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대의 질주
지난해 TV에 얼굴을 비치면서 수면 부족의 나날을 보낸 박강현의 소망은 의외로 소박했다. 제발 하루만 쉬고 싶다! 하지만 막상 하루 쉬는 날이 주어지면 무대가 생각났단다. 그에 대한 박강현의 보충 설명은 이랬다. “일하는 데 관성이 생겼나 봐요.” 멈출 줄 모르는 관성이 생긴 무서운 신인. 하지만 진짜 무서운 예감은 그의 질주는 이제부터 진짜 시작일지 모른다는 거다.
차분하게 행진하는 법
살면서 작년이 가장 바쁜 한 해였죠? 아침에 눈뜰 때마다 무슨 생각했어요?
할 일은 어떻게든 하게 되는구나. (웃음) 공연만 했으면 그렇게까지 안 바빴을 텐데, 공연하고 방송을 병행하느라 진짜 정신없이 시간을 보낸 것 같아요.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씻고 바로 나가고, 일 끝나면 바로 집에 가고 바로 자고. 그런데도 잠을 충분히 잔 적이 거의 없어요. 다른 것보다 목 컨디션이 좋으려면 잠을 충분히 자야 하는데, 그걸 못하니까 힘들었죠. 작년엔 뭘 몰라서 겁없이 덤빌 수 있었지만, 다시 하라고 하면 쉽게 못할 것 같아요. (웃음)
새로운 상황에 내던져지면서 스스로에 대해 새로 알게 된 게 있어요?
음, 전 원래 뭐든 잘 버티고 또 뭐든 잘 참는 편이에요. 이겨내려는 욕구가 강하다고 해야 하나. 근데 작년에는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저도 모르게 지치더라고요. 아, 나도 힘들어할 수 있구나 싶었어요. (웃음) 바쁜 스케줄 속에서 컨디션 관리를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깨달았죠.
그런데 <팬텀싱어> 시즌2 출연을 결정할 때 망설임은 없었나요? 시즌1이 워낙 인기를 끌어서 출연 결정에 부담을 느꼈을 것 같은데.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 안 했어요. 그냥, 이것도 하나의 큰 도전이 되지 않을까 싶었죠. 어쨌든 방송은 제가 안 해봤던 경험이니까.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하면 뭔가 배우게 되잖아요? 어떤 성취를 이루겠단 생각보다는 새로운 경험 자체에 의미를 뒀던 것 같아요.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경연을 하면 할수록 결과에 대한 욕심이 생기진 않던가요?
처음엔 진짜 예선만 통과하자는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예선을 통과하니까 한 라운드만 더 올라갔으면 좋겠다 싶고, 나중엔 그래도 4중창 그룹을 뽑는 대회인데 4중창은 한 번 불러봐야 하지 않나 싶더라고요. 결승까지 올라가니까 잘하면 우승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 생기기도 했고요. (웃음) 비록 우승은 못했지만, 그래도 정말 값진 경험이었어요. 매 라운드가 긴장의 연속이었거든요. 방송을 보고 나서 공연을 보러 와주시는 분들도 있는데, 뮤지컬배우로서 정말 기뻐요.
방송도 방송이지만 작년 한 해는 무대에서도 활약이 대단했죠. 중극장부터 대극장까지 다양한 무대를 오갔으니까. <더뮤지컬> 연말 설문에서 ‘2017 올해의 신인’으로 뽑혔는데, 기분이 어때요?
저기 내 이름이 올라 있는 게 맞나. 내가 그럴 만한 자격이 있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데뷔한 지 이제 800일 조금 넘었는데, 학교 졸업하고 한창 오디션 보러 다닐 때만 해도 이런 생각을 못했거든요. 그냥, 뮤지컬을 꿈꾸는 보통 남자애들처럼 <지킬 앤 하이드> 해보고 싶다 하는 막연한 꿈만 꿨지 제가 진짜 이런 배우가 될 줄은 몰랐어요. 소극장 뮤지컬 <라이어 타임>으로 데뷔하게 됐을 때도 연기가 너무 어려워서 앞으로 잘할 수 있을까 싶었고요. 근데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더 많은 무대에 서게 된 거예요. 물론 과분한 일이긴 한데, 어쨌든 기분은 좋아요. 특히 올해의 신인은 관객분들이 뽑아주신 거니까 의미가 크죠. 지금은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단 생각뿐이에요.
일이 너무 잘 풀릴 때 오히려 불안해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어떤 편이에요?
제가 생각해도 요즘 되게 잘 풀리고 있는 것 같은데 그렇다고 ‘더, 더, 더!’ 하고 스스로를 몰아붙이진 않아요. 일을 하다 보면 잘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랄까. 그래서 잘되는 데 대한 부담을 느끼긴 해도 그게 막 심하진 않아요. 그냥, 제 나름대로는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 왔고,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자는 마음이에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도록. 제가 표현한 인물이나 이야기에 사람들이 공감해 주는 것처럼 행복한 게 없거든요.
요즘 같은 때일수록 주위에서 많은 조언을 듣지 않나요?
항상 겸손해라, 친한 형들이 그런 얘기를 많이 해주죠. 저는 변하지 않았어도 저를 둘러싼 환경이 달라지면 오해를 사기 쉽다고요. 쉽게 말해, ‘쟤 변했어’라는 얘기를 듣기 쉽다는 거겠죠. 저는 사실 좀 내성적인 편이거든요. 기본 감정 상태가 다운돼 있는 편이라 어디 가면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가 많아요. 물론 친한 사람들하고는 장난도 치고 그러지만, 평소에는 잘 안 그래요. 그래서 종종 오해를 사는 것 같기도 해요.
