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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ULTURE INTERVIEW] <리차드 3세> 김여진 [No.173]

글 |박보라 사진 |김호근 2018-02-08 5,221

<리차드 3세> 김여진

나도 버텨볼게   

 

 

김여진이 만삭의 몸으로 참여했던 <버자이너 모놀로그> 이후 꽤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무대에 오른다.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에서 굵직한 캐릭터로 인상을 남긴 그녀. 김여진은 처음으로 고전, 그것도 셰익스피어의 연극 <리차드 3세>에 도전한다. 심지어 실제로 엄청나게 굴곡지고 끈질긴 삶을 살았던 엘리자베스 왕비로. 캐스팅 당시 공개된 컨셉 사진을 보니 리차드 3세와 불꽃 튀는 전쟁을 벌이는 날카로운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것 같아, 조금 쫄기도(?) 했다. 인터뷰에 앞서 “사실은 많이 까칠하실까 봐 걱정했어요”라는 기자의 말에 호탕한 웃음으로 반겨주던 그녀는 시종일관 따스한 눈길과 깔끔한 대답을 선물했다. 그렇다면 김여진이 다듬어가고 있는 엘리자베스 왕비는 과연 어떤 온도를 지녔을까.

 

 

비극의 크기

                     

오랜만에 연극 무대에 서는 것으로 알고 있다. <리차드 3세>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일단 아이가 좀 컸다. 만삭일 때 마지막 공연을 하고, 출산했다. 이제 아이가 유치원에 다닌다. 연극은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매일 연습하고 밤에 들어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볼 시간이 없더라. 아이와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사실 오늘도 아이는 38도까지 열이 올랐다. (엄마와 오랫동안 떨어지는 것에 대한) 화를 삭이지 못하는 거다. 오늘은 내가 집에서 나오는데 아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연극하는 사람들’이라고 하기도 했다. (웃음) 서로 견디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전에도 출연 제의는 몇 번 들어오긴 했지만, 쉽사리 결심하지 못했다. 이젠 아이를 향해 ‘너도 버텨. 엄마도 버틸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작품을 선택한 또 하나의 이유는 황정민 배우 때문이었다. 꼭 한 번 함께 무대에 서고 싶었다. 위시리스트에 올려놓을 정도로.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리차드 3세>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처음 해보는 거다. 난 연우무대와 극단 봉원패라는 곳에 있었는데 두 곳 모두 창작극 위주로 공연했다. 운이 좋게도 그곳에서 공연을 해서 현대적인 화술을 배울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 셰익스피어 작품에 참여하는 것이 큰 도전이다.

 

<리차드 3세>는 상당히 어렵기로 소문났다. 관객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어떤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가.

우선 말이 어렵다. 누가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부터 시간이 걸릴 정도로. 그리고 당시 시대가 주는 어려움도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내용이다. <리차드 3세>도 사람과 사람이 얽히고설키고 갈등이 생기고 복수를 하는 이야기라는 거다. 다만 훨씬 더 극적이다. 독특한 말투나 이름에서 오는 생경함의 문제는 연출과 작가가 큰 노력을 쏟고 있다. 리딩 작업을 굉장히 여러 번 했는데, 각 배우의 호흡을 파악한 뒤에 연출이 수정을 거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말하기가 편해지더라. 배우들이 직접 말하고 연기하면 작품을 쉽게 따라갈 수 있을 거다. 또 확실한 갈등 구조가 드러나 이해하기 쉬울 거다. 굉장히 빠른 속도감을 가졌고, 중간엔 독특한 유머도 있다. 폭넓은 감정으로 울었다가 웃었다가 그러다 보면 순식간에 시간이 지나갈 거다.

 

엘리자베스 왕비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은 어땠는가.

리처드 3세의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난 이 공연을 보았을 때, ‘한 인간, 한 여자의 삶이 이렇게 극적일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자베스 왕비는 지금도 영국에서 마녀라는 평가를 받는다. 세 왕조를 거친 엘리자베스 왕비는 모든 사람이 죽고 죽일 동안 혼자 살아남았다. 너무 대단했다. 아이가 둘이나 딸린 타국의 미망인이었는데 왕비가 되고 열 명이 넘는 아이를 낳고 다음 왕조까지 살아간다.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은 그녀는 마지막엔 모든 것을 놓고 수녀원으로 간다. 정말 비극적이고 대단한 삶을 살았는데, 알수록 묘한 사람인 것 같더라. 지금 <리차드 3세>에서 리처드 3세나 다른 남성들이 권력을 향해 질주한다면, 엘리자베스 왕비는 자신과 아이 그리고 가족의 생존을 위해 권력이 필요한 여성이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권력이 목적이라면 그녀에게는 수단이라는 거다. 그녀가 지닌 슬픔의 크기도 너무나 크고, 자신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한 의지도 굉장히 강하다. 그런데도 결국 엘리자베스 왕비는 모든 걸 다 잃지만 말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엘리자베스 왕비는 정말 매력적인 역이다.

