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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SPECIAL] 뮤지컬을 만드는 여성들-정영주 배우 편 [No.173]

글 |나윤정 2018-03-05 5,575
뮤지컬을 좋아해 무대에 자신의 열정을 쏟아낸 여성들이 있다. 뮤지컬을 만드는 여성들은 ‘뮤지컬과 여성’이란 화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리고 그들이 ‘여성’이라는 이유 때문에 느끼는 편견과 고민은 무엇일까? 자신의 분야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입지를 굳힌 정영주 배우, 구윤영 조명디자이너, 정재진 영상디자이너가 뮤지컬계 여성 대표로 나서 그들이 직접 경험하고 느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94년 뮤지컬 <나는 스타가 될 거야>로 데뷔 한 후 <시카고>, <오페라의 유령>, <레베카> 등 다양한 무대에서 신스틸러로 활약했고, 제11회 한국뮤지컬대상 여우조연상 등을 받으며 인상적인 연기를 펼쳐왔다. 최근에는 드라마 <시그널>, <부암동 복수자들>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며 무대 위 존재감을 브라운관으로 이어가고 있다.
 
 
 
 
뮤지컬과 여성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여배우다. 여배우 입장에서 느끼는 ‘뮤지컬과 여성’의 관계는 어떠한가?
우리는 늘 스스로를 배우라고 이야기하지만, 사람들에게는 여배우라고 불린다. 하지만 여배우란 표현 자체를 성평등의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영어에도 액터와 액트리스가 구분되어 있듯, 기성세대들이 만들어놓은 자연스러운 화법일 테니까. 더 큰 문제는 실제로 무대에 오를 때 성평등이 깨진다는 거다. 남성 편향적인 작품과 제작 환경. 비단 뮤지컬뿐 아니라 영화, 드라마에 출연하는 대한민국 모든 여배우들이 느끼는 부분일 거다. 
 
남성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작품들이 주를 이루다 보니, 여성 캐릭터의 역할이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공연을 보기 위해 지갑을 여는 관객층이 대부분 여성이다. 그러다보니 남자 배우들이 더 주목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심하게 균형이 깨졌다. 제작사들이 너무 상업성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폭넓게 작품의 성비를 바라보는 시야가 확보되지 않았다. 작품 한 편에 남자 주조연이 6~7명이라면, 여자는 고작 1~2명 출연하는 경우가 많다. 그마저도 같은 배우들이 여러 작품에서 비슷한 역을 맡는다. 그러다 보니 그 나물에 그 밥이란 말도 나온다. 제작사나 연출가들이 배우가 잘 보일 수 있는 좋은 작품을 선택하고, 또 역량 있는 여배우를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시각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다채로운 역할들로 변신을 해왔다. 이를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왔나. 
하고 싶은 작품과 할 수 있는 작품 사이의 갭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배우를 꿈꾸는 친구들이 가끔 이런 질문을 한다. 오랫동안 다양한 캐릭터를 맡을 수 있었던 이유가 뭐냐고. 그럴 때마다 네가 하고 싶은 작품과 할 수 있는 작품의 교집합을 크게 만들라고 대답한다. 내가 처음 배우를 시작했을 때, 체격도 크고 개성도 강해서 뮤지컬을 하기에 어울리지 않은 외모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실제 음색은 하이소프라노인데, 굉장히 낮은 소리가 날 것 같은 외모였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계발을 했다. 성대를 혹사해가며 하이소프라노에서 메조소프라노와 알토 소리까지 만들어냈다. 그런 덕분에 나만의 캐릭터가 생겼고, 계속 무대에 오를 수 있었다. 자신이 하고 싶은 역할과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1퍼센트라도 매칭이 된다면, 포기하지 말고 애를 써야한다. 그 노력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남성 편향적인 제작 환경은 과거부터 이어져 온 고질적인 문제일 텐데, 데뷔 당시와 지금을 비교한다면 어떤 차이가 있나? 
결과적으론 전혀 성장하지 않았다. 데뷔 초창기만 해도 ‘스타 탄생’이 가능했다. 연출가 선생님이 차근차근 차근 준비된 배우를 실험적인 무대에 내보냈을 때, 그 결과물에 대한 희열이 있었다. 지금 배우 지망생들도 이런 순간을 꿈꾸고 있지만, 그들에게 참 기회가 없다. 대한민국 뮤지컬 배우들의 실력은 굉장히 좋다. 하지만 더 반짝이고 건강하게 성장이 안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제작사에 있다. 브로드웨이나 웨스트엔드의 작품은 배우의 힘에만 기대지 않는다. 출연료 또한 회당이 아닌 주급으로 받고, 최대치도 정해져 있다. 반면 우리는 작품의 반 이상이 배우의 힘으로 간다. 물론 배우의 역량이 크다는 건 좋은 현상일 수 있다. 하지만 실력과 무관하게 남자 배우의 팬덤이 곧 출연료에 비례하는 것은 비단 여배우뿐 아니라 모든 배우들에게 자괴감을 주는 일이다. 
 
