들이 계급과 신분 등 구조적 모순을 대변한다는 점에서는 사회극의 면모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방대하기 짝이 없다. 이 이야기를 어떻게 두어 시간 남짓의 제한된 공간에 압축할 수 있을까. 위고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대표 성공작 <레 미제라블>이나 <노트르담 드 파리>가 선택한 압축의 언어는 바로 음악이다. 성스루의 음악적 형식을 앞세우거나 장면 중심의 구성으로 무대 위의 퍼포먼스를 키우는 등 음악과 공연의 요소를 극대화함으로써 인물들의 감정에는 깊이와 질감을 더하는 반면 방대한 서사는 에피소드 형식으로 분절시켰다가 연결하는 기능적 전략을 발휘했더랬다.   
 

<웃는 남자> 역시 음악이 담당해야 할 몫을 충분히 의식한 듯하다. 뮤지컬 넘버의 곡 수가 43개로 웬만한 성스루 뮤지컬과 물량 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음악으로써 서사를 이끌고 나가겠다는 의지가 충만함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물량만으로 밀도를 가질 수는 없는 법. 서정적인 정감이 트레이드마크인 프랭크 와일드혼의 음악은, 분명 아름다운 선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극적 상황을 각인시키기에는 드라마틱한 힘이 약하다. 극적 전개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기보다는 상황과 감정을 그저 따라간다고나 할까. 서사적인 지분이 크지 않아 대사와 감정을 부연하는 데 그치는 그의 음악에서 드라마의 두터운 질감은 찾아보기 어렵다. 고음으로 구성된 노래가 유난히 많아 한 곡이 끝날 때마다 모아지는 감정적 에너지는 꽤나 크던데, 그 에너지 자체는 극적인 것이 아니다. 감정적 에너지의 쾌감은 해소되는 데 있고 극적인 에너지의 쾌감은 축적되는 데 있는바. 와일드혼의 음악은 이 부분을 혼동하고 있다. 음악이 반복될수록 선율의 기시감과 극적 정체감이 느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의 고운 음악이 극 안에서 개성을 갖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음악의 역할을 키우려는 의욕은 음량의 볼륨을 키우는 데만 그치고 말았다.    
 

무대나 음악에서 드러난 ‘방식의 문제’는 결국 이야기를 압축하는 능력의 부재를 드러낸 셈이다. 연출가이자 작가 로버트 요한슨은 방대한 원작을 압축하는 방식으로 과감하게도 드라마의 형식을 선택했지만 드라마를 만드는 솜씨는 엉성하기만 하다. 이런 인물들로 어떻게 원작의 의미를 담아낼 수 있겠나. 일관성 없이 그저 단순해진 인물은 행동을 주도하지 못하고(신분을 되찾는 것이 그윈플렌의 행복할 권리였나? 그의 각성에 이유를 달아달라!), 내면이 사라진 인물은 전형 안에 박제될뿐더러(조시아나가 이렇게 남자를 밝히는 여자였나? 이 여자의 각성에도 이유를 달아달라!), 설명조차 되지 않은 인물은 극을 헷갈리게 만든다(데이빗과 그윈플렌의 얽힌 관계? 페드로의 야망?). 이런 인물들로는 신분과 계급의 모순이라는 사회적 의미는 물론이요 세련됨의 옷을 입은 무료한 악과 비루한 삶을 입은 고상한 선 가운데 무엇이 인간의 참된 가치이고 아름다움인지 묻는 상징적 의미를 드러내기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런 건 다 부수적인 문제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처음 봤을 때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엊그제 원작을 읽은 사람이 아니라면 무대 위에서 웅얼거리고 지나가는 수많은 말들의 의미(콤프라치코스! 와펀테이크!)와 숭숭 구멍 뚫린 줄거리의 연결(앤 여왕의 랩!)과 과장된 이미지 속에 휘발되어버린 주제 의식을 짐작할 수조차 없다. 뮤지컬만 보자면 그윈플렌이 왜 잡혀가는지, 왜 각성하는지, 왜 돌아오는지도 모르겠고, 마지막 장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이해되지 않은 장면과 인물이 차고 넘친다. 이런 무능한 서사에 이야기를 해석하는 관점을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해석이 없는 고전에 무슨 매력이 있을까. 



 

창작의 우선순위

매력을 잃은 작품에서 매력을 기대할 부분은 배우일 터. 립스틱을 조금 과하게 펴 바른 것 같은 ‘콤프라치코스’ 분장은 끔찍함을 상기시켜야 할 극의 맥락과는 정반대로 배우의 얼굴을 방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이 작품을 구할 것 같지는 않다. 애초에 이 작품의 인물들은 성실하게 연기하는 배우(특히 박강현!)를 돋보이게 할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연기자가 아니라 이미지로 휘발되어버리고 만다(특히 여배우들!).  ‘세계 초연’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갈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전작 <마타하리>가 빠졌던 함정을 <웃는 남자>도 피해 가지 못했다. 어쩌면 방향성의 문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세계 시장을 겨냥하기 위해서는 규칙의 완성도가 됐든 변칙의 매력이 됐든 이 작품이 도달하고자 하는 지점과 방향이 명확해야 한다. 그럴 때 초연은 비록 미숙하고 흠결이 많다 해도 시작점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거다. 그리고 만약 그런 의지가 있다면 누구나 공감할 만한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화려한 무대나 음악에 들어가는 물적 비용보다 텍스트를 만들어내기 위한 시간의 비용과 탐색의 비용을 기꺼이 지불해야 하는 거다. 세계 시장에 통할 만한 명작의 보편성은 이런 비용 위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그 비용 없이 세계 시장을 꿈꾼다면 그건 그저 한여름 밤의 꿈에 지나지 않을 터. 열대야 때문에 꿈은커녕 잠도 못 잘 지도 모른다. 

 

 

*외부 필진의 리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9호 2018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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