언제나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차기작 <킹키부츠>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요?
작년 봄이었나, 오디션 공고가 뜬 걸 보고 지원했어요. 공연을 직접 본 적은 없는데, 내용이랑 노래는 알고 있었거든요. 하이라이트 영상도 진짜 재미있게 봤고요. 또 주위에서 완벽한 뮤지컬이란 얘기를 정말 많이 하더라고요. 사실 처음엔 최종 오디션까지 올라갔다 안 됐단 이야기를 들었는데, 몇 달 후에 다시 같이하잔 연락을 받았어요. 중간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제가 듣기론 공개 오디션 지원자 가운데 제가 후보 1번이었대요. 결국 나한테 올 운명이었나 싶었죠. 어렵게 온 기회니까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커요.
찰리는 지금까지 맡은 캐릭터 중에서 가장 평범한 인물 아닐까 싶어요. 적당히 꿈꾸고, 적당히 살아가는 이십 대 청춘은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캐릭터니까. 그런 일상적인 캐릭터를 연기할 때 훨씬 수월하게 느껴져요?
저는 어떤 역할이든 캐릭터를 구상할 때 제 자신에서 출발해요.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서 저라는 사람한테 덧씌우는 게 아니라, 저와 캐릭터 간의 교집합을 찾아가죠. 그래서 지금까지 했던 역할 모두 다 저라는 사람과 닮아 있었던 것 같아요. 아니면 제가 성격이 여러 개인 건가. (웃음) 근데 그중에서도 찰리는 저랑 진짜 좀 비슷한 것 같아요. 자기최면인지 모르겠는데, 평소엔 무기력하다 어떤 일에 열정이 생기면 몰두하는 모습도 그렇고, 그럴 땐 오로지 앞만 보고 달려가는 것도 그렇고, 여러모로 저랑 잘 맞는 캐릭터인 것 같아요.
그럼 찰리를 연기하는 데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뭐예요?
찰리의 심리적 성장 과정을 잘 그려내는 거요. 사실 <킹키부츠>는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 아니거든요. 서로 다른 삶을 살아온 찰리와 롤라가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서로 존중하게 되면서 가까워지는 이야기잖아요. 이야기 자체는 어렵지 않기 때문에, 찰리의 감정을 단계적으로 어떻게 잘 쌓아가느냐가 관건인 것 같아요. 찰리는 인생의 열정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인물인데, 열정을 찾았을 때 마치 흑백에서 컬러로 변하는 것 같달까. 드래그 퀸 롤라가 태생적으로 화려한 캐릭터인 반면, 찰리는 잘못하면 존재감 없는 캐릭터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디테일한 감정 변화를 보여주는 게 중요할 것 같아요.
혹시 박강현의 인생에서도 흑백에서 컬러로 변한 듯한 시기가 있나요?
심리적인 건데, 대학에 들어갔을 때요. 학교에 예비 1번으로 추가 합격했거든요. ‘제발, 한 명만 빠져라, 제발, 제발, 제발!’ 매일 빌었는데, 진짜 딱 한 명이 등록을 안 한 거예요. 그때 온 세상이 아름답게 보였어요. (웃음) 근데 저 들어갈 때는 턱걸이로 들어갔지만, 졸업은 우수하게 했어요. 군대 갔다 와서 엄마한테 손 안 벌리고 학교 다니겠다고 철든 척했는데, 방법이 없으니까 장학금 받으려고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웃음)
이번 공연은 같은 역할 배우들의 색깔이 다 달라서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연습실에선 어떤가요?
오늘 인터뷰하러 오기 전에 연습실에서 (이)석훈 형이 런스루 도는 걸 보고 왔거든요. 그런데 확실히 저와는 다른 분위기의 찰리가 보이더라고요. (김)호영 형은 말할 것도 없고요. 두 형의 찰리와 제 찰리는 분명히 다를 텐데, 저는 오히려 형들의 찰리가 어떻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제 찰리가 어떤지 잘 모르겠어요. 무슨 말이냐면, 아무리 연습하는 걸 녹화해서 본다고 해도 제삼자가 돼서 제 자신을 볼 수 없잖아요. 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으니까. 어쨌든 <킹키부츠>는 진짜 연습하는 것만 봐도 재밌어요. 아무리 봐도 지겹지가 않아요. 작품에 불필요한 대사나 불필요한 장면이 하나도 없어서 그런가. 연습을 볼 때마다 진짜 잘 만든 작품이구나 싶죠.
배우를 크게 두 분류로 나누자면, 화려하고 센 롤라를 맡을 수 있는 쪽과 조용히 빛나는 찰리에 어울리는 쪽이 있을 거예요. 박강현은 앞으로 어떤 길을 꿈꿔요?
어떤 역할이든 캐릭터에 맞게 잘 해내고 싶어요. 당연히 롤라 같은 캐릭터에도 도전해 보고 싶고요. 전 사실 어떤 역할을 맡을 때마다 부담을 느끼긴 하는데, 한편으론 그냥 하면 되지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역할에 상관없이 다양한 도전을 해보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목표가 진짜 많은데, 일단 관객들에게, 그리고 함께 공연하는 배우들과 스태프들에게 인정받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작년에 제 공연을 본 관객이 올해 다시 제 공연을 봤을 때, ‘아, 저 배우가 좀 더 성장했구나’ 느낄 수 있게 하고 싶죠. 앞으로 계속 깊이 있게 성장하는 배우가 되는 게 저의 제일 큰 목표예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3호 2018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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