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렌트>의 록 기타리스트 로저가 세상에 남길 ‘영광의 노래’를 만들기 위해 자신을 끝없이 괴롭혔듯이, 신성록은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작품을 만나길 열망했다. 하지만, 우리 모두 로저가 그토록 찾던 영광의 노래가 미미에 대한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성록 역시 해답을 찾은 듯하다. 물론 자신을 효과적으로 내비치는 비법은 아니다. 우리가 만나지 못했던 지난 시간 동안 그에게는 무슨 일이 생긴 걸까?
<더뮤지컬>과의 첫 인터뷰 내용 기억해요? <헤드윅>을 하고 싶다고 했더라고요.
그때는 질풍노도의 시기이기도 하며, 꿈이 참 많은 아이였죠. 하하. 지금도 꿈은 많지만, 그때보다는 ... 원래 제가 철이 없고, 평생 철이 안 들 예정인데 그때보다 좀 철이 들어서 알죠. ‘아, <헤드윅>은 나랑 안 어울리는구나.’ (웃음)
얼마 전에 한 인터뷰에서는 <오페라의 유령>을 골랐던데요? 어떤 역이 하고 싶은 거예요? 라울?
아니요, 팬텀. 그런데 또 바뀌었어요. <오페라의 유령>은 이번에 잘 마무리된 걸 봤으니까 그걸로 만족을 했고, <렌트>의 로저가 하고 싶어요.
갑자기 로저는 왜요?
옛날에 하고 싶었던 건데, 록이 나랑 맞을까 싶어 말았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틱틱붐>을 하면서 <틱틱붐>의 그 시대, 80~90년대 뉴욕 예술가들의 삶을 좀 알아보고자 영화 <렌트>를 봤는데 다시 피가 끓더라고요. 진짜 음악 좋구나!
<틱틱붐>에 출연하기로 결정한 데는 이석준 씨의 영향이 컸다면서요. 해보니 어때요?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작품만 할 수 있다면 <틱틱붐>을 하겠다던 이석준 씨의 말에 공감해요?
저하고 석준이 형은 취향이 다르다는 걸 느꼈어요. 하하. 형은 되게 드라마적인 배우에요. 소소하고 디테일한 감정 연기에 재미를 느끼고, 그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저는 소소한 것 좋아하지만 큰 감정도 좋아해요. 그리고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하고 비슷한 느낌이 연장되다 보니까 중간에 힘들기도 했고, 솔직히 좀 답답하기도 했어요. 아직은 모르겠어요. 공연이 끝나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주변에서 아무리 추천한다고 해도 결국은 내 생각에 좋은 작품을 선택할 텐데, 신성록 씨한테 좋다는 기준은 뭔가요?
피가 끓느냐 안 끓느냐. <틱틱붐>을 한 건, 20대 마지막에 이 감정을 못 느끼면 다시는 못 느낄 감정일 것 같았어요.
기자 간담회 때 노래 부르다 실수했던 거요. 만약에 세 번째 시도에서도 안 됐으면 어쩔 작정이었어요?
(웃음). 될 때까지 다시 하는 거죠. 어떡할 거예요. 아니면 무대 뒤로 들어가서 (강)필석이 형한테 “형, 가사 뭐야?” 물어보고 왔겠죠.
긴장했던 거예요?
긴장했다기보다는 유난히 안 외워지는 노래가 있단 말이에요. 그런 노래 중의 하나였던 거죠. 공연할 때는 이어오다 가는 흐름이 있는데, 뚝 끊어서 하려니 갑자기 가사가 생각이 안 나서. 저도 그런 적은 처음이에요. 해프닝이죠. 제가 당황하는 것 같진 않았잖아요? 당황한 것 같았어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기보다, 그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면 욕 한마디했을 것 같은 표정이었어요.(웃음) 그러다 성공했을 때 얼굴에 아이 같은 미소가 번지더라고요. 인상적이었어요.
으하하하. 재밌었어요. 그런 날도 있는 거죠.
극 중에서 존은 ‘록 뮤지컬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고민을 하잖아요. 배우 신성록의 고민은 뭐예요?
지금요? 지금은 닥친 게 <영웅>이니까 <영웅>을 잘할 수… 하하하. 전 다른 인물이 되고 그런 거 없고 그 인물의 상황만 가지고 연기하는데, 저한테 안중근 선생님처럼 피 끓는 열의가 내재돼있다면 이해하고 연기하는 게 조금이나마 쉬울 거고, 그렇지 않다면 굉장히 힘들겠죠. 그런 부분에 대해서 고민이에요. 어찌 됐건 좋은 작품이고, 잘 해내야 되는 건 사실이니까. 잘하고 싶고요.
<영웅>은 어떻게 하게 됐어요?
제작사에서 전화가 와서 오디션 보고 한 건데…, 사실 처음엔 관심도 없었어요. 작년 공연도 못 봤고, 저와 안중근 선생님을 겹쳐서 생각해 본 적도 없거든요. 주변에서 오디션 본다고 할 때도 이건 내 작품이 아니겠거니 하고, 나중에 재공연할 때 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한테 어울리고 잘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전화가 왔을 때, 물론 인사치레로 한 말일 수도 있지만, 의외였죠. 나랑 어울린다고? 음악을 한번 들어 보라고 해서 들어보니까 굉장히 좋더라고요. 어려운 도전이 되겠지만 나랑 완전히 다른 색깔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남자의 마음을 울리는 음악이라면서요. 그런데 <영웅>에 출연 한다는 소식은 솔직히 의외였어요.