 

당신의 설명을 들어보면, 리처드 3세보다 매력적이게 보일 수도 있겠다.

아니다. 리처드 3세와 비교가 안 된다. (웃음) 엘리자베스 왕비는 리처드 3세와 주로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에, 그와 다투게 되고 엄청난 고난을 겪게 되는 거다. 리처드 3세나 엘리자베스 왕비 외에도 작품 속 모든 캐릭터가 드라마틱하면서도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서 골고루 매력이 있다. 모든 사람이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다. 작품을 끌어가는 인물이 리처드 3세이기 때문에 완벽한 주인공이라고 본다. 아마 황정민 배우도 연기 인생에서 가장 많은 대사량을 소화하고 있을 거다. (웃음)

 

엘리자베스 왕비는 남편이 죽고 자식이 죽는 걸 지켜본다. 연기지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김여진과 엘리자베스 왕비를 완전히 분리하려고 한다. 예전에는 ‘나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도 많이 했고, 감정에 몰입하기 위해 진짜 나를 끌고 오기도 했는데 이 정도 크기의 비극을 끌고 오면 살 수가 없을 것 같더라. 물론 연습실에서는 엘리자베스 왕비지만. 그녀의 감정은 느껴지지만, 아직 완벽하게 느끼지는 못하고 있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무섭다. 아이를 잃으면서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 이 엄청난 감정에 섣불리 들어가기가. 연습 중인 지금은 엘리자베스 왕비에게 반은 들어가고 반은 나와 있다. 아마 무대에 서면 전부 다 들어가게 될 것 같다.

 

엘리자베스 왕비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점은 무엇인가.

리처드 3세 당시의 이야기를 많이 찾아봤다. 책도 읽고, 관련된 영화나 드라마도 보고. 그 전보다 엘리자베스 왕비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그녀를 바라보는 여러 시선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흑마술을 하는 마녀로 보는 시선도 있는데, 민간 설화처럼 주문을 외워서 전쟁에 영향을 미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도 한다. 또 기구한 팔자라고 보는 눈빛도 있다. 내가 표현해 내는 엘리자베스 왕비는 그 중간의 어느 정도일 거다. 그녀는 인생에 휘말렸을까. 마녀일까. 얼마나 예쁜 사람이었나. 아니면 지혜가 굉장히 뛰어났을까. 또 아니면 남자를 홀릴 만한 매력이 있나. 이렇게 다양하게 고민하는 거다. 사실 엘리자베스 왕비에 대해 공부하면서 나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자식의 반 이상을 잃는다. 나 같으면 한 아이만 죽었어도 따라 죽거나, 정신을 놓아버렸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끝까지 살아남아서 왕조를 지켰다. 보통 여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말 많이 놀랐다.

 

 

원 캐스트라고 들었다. 이에 따른 부담감은 없나.

첫 무대에 데뷔했을 때 원 캐스트로 일 년 동안 무대에 올랐다. 극단 단원이었기 때문에 그랬는데, 이 경험이 연기로 20년을 먹고사는 자산이 됐다. 원 캐스트는 매우 큰 책임을 져야 한다. 체력 관리, 목소리의 상태, 내 기분, 다른 배우와의 호흡 등이 완전히 컨트롤되어야 하는 상황인 거다. 그런데 이 부담감과 책임이 큰 만큼 얻어지는 게 그 이상이다. 지금 함께하는 모든 배우가 이걸 알고 있을 거라고 본다. 그래서 다들 흔쾌히 원 캐스트로 출연하지 않을까. 그리고 엘리자베스 왕비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누구랑 나누고 싶지 않았다. (웃음)

 

<리차드 3세>에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배우들이 모여 있다. 연습실 분위기가 궁금하다.

삭막하다. 집중되어 있는 상태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직은 이 공연이 약간 버겁기도 하다. 정해진 시간 안에 연습해서 작품에 관한 모든 걸 맞추는 것이 말이다. 또 연출이 섬세한 분이라 많은 노트가 생기기 때문에 연습하면서도 떨리기도 한다. 그래서 더 치열하게 연습하는 중이다. 한 시간을 넘게 연습하고 5분 정도를 쉬는데, 난 물 한잔을 마시고 딱 대기하고 있다. 연습이 시작되고, 고작 술자리를 두 번밖에 안 가졌을 정도로 절제를 하고 있다. (웃음) 얼마 전에 술자리에 갔는데, 나는 (함께하는 배우들이) 이렇게 웃긴 사람들인지 몰랐다. 어떻게 연습하면서 참았나 싶을 정도로. 이렇게 누구 하나 빼놓을 수 없이 엄청난 절제를 하고 작품에 온 힘을 쏟고 있다.

