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시키와 아사리 게이타 - 아사리 게이타를 추모하며
극단 시키의 창립자인 아사리 게이타(1933~2018) 전 대표가 7월 13일 타계했다. 아사리 게이타 대표는 한국 뮤지컬인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인물이다. 2006년 샤롯데씨어터 개관작으로 시키의 <라이온 킹>이 공연되면서 대형 일본 극단의 한국 진출은 공연계를 넘어 사회문화적으로 뜨거운 이슈였다. 시키 진출에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윤호진 에이콤 대표를 회장으로 선출하고 뮤지컬 협회가 새롭게 결성되기도 했다. 시키의 <라이온 킹>은 1년간 공연하고 36억 원의 적자를 내고 물러나야 했다.
아사리 게이타 대표가 한국 공연을 시도한 것은 2006년이 처음은 아니다. 1994년 시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국립극장에서 공연했다. 당시 한일 간의 문화 교류가 영화를 중심으로 조금씩 숨통을 틔우고 있는 시점이었지만 여전히 역사적 앙금이 힘을 발휘하는 상황이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립극장에서 올리는 일본 극단의 공연이 달가울 리 없었다. 반일 단체의 집단행동을 우려해 삼엄한 경비하에 공연을 치러야 했다. 이런 사태를 예상한 한국 측에서는 국립극장이 아닌 다른 극장을 제안했으나 아사리 게이타 대표가 국립극장을 고집했다고 한다. 내셔널 시어터에서 공연한다는 상징성을 그도 잘 알았던 것이다. 2011년 시키에 소속된 한국 배우들 위주로 팀을 꾸려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가 다시 한 번 한국 방문을 시도한다. 그런데 연습 기간에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해 한국 방문은 취소되고 말았다.
아사리 게이타 대표는 한국과 중국 진출을 위해 굉장히 공을 들였다. 시키 단원 중 한국과 중국 배우가 수십 명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 특히 <라이온 킹> 한국 공연을 준비하기 전인 2004년에는 한국에서 오디션을 실시하는 등 한국 배우 선발에 애를 썼다. 시키의 아시아 진출이 아니더라도 한창 왕성한 활동을 할 때 시키는 일본 전역 13개 컴퍼니에서 연간 3,500회의 공연을 하기도 했다. 한 작품당 30명의 배우가 출연한다면 대략 매일 400명의 배우가 필요한 것이다. 외부 캐스팅 없이 단원들의 참여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무대에 설 수 있는 단원을 최소 400명까지 확보하고 있어야 했다. 아사리 게이타 대표는 한국 배우들의 가창력을 높이 평가했다. 1997년에 극단 시키에 입단한 김지현은 일찍이 <캣츠>의 그리자벨라로 타이틀롤을 맡았고, 최은실, 최현주가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을, 이주영이 <꿈에서 깨어난 꿈>의 주인공 마코를 맡는 등 주요 배역에 참여했다. 이외에도 차지연, 박은태, 조상웅, 김준현, 강태을, 오나라, 고영빈 등 이제는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스타가 된 뮤지컬 배우들이 시키의 뮤지컬 레슨을 받으며 성장했다. 한때는 70여 명의 한국 배우들이 극단 시키에서 트레이닝을 받으며 작품에 출연했다. 지금도 극단 시키에는 20명 정도의 한국 배우가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다. 2014년 아사리 게이타가 대표직에서 물러나면서 시키의 아시아 진출에 대한 관심은 식어갔다.
아사리 게이타 대표는 한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친구들의 권유에 짐이나 들어줄까 하는 생각으로 연극에 참여했다고 말했으나 그는 이미 고등학교 시절부터 운동과 문학에 관심이 많은 청년이었다. 특히 그에게 영향을 준 인물은 극작가 가토오 미치오였다. 가토오는 아사리 게이타가 다니던 경응 고교에서 영어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의 글에 매료된 아사리 게이타는 야구부를 그만두고 연극을 하게 됐다. 그의 할아버지가 가부키 배우였고 아버지 역시 연극배우였으니 그가 연극을 하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가토오 집에 그를 존경하는 대학생들이 모여들었는데 가토오의 권유로 열 명의 20대 청년들이 뜻을 모아 극단을 만들었다. 그것이 극단 시키이다. 1953년 창단 작품으로 장 이누이의 <아르델 또는 성녀>를 올린다. 초기의 시키는 가토오 마치오의 연극 정신을 이어받아 프랑스 극작가 장 지로두와 장 이누이의 작품을 올리는 데 집중했다.
