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겨울엔 눈 녹아 사라지듯이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겨울의 아침, 칼바람을 헤치고 스튜디오로 들어서자마자 반짝이는 플래시 세례가 펼쳐졌다. 플래시의 주인공은 윤지온. 그는 최근 만들어진 자신의 공식 팬카페 이름을 지어준 팬에게 선물할 거라며 세상에서 가장 예쁜 표정으로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으며 촬영장을 훈훈하게 만들었다. 이후 들려온 윤지온의 공식 팬카페 이름은 ‘온기가득’이었다. 맑은 미소와 함께 내뱉었던 그의 ‘온기가득’한 답변들을 되짚어보니 윤지온과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윤지온이 연기자를 꿈꾸게 된 계기를 접하면 ‘정말로? 이게 다야?’라는 반응이 자연스러울 만큼 시시하긴(?) 하다. 고등학생 땐 음악이 좋아서 막연하게 ‘예술의 길을 걸을지도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고,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연기라는 길을 물 흐르듯 걸어갔단다. “오디션 프로그램을 보면 많은 분들이 누군가의 사연이나 아픔에 주목하고, 공감을 해주잖아요. 그런데 전 그런 것 없이 ‘정말로 그냥 연기가 좋아서, 하고 싶어서’ 도전한 거였어요. 예전에는 오디션에서 ‘왜 연기를 하게 되었나. 얼마나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받고 (그런 사연이 없음에 대해) 고민하기도 했지만요, 이젠 솔직해요. 연기도, 노래도, 무대도 제가 정말 좋아서 이걸 하는 거죠.”
윤지온의 무대 데뷔작은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다. 대학교를 졸업하는 시기와 맞물려 철썩 오디션에 붙었다. 졸업 직후 취업에 성공한 행운아에게 <히스토리 보이즈>는 지금도 여전히 특별하고 소중한 작품이다. 어려운 작품이라고 소문났지만 무대 안팎에서 흡인력이 강한 작품은, 그에게 고등학생 시절을 회상하게 함과 동시에 첫 무대의 추억을 행복하게 만들어줬다. 자연스럽게 무대 위의 설렘 그리고 연기에 대한 열정은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여기에 어느 날 우연히 촬영장에서 만나 친해진 한 뮤지컬 배우로부터 문득 ‘너 뮤지컬 할 생각 없어?’라는 전화를 받았다. 운명 같았던 한 통의 전화를 받고 혼자서 끙끙 앓고 있던 윤지온은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은 부딪쳐보자”면서 오디션장으로 무작정 달려갔다. 그렇게 만난 작품은 바로 그의 첫 뮤지컬 <달을 품은 슈퍼맨>이다.
이후 윤지온은 뮤지컬 <은밀하게 위대하게>에 이어 <여신님이 보고 계셔>를 통해 눈도장을 톡톡히 찍었다. 공연을 거듭할수록 차세대 ‘뮤지컬 새싹’으로 주목받은 그는 거듭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들먹이며 부끄럽다는 말과 함께 손사레를 쳤다. 그렇다면 왜 하필 그에게 관심이 쏟아졌을까. 윤지온이 곰곰이 생각하다 내놓은 이유는 바로 ‘간절함’이다. 윤지온이라는 이름을 조금씩 알리기 시작한 <은밀하게 위대하게>의 리해진을 만들어가면서, 그는 리해진의 행동과 감정 모두에 간절함을 담았다고 했다. 진심은 통하는 법, 이후 윤지온은 다섯 시즌을 공연할 정도로 예쁘고 사랑스러운 작품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순호를 만났다. 캐스팅 소식을 듣고 나서, 그의 목표는 단 하나 ‘작품에 폐를 끼치면 안 되겠다’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부담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낮에는 순호를 연습하고, 저녁에는 리해진으로 무대에 올라야만 했던 상황도,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에게는 하나의 성장점이었다. 물론 쉽지 않았다. 하필이면 <여신님이 보고 계셔>는 그가 만난 다른 어떤 작품들보다도 많은 곡을 소화해야만 했고, 합창에서 차지하는 파트도 많았다. 하지만 어렵게 잡은 기회인 만큼, 온 힘을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다. 윤지온은 다른 어떤 때보다 그만의 순호를 만들어가기 위해 매일 <여신님이 보고 계셔>에 자신만의 간절함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이렇게 탄생한 순호는 청순하고 신비로운 캐릭터로 다듬어지며 그의 가능성을 인정받게 만들었다.
이제 윤지온은 <여신님이 보고 계셔>의 순호를 떠나보내고 <찰리찰리>의 찰리로 무대에 선다. 한창 작품에 푹 빠져 있는 그에겐 <찰리찰리>의 모든 것이 특별하다. 작품은 찰리가 우연히 아일린이라는 여자아이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유령의 집이라고 소문난 빈집에 사는 찰리는 내면의 상처를 품에 안고, 빛이 무서워 나오지 못하고 숨어 있는 인물이다. “찰리가 숨어 있는 빈집에 예술고등학교 학생들이 찾아와서 미래를 점치기 위해 ‘찰리찰리’를 불러요. 그런데 그중 아일린이라는 아이가 스케치북을 놓고 가서 다시 돌아오거든요. 그때 찰리를 만나고 묘한 느낌을 받아요. 그리고 또다시 빈집에 온 아일린이 불에 덴 것처럼 붉은 찰리의 손을 보고는 치료를 해줘요. 그리고 어머니의 목걸이를 걸어주죠. 그때야 찰리가 웃기 시작해요. 저는 <찰리찰리>에서 그 장면이 참 좋아요.”
질문마다 차분하지만 대답을 이어가는 윤지온에게도 떨리는 순간은 있다. 바로 오디션. 배우라면 거쳐야 하는 관문이지만, 사실 그에게는 여전히 어려운 시간이기도 하다. “오디션에서 노래할 때면 손이랑 귀가 저릴 정도로 긴장해요. 그래서 혼자 고민도 많이 했죠. ‘내가 심사를 받는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가?’하는 자각에 공연을 한다고 되뇌고 갔는데…, 그래도 떨리더라고요. (웃음) 그런데 무대와 오디션은 정말 다르잖아요. 그래서 무대에 오르기 전에 진짜 많이 연습해야만 해요.” 윤지온은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지 못할 때면 ‘뭘 연습한 거지’라는 생각이 밀려온단다. 자신이 지닌 능력의 10%도 보여주지 못했을 때, 생기는 허탈함. 혹시라도 자신을 처음 보는 누군가가 ‘윤지온이라는 애가 저것밖에 안 돼?’라는 생각을 가질까 봐 속상하다는 그. 윤지온이 무대 아래에서 더 혹독하게 연습하고 준비하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윤지온에게 자신을 설명해 달라는 질문을 건넸다. 그는 오랜 고민 없이 답이 나왔다는 듯 씩 웃는다. ‘노력하는 윤지온’. 이 짧은 문장 속에서 그가 무대를 대하는 감정이 전해진다. “목표는 많아요. 그런데 ‘잘하는 게’ 가장 큰 목표죠. 사람마다 잘한다는 기준은 다르잖아요. 그래서 끝이 없어요. 자기만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분명 쉽게 만족할 수 없을 거예요. 만족해 버리면 끝나버리는 거니까. 끝없이 계속할 거예요. 잘하기 위해서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3호 2018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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