주변에서 다 반대했어요. 김덕남 연출님이라고 제 은사님이 계신데, 선생님께 전화가 왔어요. “야, 너는 뭐 시켜주면 다 하냐?” “선생님, 군대 가기 전에 하고 싶은 거 하고 갈게요. 아니, 뭐 안중근은 꼭 그런 이미지여야 해요? 아니잖아요.” 제가 그랬어요. 안중근 선생님이라고 키 크면 안 되나요. 처음엔 저도 하얼빈 역에 숨어 있다가 총을 쏴야 하는데 사람들 사이로 머리 하나가 툭 튀어 나와 있으면 다 들키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어요.(웃음) 안중근 선생님의 이미지와 적합하지 않는 제가 했을 때 어떨까 하는 흥미가 있었고 저도 한국 사람인지라 마음이 움직이더라고요. 음악의 힘도 있고. 그리고 배우로서 이런 인물을 연기할 수 있다는 건, 더구나 실존 인물, 대한민국에서는 진짜 영웅인 인물을 연기한다는 건 기회잖아요. 질타를 받든, 칭찬을 받든, 기회가 왔고 정직하게 오디션을 봤으니까 한번 해보자는 생각을 한 거죠.
처음으로 제작사의 콜을 받았던 건 언제에요?
1차부터 보는 정식 오디션을 본 건 <댄싱 섀도우>가 마지막이에요.
처음 그런 연락을 받았을 때 기뻤어요? 뿌듯했다거나.
아뇨, 희열보다는… 그때만 해도 잘하고 싶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너무 자신을 못살게 굴어가지고 버거웠죠. 즐기자 주의가 된 지 얼마 안 됐어요.
예민해 보이는 편은 아닌데 자신을 몰아붙이는 타입인가 봐요?
강박관념 때문에 배우를 관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어요. 난 최선을 다했는데 늘 제자리에 있는 것 같고. 보여지는 직업인데 인정도 못 받고. 그러다 보면 내 자신의 재능에 대해 되묻게 되는 거죠. ‘난 재능이 없구나.’
무엇이 그렇게 자신을 끝없이 괴롭혔어요?
제가 실력에 비해 빨리 인정을 받았고, 과분한 역할들이 주어지니까 쉽게 얘기해서 정신 못 차렸죠. 우쭐해서 겸손하지 못했던 적도 있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면서 욕심만 부리기도 하고. 그러다 내가 실력 없는 허울뿐라는 걸 느끼게 될 때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죠. 우리는 관객들이 보고 싶을 때 볼 수 있는 얼굴이 아니잖아요. 돈을 내고 그 극장에 시간 맞춰 와서 보는 건데, 발품 팔아 와서 보는 건데, 내가 이런 실력으로 무대에 선다는 게 부끄럽더라고요. 그래서 배우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거예요. 신인 때는 반짝하고 등장한 가능성 있는 배우였지만 거기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배우로서 내 위치가 너무 답답한 거죠. 등수, 빨리 올라가고 싶은데 왜 못 올라갈까. 결국 답은,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게 굉장히 어리석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다시 해보자는 의지가 생겼고요?
네. 바닥을 치고 올라오니까 ‘내가 꼭 1등이 돼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회에서 매겨주는 등수가 높지 않을 때, 나를 왜 최악이라고 생각하는지. 그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역시 가능성은 없지 않구나 라는 생각을 한 거예요. 내가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 사람들이 시켜줬는데, 그 사람들을 배신 했을 뿐이지,(웃음) 이게 끝나고 답이 나온 게 아니니까 다시 한번 노력을 해보자는 생각을 한 거죠. 그게 <몬테크리스토> 때에요. 전환점이 된 거죠.
연기를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를 떠나서, <몬테크리스토> 때 작품에 임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요?
<몬테크리스토>할 때는요, 이 작품 이후에는 다시는 기회가 안 온다는 생각으로 했어요.
왜요?
이 정도 큰 규모의 작품과 이 정도의 입체적인 인물을 연기할 수 있는 기회가, 내가 이걸 잘해내지 못하면 이런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진짜 열심히 했어요, 진짜. <몬테크리스토> 외에는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내 작품을 만나고 싶은 열망이 대단했잖아요. 아직 못 만났다고 생각해요?
네. 그런데 이제는 ‘꼭 내 작품이 있어야 되나?’ 하는 생각도 들어요. <몬테크리스토> 하기 전에는 욕심만 많았죠. 이걸 내 작품으로 만들고 싶다. 그러다가 슬럼프에 빠져서 이상한 길로 가기도 하고. 이젠 그런 욕심보다는, 좀 즐기고 싶어요. 어차피 저희는 ‘문화’잖아요. 그 문화를 잘 만들어내고, 즐기는 진짜 예술가가 됐으면 해요.
‘즐기자’는 의미는 뭐예요?
예전에는 단점만 생각했어요. 나는 왜 그걸 못하지. 사람은 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저도 배우로서 장점이 분명이 있는데 단점만 생각했어요. 그런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장점을 잘 살려보자는 주의로 바뀌었다는 거죠.
배우로서 신성록의 장점은 뭐라고 생각하는 데요?
감성이 나쁜 것 같진 않아요. 무대 위에서 누군가 저한테 말했을 때, 그 말을 느끼는 감성 같은 것들. 좋다기보다는 저한테 굳이 장점을 찾으라면요.
시간이 많이 흐른 뒤 2010년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 것 같나요?
그 전이 내가 내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는 내 자신을 좀 더 사랑하기로 생각한 한 해.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6호 2010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