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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무대에서 사라진 주체적 여성 찾기 [No.173]

글 |배경희 2018-03-05 4,665
뮤지컬과 여성
 
지난해 공연시장을 결산한 조사에 따르면, 공연 티켓 예매자 중 71퍼센트가 여성이라고 한다(2017년 인터파크 공연시장 결산). 이처럼 객석에서는 여성 관객들이 티켓 파워를 보여주고 있는 지금, 실제 무대 위에서의 여성들은 어떤 목소리를 내고 있을까? ‘뮤지컬과 여성’에 주목한 이번 기획에서는 뮤지컬 속 여성 캐릭터들을 점검해보고, 뮤지컬에 미디어 속 성 평등 측정 도구로 쓰이는 벡델 테스트를 적용시켜 보는 기사를 준비했다. 또한 해외 뮤지컬 속에서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은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다루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더불어 뮤지컬계 여성의 대표주자로서 자신의 입지를 굳힌 정영주 배우, 구윤영 조명디자이너, 정재진 영상디자이너를 만나, 뮤지컬계 여성으로서 느끼고 있는 실질적인 고민과 커리어에 대한 열정을 들어보았다. 
 
 
 
 
남성 중심 서사의 여성이라는 객체 
뮤지컬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를 보고 불편했던 경험이 있습니까? 지난 2017년 3월, 공연 포털사이트 스테이지 톡에서 진행한 ‘뮤지컬 속 여성 캐릭터’란 설문 조사의 첫 질문이었다. 당시 900명에 가까운 여성 관객들이 설문에 참여했는데, 그렇다고 대답한 응답자는 무려 88퍼센트. 그렇다면 어느 순간에, 또 어떤 이유로 여성 캐릭터에 불편함을 느꼈을까. 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남성 캐릭터의 성장 또는 각성의 도구로 이용될 때, 신체적·성적 학대를 당할 때, 성적 매력만 부각될 때, 단순한 캐릭터를 착하고 예쁘게 포장할 때. 
 
혹시라도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싶다면, 국내 대표 스테디셀러로 꼽히는 <지킬 앤 하이드>를 떠올려 보자. 지킬 박사가 자기 신념을 위해 위험한 실험을 감행하는 동안, 엠마는 약혼자가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 영문도 모른 채 지고지순한 사랑으로 그의 곁을 지킨다. 엠마의 감정에 대한 설명은 생략되며, 그녀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근거는 하나다. 단지, 사랑하니까. 단순한 캐릭터를 착하고 예쁘게 포장한 대표적인 인물 엠마는 실재하는 여성이라기보다 남성이 여성에 바라는 남성주의적 환상에 가깝다. 또 다른 여성 캐릭터 루시는 곱게 자란 외동딸 엠마와 대척점에 있는 거리 여자로, ‘성적 매력이 부각’되며 ‘신체적·성적 학대를 당하다’가 죽음의 최후를 맞는다. 정확히는 남자 주인공에 의해 처참히 살해당한다. 
 
<블랙메리포핀스>의 안나, <맨 오브 라만차>의 알돈자, <더 데빌>의 그레첸, <지킬 앤 하이드>의 루시, <마타하리>의 마타 하리. 같은 설문 조사에서 여성 캐릭터가 불편한 뮤지컬로 꼽힌 작품들 모두 얼핏 보면 여성을 이야기의 전면에 내세운 듯해 배우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해 낸다면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다. 때문에, 성폭력에 노출된 여성 캐릭터가 객석의 많은 여성 관객들에게 꺼림칙한 기분을 안겨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문제 인식 없이 대중적으로 폭넓게 소비돼 왔다. 하지만 잠시 한번 생각해 보자. 앞서 언급한 작품들 속 여성들이 하나의 독립체로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가는지. 남성과 동등한 위치에서 동반자적인 관계로 존재하는지. 아니, 더 쉽고 명확하게 질문해 보자. 무대 위의 여자는 무대 위의 남자와 평등한가? 
 
