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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지금 가장 빛나는 라이징 스타 - 김히어라 [No.176]

글 |안세영 사진 |심주호 2018-06-04 8,861
나라는 질문



 
가까이서 본 김히어라의 눈동자는 초록빛이 도는 갈색이었다. 발레리나처럼 가는 몸에 창백한 얼굴, 하지만 찌르듯 예리한 눈매가 결코 호락호락해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입을 열면 흘러나오는 허스키한 목소리. 이름부터 외모, 목소리까지 하나같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에게 관객은 홀린 듯 시선을 빼앗기기 마련이다. 
 
2009년 스물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데뷔해 긴 시간 앙상블로 지내온 김히어라. 그의 비범한 아우라가 발현되기 시작한 건 2016년 <팬레터>에서 치명적인 매력을 지닌 관념 캐릭터 히카루로 분하면서부터다. 재능 있는 여성 작가이자 한 소설가를 죽음으로 이끈 뮤즈 히카루는 김히어라와 만나 신비롭고 강단 있는 모습으로 살아났다. 뒤이어 출연한 <찌질의 역사>에서는 지질한 남자친구를 향한 거친 욕설을 차지게 소화해 객석을 술렁이게 만들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1인 3역을 연기한 그는 지난해 제6회 예그린뮤지컬어워드 여자신인상을 받았다. 
 
이제는 당당하고 도발적인 이미지로 주목받고 있지만, 김히어라는 자신이 어떤 색깔을 지닌 배우인지 비교적 최근에야 깨달았다고 고백한다. “한동안 뮤지컬을 쉬면서 영화 단역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감독님이 자꾸 카메라를 쳐다보지 말라는 거예요. 제 눈빛이 너무 세서 자꾸 그쪽으로 시선을 뺏긴다고요. 그때 알았어요. 그동안 <지킬 앤 하이드>의 엠마 같은 역할로만 오디션을 봐왔는데 내가 정말 해야 하는 건 루시 같은 역할이었구나.”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탐구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 3월 서른 살 생일을 맞은 김히어라는 연희예술극장에서 직접 그린 그림으로 개인전을 열고 토크쇼를 진행했다. 어릴 적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는 그는 2012년 <라카지>를 보고 포스터를 따라 그린 걸 시작으로 다시금 그림에 빠져들었다. 대개 우울하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칠 때 탄생했다는 여러 추상화 앞에서 김히어라는 자신을 향한 타인의 왜곡된 시선, 타인으로 인해 알게 된 자신의 새로운 모습, 그리고 자신이 되고픈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시장에는 김히어라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걸렸다. 하지만 사진 속 인물이 김히어라라는 걸 알아보기는 쉽지 않다. 투박한 외투를 입고 머리를 짧게 잘라 뒤로 넘긴 탓이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흉내낸 거예요. 성별 고정관념을 벗어나 편견 없는 나라는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또 다른 네 장의 사진에는 희로애락을 담은 그의 맨얼굴이 찍혀 있다. “누군가가 기대하는 화려한 배우가 아니라 ‘나는 그냥 나’라는 걸 표현했어요.” 타인이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만, 그 틀에만 갇혀 있을 생각은 없다는 김히어라의 굳은 의지가 사진 속에서 내비쳤다. 
 
지난 4월 출연한 쇼케이스 공연 <아티스>의 테레즈는 김히어라의 관심사를 집약해 놓은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린다는 점에서, 또 대상화된 어여쁜 뮤즈에서 표현의 주체인 예술가로 성장하는 여성이라는 점에서. 그래서일까, 개인전에서 제일 먼저 팔린 작품도 그가 연습 중에 테레즈의 심정을 담아 그렸다는 그림이다. “누군가의 만족스러운 히어라가 되기 위해 살았던 시기가 있어요. 어릴 때는 아버지께 인정받기 위해 내가 하고 싶은 일보다 1등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했죠. 근데 나이가 들어 원하는 직업을 찾고, 취미 생활을 즐기다 보니 어느 순간 제가 주체적으로 변해 있더라고요. 요새는 이렇게 생각해요. 남들이 찾아주지 않아도 내가 하고 싶은 걸 하자. 나로서 사는 법을 배워야겠다.”


 
실제로 김히어라는 자신이 하고 싶은 공연을 하기 위해 지난해 ‘RT프로젝트’라는 창작 집단을 꾸렸다. “RT는 ‘리트윗’과 ‘로열티’를 의미해요. 예술가들이 열정 페이가 아닌 정당한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붙인 이름이죠.” 배우 김히어라와 작가, 작곡가, 연출가, 총 네 명으로 이뤄진 ‘RT프로젝트’는 기획사나 투자사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직접 의미 있는 공연을 만들기 위한 집단이다. 지난 개인전과 토크쇼 역시 ‘RT프로젝트’의 작업 일환으로, 수익금 절반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공연을 만드는 데 쓸 예정이다. 개인전을 올린 연희예술극장에서 추후 프랑스 배우 오드레 베르농이 쓴 일인극 <그래서 나는 억만장자와 결혼했다>를 선보일 준비도 하고 있다. “자본주의를 풍자한 작품이에요. 프랑스에서는 대본을 쓴 배우가 직접 공연했는데, 한국에서는 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공연해 보려고요. 이미 연출가가 배우를 만나 공연 허가를 받았고, 저도 조만간 그 배우를 만날 예정이에요.”
 
김히어라는 미투 운동이 공연계를 뜨겁게 달군 당시 용기 있는 지지 선언에 나서기도 했다. 미투 운동을 통해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면서 무대 위 여성의 역할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아졌다. “주체적인 여성을 그린 작품 대부분이 그가 사회적 약자로 살면서 남성에게 받은 상처를 딛고 성장하는 걸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잖아요. 그런 거 말고 아예 동등한 인간으로 다뤄지는 이야기가 있으면 좋겠어요. 또 그동안 제가 출연했던 대부분의 공연처럼 남자 여럿에 여자 하나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라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을 하고 싶어요.” 김히어라가 <아티스>에 이어 출연한 쇼케이스 <마리 퀴리>는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창작뮤지컬. 어쩌면 그는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더 고된 길을 택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섣부른 걱정은 접어두자. 김히어라가 연기했던 <아티스>의 테레즈는 마지막 순간 이렇게 말했다. ‘자신 있어. 내가 어떤 모습이든 나는 날 사랑해.’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6호 2018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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