 

 

마녀의 근사한 목소리

 

김여진의 엘리자베스 왕비는 확실히 매력적일 것 같다. 그런데 최근엔 이런 주체적이고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모든 여배우가 다 느끼고 있을 거다. 여성이 아니라 사람인 캐릭터를 해보고 싶다. 정말 캐릭터가 한정적이다. 여성 배역이라면 예쁜 여자, 좋은 엄마 아니면 독한 여자. 이게 주류 아닌가. 주체적인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어도 기회가 별로 없다.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을 보면 주인공만 아니라 모든 배역에게 다 이야기가 있다. 보면서 너무 부러웠다. (여성 캐릭터가 다양한) 작품들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러려면 여성이 여성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들은 문화적 소비와 창작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니까. 현실 속 여성은 (한정적인 캐릭터처럼) 일관된 것이 아니라 각자 특색 있고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 여자는 이런 점이 강점이고, 이 여자는 저런 점이 약점이고, 이렇게 모난 여자도 있고 저렇게 둥근 여자도 있고 이렇듯 말이다. 그러니까 여성들이 오래 여성들에게 관심을 두고 지켜봤으면 좋겠다. 그리고 많은 여성들이 주체적이고 매력적인 여성 캐릭터를 향해 많은 애정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요즘은 한 가지라도 좋은 점이 있으면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리차드 3세>는 좋은 점이 너무 많다. 셰익스피어의 극, 서재형 연출, 상대 배역으로는 황정민! 드라마나 영화도 마찬가지다. 작품에 새로움이 있든지 연출가가 좋든지 아니면 같이하는 배우가 좋든지. 한두 가지 당기는 무언가가 있으면 하게 된다. 좋은 점은 찾으라면 찾을 수 있는 거니까. (웃음) 그런데 나도 도저히 못 하겠는 작품은 있다. 정말 뻔한 역할. 나 아닌 다른 사람이 해도 괜찮다 싶으면 하지 않는다. 연기하면서 너무 재미가 없을 것 같아서.

 

종종 남편인 김진만 연출의 드라마에 출연하기도 했다.

서로 (같은 작품으로 작업)하지 말자고 하면서도, 남편이 결국 캐릭터에 맞는 배우를 못 찾으면 내게 와서 부탁한다. (웃음) 그런데 남편의 좋은 점은 나를 배우로서 아껴준다는 거다. 신뢰하는 면이 있는 거지. 내게 어떤 역할을 주어도 웬만큼은 소화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남들에게 부탁하기 쉽지 않은 역할이면 찾다가 찾다가 내게 SOS를 친다. 이런 면에서는 참 좋다. 같은 분야를 업으로 두고 이야기하면서 서로를 좋은 배우 그리고 연출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 같이 사는데 나쁜 연출가라면 얼마나 골칫거리겠나. 아마 외면하고 살걸? (폭소) 다행히 그런 일은 없어서 좋다. 사실 지금은 아이 때문에 둘이 한꺼번에 집을 비우는 게 어렵다. 가능하면 번갈아 가면서 일을 하려고 하는데, 아이가 조금만 더 크면 같이 작품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연기는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예술인 만큼 다양한 경험이 필요할 것 같다. 최근 감정을 확장해 준 경험이 있나.

출산과 육아. 최고다. (웃음) 전에는 사랑과 연애였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고, 사랑 때문에 굉장히 아픈 경험을 겪으면서 여러 감정을 경험했다. 이젠 바뀌었다. 육아는 어떤 것을 상상해도 그 이상이고 자신의 바닥을 보게 된다. (폭소) 정말 어렵다!엄마들 사이에서 ‘낮버밤반’이 라는 말이 있다. 낮에는 버럭 밤에는 반성. 이걸 거의 매일 하는 거다. 배우의 입장에서 보면 육아로 발생하는 감정의 증폭은 정말 크다. 감정을 누르다가 누르다가 폭발하고, 어떨 땐 꾸우욱 참고 또 어떨 땐 같이 엉엉 울기도 한다. 이렇게 감정적으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경우가 잘 없다. 그리고 물리적으로 정말 힘이 든다. 내가 내 자신을 잘 알게 된다. 내가 그렇게 고상하지 않고 참을성도 없구나.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갖게된다.

 

<리차드 3세>가 김여진에게 어떤 도전으로 남게 될까.

인생에서 새로운 장의 시작이다. 지난해로 연기를 시작한 지 20년이 됐다. 그동안 연극도 하고 영화도 하고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내 인생의 한 장이 끝났는데, 이제 다시 근사하게 시작하는 느낌이다. 나는 무대에 서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앞으로 2년에 한 번 정도는 꼭 무대에 서고 싶다. 무대에 서야만 연기도 는다. 연기를 하다 보면 가끔 내가 정체되어 있거나 하던 걸 계속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 연습하다 보니 알겠더라. 드라마는 당일에 대본을 받아 촬영하니까, 이렇게 한 작품과 캐릭터에 몰두해서 파고 들어가지 못한 거다. 이렇듯 내게 무대는 꼭 필요한 것 같다. 무엇보다 그러니까, <리차드 3세>가 잘돼야 할 텐데말이다. (웃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3호 2018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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