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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컬처 | [REVIEW] <용의자 X의 헌신> [No.177]

글 |정수연 뮤지컬 평론가 사진제공 |달컴퍼니 2018-06-27 4,415

<용의자 X의 헌신>

잔혹 멜로가 되기 위해 필요한 미지수 X의 값을 구하시오 

 


 

조금 다른 추리의 재미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을 보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참 익숙하네,라는 것이었다. 소설을 읽었다거나 영화를 먼저 봤기 때문에 익숙하다는 말이 아니다. 이 작품의 초반에 나오는 가정 폭력 장면을 보면서 일본에서나 우리에게나 가장 무섭고 끔찍한 일상의 공포는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숨어 사는 아내와 딸을 찾아와 잔인하고도 야비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남자의 모습, 왠지 익숙하지 않나? 직접 겪지 않았다 해도 현실감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실제로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폭력의 장면이기에 더 그럴 것이다. <용의자 X의 헌신>은 살인 장면 이전에 이러한 폭력 장면을 먼저 보여준다. 살인이라는 범죄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는지를 툭 던져놓는 것이다. 범죄는 그 사회의 문제점을 반영하는 가장 극명한 방식이다. 이 이야기가 서양 추리물의 오락성과는 다르게 다가오는 까닭은 범죄의 현실성에 있다.   
 

그런데 이런 현실성 때문에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은 추리물로서 새로운 면모를 보여준다. 일단 사건을 배치하는 순서부터가 다르다. 보통 추리물에서는 이미 범죄가 저질러진 상태에서 탐정이 등장해 지금 여기의 단서를 통해 과거를 되짚어 나가며 사건을 해결하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역행의 구조이다. 목적은 하나, 범인을 찾아라!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사건이 차례대로 일어나면서 시간의 흐름 또한 진행형으로 나아간다. 관객은 살인의 현장을 목격할 뿐 아니라 누가 진범인지 이미 알고 있다. 당연히 목적이 바뀐다. 범인을 숨겨라! 이런 이야기에서 생기는 궁금증은 대략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어떻게’ 범인을 숨기는지의 방법이고, 두 번째는 ‘왜’ 범인을 숨기는지의 이유이다. 범인을 밝히려는 사람과 범인을 숨기려는 사람의 실시간 대결을 통해 이 두 가지의 궁금증이 해결돼 나가는 과정이 이 이야기가 지닌 추리의 재미인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추리물로서 지닌 진짜 재미는 추리의 과정 그다음에 있다. 이것 역시 서양의 추리물과 다른 점이기도 한데, 보통 추리물의 재미는 결론이 아니라 과정에 있다. 사람보다는 사건에 관심을 쏟는 것이다. 지푸라기 몇 올이 널려 있을 뿐인데 그것으로 초가집을 지어나가는 과정을 보시라. 눈에 보이는 몇 개의 단서를 가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진실을 파고들어 가는 추리의 과정은 논리적인 추론의 정수를 보여준다. 추리는 곧 논리의 승리인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추리 과정이 아니라 범죄 동기에 있다. 사건보다는 사람에, 논리보다는 감정에 주목하는 것이다. 충격적인 반전은 논리적인 추론으로 도달할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발견하는 통로가 된다. 이 작품에서 진짜 풀어내고 싶은 ‘사건’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인간의 마음인바, 차가운 거리 두기에서 시작한 이야기는 뜨거운 감정이입을 향해 나아간다. 추리물의 외피는 어느새 두터운 멜로로 옷을 갈아입는다.    

 

추리의 옷을 입은 멜로

뮤지컬 <용의자 X의 헌신>은 잔혹한 범죄로 고백하는 절절한 사랑 이야기이다. 추리물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멜로드라마인 셈이다. 범죄에 대한 추리 과정은 멜로를 발견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러니까 범인을 찾아가는 두뇌 싸움은 결국 멜로의 절절함이 살아나기 위한 전제인 거다. 전체적으로 범죄를 이끌어 나가는 서사의 전개는, 비슷한 소재의 작품들과 비교해 볼 때, 단연 앞선 완성도를 보여준다. 살인과 폭력과 범죄를 소재 삼은 작품들에서 이런 ‘사건’들은 그저 자의적이거나 자극적인 설정에 그쳐버린 경우가 많았다. 소재는 강렬하지만 허술한 서사 때문에 스릴러나 미스터리라는 장르의 옷을 입지 못하고 그저 미숙한 드라마에 그쳐버린 경우가 적잖았으니 말이다. 그에 비하자면 이 작품의 구조는 제법 탄탄하다. 일단 원작을 모르는 상태에서 공연을 본다 해도 줄거리를 이해하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도록 흥미진진하게 사건을 끌고 나가더라. 개성이 분명한 캐릭터들도 매력적이다. 여기엔 신성록과 최재웅을 비롯한 배우들의 공도 크다. 그들은 자기가 맡은 역할을 허세 없이 성실하게 재현해 낸다.    
 