바로 지난해 초연된 일련의 대형 뮤지컬들-<나폴레옹>, <벤허>, <시라노>- 역시 여성을 여성주의적 시선에서 그렸는가 하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나폴레옹만을 바라보다 난데없이 바람을 피우는 나폴레옹의 첫 번째 부인 조세핀, 벤허 가족에게 헌신하는 순종적인 하녀 에스더, 두 남자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의 사랑을 동시에 받는 그저 예쁜 여자 록산. 남자 주인공의 행동에 반응하기 위해 등장하며, 남자들 관계 속에 부속품처럼 존재하는 이 같은 캐릭터를 진짜 ‘여성’ 캐릭터라 할 수 있을까. 무대에서 너무나 쉽게 발견되는 남성 캐릭터와 여성 캐릭터 사이의 큰 간극과 불균형한 캐릭터의 성비. 지금껏 무대 위의 여성은 너무 많은 불평등에 둘러싸여 왔다. 그리고 페미니즘이 중요한 사회적 화두로 떠오른 요즘, 우리는 비로소 남녀 캐릭터의 간극이 곧 성차별과 관련 있다는 불편한 진실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주체적인 여성 캐릭터에 대한 갈증    
지난해 1월, 2주 남짓 짧게 공연된 초연 창작뮤지컬 <레드북>은 2017년 뮤지컬계에서 가장 큰 화제를 모은 작품 중 하나이다. 지난 1월 22일에 열린 제2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소규모 창작뮤지컬 가운데 가장 많은 부문(작품상과 극본/작사상, 작곡상을 비롯해 모두 9개 부문) 후보에 오른 데 대해 이견이 없을 정도로 <레드북>의 작품성은 모두가 인정하는 분위기. 하지만 <레드북>에 쏟아진 뜨거운 관심의 중심에는 이 작품이 그리는 여성 캐릭터가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나를 말하고, 나를 지킬 줄 아는’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젊은 여성 안나는 남성 중심의 서사에서 관습처럼 주어지는 희생적인 여성상을 통쾌하게 전복시키는 캐릭터이니 말이다.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에 자신의 연애담을 야한 소설로 쓰며 사회적 억압과 편견에 맞서는 여성 캐릭터라니. 여성에게 가장 보수적인 시대에 당당히 제 목소리를 내는 여성 안나를 통해 작가는 말한다. “우리 사회는 자신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좀 더 자유롭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2015년 상반기 SNS를 뜨겁게 달군 해시태그, ‘#나는페미니스트입니다’. 일련의 여성 혐오 사건들로 페미니즘이 새삼 수면 위로 떠오른 이래,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요즘처럼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된 적이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다면 여성이 주 소비자층인 국내 뮤지컬은 사회적 관심사인 페미니즘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고 있을까. 솔직히 말해 아직 무대에 페미니즘의 붐이 일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여성 캐릭터를 전면에 내세우려고 노력하는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꽤 긍정적이다. 앞서 언급한 <레드북>이나 지난 2016년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키다리 아저씨>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그러한 예. 물론, 어쩌면 세 작품 다 딱히 시의성을 고려했다기보다 공교롭게도 시의적절한 타이밍에 무대에 오른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 작품을 향한 여성 관객들의 열띤 반응은 분명히 시사하는 바가 있다.
 
끝으로 <레드북> 안나의 대사를 옮겨보자. “봐요, 여자도 몸이 있어요. 남자처럼 똑같이 움직이고 똑같이 느끼는 몸이 있다고요. 근데 왜 자꾸 여자만 안 된다는 거예요?” 여성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남성에 대항하는 여성 캐릭터도, 여성 캐릭터가 남성을 지배하는 이야기도 아니다. 그러니까 여성인 우리가 원하는 것, 여성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여성의 지위를 손상시키지 않는 작품이다. 그저 남성과 동등한 조건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가지고 당당히 자신의 내면에 대해 말하는 여성을 무대에서 볼 수 있길 바란다. 왜? 모든 면에서 여성은 남성과 평등하니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3호 2018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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