극단 시키가 일본 뮤지컬의 명가로 태어나게 시작한 것은 1964년 일생극장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크게 자극을 받으면서부터다. 아사리 게이타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를 관람한 후 박력에 찬 무대에 압도됐다고 술회한다. 이후 뮤지컬 작업에 집중해 극단을 키워 나간 시키는 한때 배우 700명, 운영 직원 400명, 기술 스태프 350명 등 약 1,500명을 거느린 거대 극단으로 성장하기도 했다. 현재 일본 뮤지컬 시장의 40%를 시키가 차지하고 있다.
규모만 보면 거대 공룡 집단이지만 시키는 전형적인 예술가 대표 중심의 극단 체제를 유지한 단체였다. 극단 시키는 매해 오디션을 통해 새로운 단원과 연습생을 선발했다. 아사리 게이타 대표는 ‘좋은 작품을 위해서는 배우가 최선을 다할 여건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극단이 배우의 생활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그건 극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시키의 경영 이념이었다. 시키는 배우가 공연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최선의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실천하고 있었다. 2000년대 초반 서울예대의 고 김효경 교수는 제자들이 졸업을 하고도 설 무대가 없는 것에 안타까워하며 제자들을 일본 극단 시키에서 오디션을 보게 했다. 그 첫 제자가 시키의 첫 한국 단원 김지현이었다. 이후 2004년에는 서울예대 학생 34명을 이끌고 시키 오디션에 참가했다. 이 특별한 오디션 과정은 <현장르포 제3지대>(KBS 1)로 방송되기도 했다. 김효경 선생은 시키가 배우를 대하는 태도에 믿음을 가졌던 것이다.
2000년대 초반 공연 기자를 했다면 한 번쯤 시키의 초대를 받아 일본을 방문했을 것이다. 필자 역시 2004년 여러 기자들과 함께 시키를 방문했다. 당시 아사리 게이타 대표가 가장 자신만만하게 소개했던 곳이 요코하마 아자미노 시키예술센터이다. 그곳 입구 현판에 붓글씨로 ‘한 음이 틀리면 나가라’라는 글이 쓰여 있다. 그만큼 완벽을 추구하는 극단 시키의 정신을 느낄 수 있었다. 극단 시키는 혹독한 트레이닝으로 정평이 나 있다. 공연에 참여하는 배우도 매일 발레와 발성 등 기초 레슨을 받아야 하고 레슨 후에는 공연 시작 3시간 전에 공연장에 도착해 몸을 풀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는 한 강좌에서 ‘백 보를 가는데 아흔아홉 보를 왔다면 반 왔다고 생각하라’고 했다. 마지막 순간까지 완벽을 추구하는 자세를 강조한 것이다. 그는 특히 발음의 정확성을 강조했다. 모음법이라고 해서 대본을 읽을 때 첫 음을 빼고 모음으로만 읽는 연습을 시켰다. 그래서 시키의 작품은 어떤 작품들보다 대사가 명확하게 들린다. 하지만 음악성보다 정확한 발음으로 의미의 전달에 중요하게 여겼던 시키의 창법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의견도 있다.
아사리 게이타 대표는 행복한 뮤지컬을 선호했다. 그는 “기업은 편의를 팔고, 극단은 즐거움과 감동을 판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관객들에게 행복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작품들을 좋아했다. 시키는 메시지가 강하고 무거운 작품을 완전히 외면한 것은 아니지만 디즈니 뮤지컬처럼 감동을 주고, 보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작품을 선호했다. 아사리 게이타는 누구보다 엄격하고 철저했지만, 누구보다도 예술을 사랑하고 배우를 존중했다.
또 하나의 큰 별이 졌다. 좋은 곳에서 영면하시길.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9호 2018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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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OLUMN] 극단 시키와 아사리 게이타, 아사리 게이타를 추모하며 [No.179]
글 |박병성 사진제공 |Shiki Theatre Company 2018-08-07 7,052sponsored adve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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