물론 추리물의 핵심인 범인 찾기의 과정에 다소 미진한 부분이 있긴 하다. 범인의 실체를 좁혀가거나 범인을 확신하는 단계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축적된 단서가 아니라 탐정의 직관이니 말이다. 그 직관을 설명하는 언어가 물리학이었다면(범인을 잡으려는 탐정은 천재 물리학자이고 진범을 숨기려는 범인은 천재 수학자이다!), 직관은 비약이 아니라 과학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추리와 범죄에 물리학과 수학은 하나도 기여하는 바가 없다. 수학의 천재라는 설정은 그가 히키코모리에 가까운 은둔형 인간이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도구에 불과한 식이다. 그렇게 소모해 버리기에 물리학과 수학의 상징성이 좀 아깝지 않나? 물리학의 관심은 움직임의 원리에 있고 수학의 관심은 존재의 원리에 있음을 생각하자면, 물리학자의 추리에는 물리학의 언어가 사용되어야 하고 수학자의 범죄에는 수학의 논리가 깔려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는 지극히 평범하고, 평범한 말에서 과학(이라는 설정)은 발견의 도구가 되지 못한다.  
 

‘어떻게’ 범죄를 밝히고 숨길 것인가의 지적 승부에서 드러난 아쉬움은, ‘왜’ 범죄를 숨기려 하는가의 진실의 문제로까지 이어진다. 이 이야기에서 진짜 추리되어야 할 것은 살인이라는 사건이 아니라 수학자 이시가미의 마음이다. 관객은 살인을 저지른 진짜 범인이 이웃집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도대체 왜 이시가미가 그 살인의 은폐를 돕는지 이유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시가미의 반전이 좀 더 극적이기 위해서는 그의 ‘감정’에 대한 이해와 오해가 반복되어야 한다. 그의 선택 동기는 오롯이 이웃집 여자 야스코가 되어야 할 터.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야스코의 캐릭터는 전형적인 만큼 피상적이다. 왜 이 여자가 이시가미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람인지는 그냥 추측될 뿐이지 극에서는 설명되는 바가 없는 거다. 마지막에 이시가미의 ‘헌신’의 이유가 밝혀지는 반전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지사다. 오히려 야스코의 딸과 이시가미의 관계가 더 구체적이더라. 물리학자와 수학자의 캐릭터만큼 이웃 여자 야스코의 캐릭터도 생생해져야 마지막 반전에서 감정적 설득력이 생겨날 수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그저 이시가미의 마음을 설명하기 위한 대상일 뿐 캐릭터로서의 능동성은 찾아보기 어렵다. 여성 캐릭터는 하나도 진화하지 않았다.



 

그건 사랑이었을까? 

그래도 원작의 분위기를 공연의 틀거지로 잘 옮겨 담아 이야기를 따라가는 재미를 쏠쏠하게 만들어낸 것만으로도 이 작품의 미덕은 적지 않다. 여기엔 대사를 부연하기보다 대사 자체가 되고자 했던 음악의 적극성도 기여한 바가 크다. 다소 관념적인 의미를 담은 노래는 반복을 통해 강조하고, 속도를 내야 할 때는 과감하게 대사를 자처하며 말이 되기를 서슴지 않았더랬다. 이런저런 음악의 시도는, 다소 빈번하다 싶을 때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극의 분위기를 잘 잡아준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살인이라는 표면에 감춰진 사랑의 절절함이 드러날 때 그 감정을 오롯이 담아내는 음악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점이다. 범죄의 사실에서 사랑의 진실이 드러날 때 음악이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현해 준다면 이 이야기의 질감은 좀 더 두터워질 게 분명하다. 기하학의 도형을 연상케 하는 조명 역시 보기에는 예쁘지만 의미로 볼 때는 그리 기능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조금 아쉽다. 시각적 의욕에 비하자면 선으로 공간을 나누는 식의 상상력은 지나치게 단순해 보인다.
 

그런데 말이다. 조금은 딴 얘기지만, 정말 이런 식의 ‘헌신’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죽어도 아무도 모르는 사람’을 헌신적인 사랑의 제물로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버리는 이시가미의 순정에는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본인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일본 특유의 주관주의가 스며있다. 악한 결과라 해도 ‘악의’가 아니라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는 미학적 세계관. 순수한 마음과 잔혹한 폭력은 어느새 하나로 연결된다. 이것을 ‘그건 사랑이었네’라고 말하기에는 영 찝찝하다. 가벼운 추리물에 괜한 트집이라구? 잘 만든 작품은 언제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법이다. 

 

*외부 필진의 리뷰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7호 2018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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