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키간-돌란 <백조의 호수>
아무리 발레에 문외한이라 하더라도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를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마법에 걸려 밤에는 인간, 낮에는 백조로 변하는 공주 오데트와 그 비밀을 알게 된 왕자 지크프리트의 신비로운 사랑 이야기. 여기에 차이콥스키의 낭만적인 음악, 백조를 형상화한 황홀한 안무가 어우러져 지금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발레 작품이다. 그런데 이 무대에서 차이콥스키의 음악과 동화 속 왕자가 사라진다면? 마이클 키간-돌란의 무용극 <백조의 호수(Loch na hEala)>는 고전 발레의 배경을 현대로 옮겨 환상을 걷어낸 자리에 음울한 현실의 풍경을 채워 넣는다.
마이클 키간-돌란은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연출가 겸 안무가로, 자신이 이끄는 공연 단체 ‘차크 도사(Teac Damsa)’의 예술감독이자, 런던 새들러스 웰스 극장의 협력 아티스트이다. 그는 무용과 연극, 음악을 결합한 색다른 작품 스타일로 유명한데, 특히 고전의 현대적 재창조에 재능을 보였다. 대표작으로는 <지젤>(2003), <더 불(The Bull)>(2005), <봄의 제전>(2009) 등이 있다. <백조의 호수>는 2016년 10월 더블린 연극 페스티벌에서 초연하고, 11월 런던 새들러스 웰스 극장에서 공연한 작품이다. 아일랜드 언론 ‘아이리시 타임스’와 영국 언론 ‘더 가디언’에서 별 다섯 개 만점을 부여받으며 혁신적인 작품으로 인정받았다.
새롭게 거듭난 <백조의 호수>에서 지크프리트 왕자를 대신한 주인공은, 시골 마을에서 직업도 없이 홀어머니와 살아가는 서른여섯 살의 남자 지미. 정부의 주택 공영화 정책으로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집을 잃게 되자, 실의에 빠진 지미는 호수에서 총으로 자살하려 한다. 그때 지미 앞에 네 마리 백조가 나타난다. 지미는 백조의 정체가 피놀라와 자매들이며, 마을의 성직자가 피놀라를 성추행한 후 자신의 죄가 발각되지 않도록 그들을 백조로 만들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미는 호수에서 피놀라와 춤추며 처음으로 행복을 맛본다. 한편, 주의원 미키는 자신의 주택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지미의 집을 찾았다가 총을 든 지미를 보고 도망친다. 미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자, 지미는 총을 든 채 집을 빠져나와 호수로 향한다.
무용극 <백조의 호수>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세 가지 이야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전체적인 구조는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와 같지만, 저주를 받아 백조가 된 네 자매의 이야기는 아일랜드 전설 ‘리어의 아이들’에서 따왔다. 주인공 지미의 캐릭터는 2000년 아일랜드를 떠들썩하게 했던 ‘존 카티 사건’을 토대로 한다. 정부의 주택 철거 계획에 반발한 존 카티가 무장한 채 경찰과 대치하다 사살당한 사건이다. 이를 통해 작품은 아일랜드의 민족 정서와 동시대의 사회 이슈를 한 무대에 반영한다. 동시에 현대 사회에 만연한 정신질환과 사회적 고립, 부패한 정치인과 성직자를 적나라하게 풍자한다.
연극, 무용, 음악이 결합된 <백조의 호수>에는 2명의 배우, 8명의 무용수, 3명의 뮤지션이 출연한다. 극을 이끌어 가는 건 아일랜드의 영화배우 마이클 머피로, 1인 5역을 맡아 성직자, 정치인, 경찰 등을 연기한다. 그는 지미의 어머니 역을 맡은 배우 버나뎃 엘리자벳과 함께 공연 대사 대부분을 소화한다. 텅 빈 무대엔 사다리, 종이 상자, 시멘트 벽돌, 검은 비닐 등만이 소품으로 등장하며 삭막한 현실을 부각시킨다. 희망 없는 현실 속에서 펼쳐지는 아름다운 춤과 아이리시 음악은 고전 발레 <백조의 호수>와는 다른 결의 감동을 안겨준다.
<백조의 호수>의 세 가지 모티프
발레 <백조의 호수>
1877년 모스크바 볼쇼이극장에서 초연한 고전 발레. 마법사의 저주로 태양이 뜨면 백조로 변하는 오데트 공주와 지크프리트 왕자의 사랑 이야기다. 왕자는 왕궁 무도회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함으로써 오데트의 저주를 풀어주리라 약속한다. 하지만 마법사의 계략에 빠진 왕자는 오데트로 변신한 마법사의 딸 오딜과 결혼을 맹세하고 만다. 충격을 받은 오데트는 호수에 몸을 던지고, 뒤늦게 실수를 깨달은 왕자도 함께 호수로 뛰어든다. 그 순간 마법이 풀리고 두 사람은 천국으로 향한다.
리어의 아이들
아일랜드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 먼 옛날, 바다의 신 리어는 아내 이브와 결혼하여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낳는다. 이브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리어는 새 아내 이파를 맞이한다. 남편을 독차지하고 싶었던 이파는 마법으로 아이들을 백조로 만들어 9백 년 동안 세 개의 호수를 떠돌며 살게 한다. 그러나 이파의 마법도 아이들의 목소리를 앗아가진 못한다. 백조의 노랫소리를 들은 리어는 아이들이 마법에 걸린 사실을 알아차리고, 이파를 안개 속으로 추방한다. 9백 년 뒤, 마법이 풀려 노인이 된 아이들은 비로소 평온한 죽음을 맞는다.
존 카티 사건
아일랜드 롱퍼드 지역의 청년 존 카티가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 우울증 병력이 있는 27세 남성 존 카티는 어머니와 함께 오래된 철거 예정 주택에 살고 있었다. 2000년 4월 19일, 존은 어머니에게 “아무도 이 집을 빼앗을 수 없다”라고 말하며 장전된 총을 허리에 찼다. 겁에 질린 어머니는 친척 집으로 떠났고, 친척의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과 존의 대치가 시작됐다. 다음 날 저녁, 존이 총을 든 채 집밖으로 나오자 경찰은 사격을 가했고, 존은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 사건에서 경찰의 대응이 적절했는지 여부를 놓고 큰 논란이 일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4호 2018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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