특히 배우들에게 출연료는 민감한 부분일 텐데, 그 부분에서 여배우들이 불평등을 느낄 때가 많다고 한다. 실제로 느끼는 체감은 어떤가?
나는 24년 차 배우이고, 소속사가 생긴 지 4년이 됐다. 그런데 얼마 전 소속사 대표가 공연 계약을 하고 와서는 자괴감을 느꼈다고 하더라. 24년 차에 5개의 상을 받고, 출연작이 80편이 넘는데 이런 출연료를 받고 계셨냐고. 내 연배와 커리어가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도대체 다른 여배우들은 얼마를 받고 있는 거냐고. 대한민국의 좋은 여배우들은 좋은 작품을 만나 자신을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정말 희박하다. 어떤 사람들은 남자 배우와 2배 정도 차이가 나느냐고 묻지만, 사실 10분의 1, 어떨 때는 100분의 1이 될 때도 있다. 이게 현실이다. 과거 한 소속사 대표가 무책임하게 모 배우의 출연료를 공개하면서, 그 파급 효과가 엄청났다. 그 이후 팬덤이 있는 남자 배우들 사이에서 그 금액이 출연료 책정의 기준이 돼 버렸다. 그걸 옆에서 보고 있는 여배우들의 기분은 어땠겠나. 심지어 한 제작사 대표는 팬덤이 많은 남자 배우에게 찾아가 출연 좀 해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다고 한다. 하지만 여배우에게는 그러지 않는다. 너 아니면 다른 배우 쓰면 된다고 말한다. 이렇게 존중받지 못하는 무대에서 과연 그 배우가 얼마나 영혼을 불사를 수 있겠나? 그럼에도 우리 여배우들은 무대에 오르고, 영혼을 불사른다. 무대에서 살아 있고 싶으니까. 
 
이런 현실에 어떻게 맞서야 할까? 
이순재 선생님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작품에 출연할 수 있었냐는 질문에 이런 대답을 한 적이 있다. “무슨 역이 들어오든지 다 해라. 감독이 하라는 대로 해라. 상대 배우가 원하는 대로 해라.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라. 그다음에는 내가 하고 싶은 걸 고르는 단계가 온다.” 이 말을 듣는데 소름이 쫙 끼치더라. 물론 이쯤에서 한 번 더 반성하게 된다. 사실 나는 공연계에서 하고 싶은 걸 골라야 하는 단계에 접어들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 역으로 가고 있다. 그럼에도 배우니까 하고 싶은 걸 고르는 마인드로 들어오는 모든 걸 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역할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다. 역으로 여배우만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하는 시각의 전환 또한 끊임없이 필요하다고 본다. 
 
문제의식을 자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성을 위해 여러 가지 행동을 실천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런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따져보면 남자가 아니다. 바로 여자들 스스로가 주체적이 되어야 한다. 우리 여자들이 웅크려 있지 말고, 입 다물고 있지 말고, 죄책감 느끼고 있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여자들을 응원하고 지지할 수 있는 프로젝트를 꽤 오랜 시간 고민해 왔다. 여배우들끼리 미니 콘서트를 해 그 수익을 영향력 있게 쓰기도 했다. 깔창을 생리대로 쓰는 고등학생이나 미혼모 센터에 도움을 준 것이다. 또, 하반기에는 여자들만 출연해 여자들의 이야기를 펼치는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 이 무대 자체가 여성들에게 단단한 보호막 같은 느낌을 전해 주면 좋겠다. 내가 좀 더 영향력이 생긴다면 여성들을 위한 작은 움직임들에 더 많은 사람들을 동참시킬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최근에는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 하게 되었다.  
 
선배 배우로서, 현실의 벽에 부딪히고 있는 후배 여배우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전 세계 여배우들에게 말하고 싶다. ‘This is Me.’ <위대한 쇼맨>에 나오는 대사인데, 여성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에 조금도 주저하지 말고, 스스로를 의심하지도 말았으면 한다.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인정한다면, 모든 부당한 상황을 버티고 기다리고 당하지 않아야 한다. 이게 바로 나니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3호 2018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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