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은 투박하지만 한없이 사랑스러운 뮤지컬! 지난해 뜨거운 인기에 힘입어 다시 무대에 오른 <앤ANNE>은 루시 M. 몽고메리의 소설 『빨강머리 앤』을 무대화한 작품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유쾌한 공상 소녀 빨강머리 앤이라죠. 매일 밤 무대 위에서 앤을 만나는 배우들은 과연 이 특별한 소녀의 어떤 말에 마음을 빼앗겼을까요?
차준호 / 매슈
앤이 매슈와 함께 마차를 타고 초록 지붕 집으로 향하는 길, 자줏빛 황혼이 짙게 물든 아름다운 풍경을 넋 나간 듯 보던 앤이 이런 말을 해요. “가슴이 좀 이상하게 아팠어요. 하지만 기분 좋게 아팠어요. 아저씨도 그렇게 아파본 적이 있나요?” 이때 앤에 대한 소설 속 묘사는 이렇죠. ‘그 아름다운 풍경에 아이는 갑자기 벙어리가 되어 버린 듯했다. 마차 의자에 기대앉아, 야윈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쥐고는 고개를 들어 눈부시게 하얀 꽃들을 넋이 나간 듯 바라보았다.’ 매슈에게는 그저 평범한 일상 속의 평범한 길이지만, 고아원을 나와 새로운 집에서 살게 된 앤에게는 모든 게 새롭게 빛나요. 앤의 풍부한 상상력이 넘치는 이 아름다운 장면에선 그의 시선을 통해 평범했던 길이 특별한 길로 변해 가는 마법을 느낄 수 있답니다.
최현미 / 마릴라
『빨강머리 앤』은 누구나 아는 명작인 만큼 아름다운 장면들이 참 많지만, 개인적으론 매슈의 장례식을 치른 후 앨런 부인과 앤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정말 좋은 말이라 두 사람의 대화를 그대로 옮깁니다. “아저씨가 너무 그리워요. 언제나. 그런데, 앨런 부인, 그래도 세상과 삶은 제게 몹시 아름답고 흥미로워 보여요. 오늘 다이애나가 뭔가 우스운 얘기를 했는데, 제가 깔깔 웃고 있더라고요. 그 일이 일어났을 때는 다시는 소리 내어 웃지 못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생전에 매슈 씨는 네가 웃는 걸 좋아했고 네가 주위의 즐거운 것들을 보고 즐거워하기를 바라셨어. 지금은 그냥 조금 멀리 계실 뿐이야. 전과 다름없이 지금도 좋아하신단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치유의 힘에 우리 마음을 닫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송영미 / 앤1
저희 공연에서 정말 사랑하는 장면이 있어요. 바로 매슈 아저씨가 앤에게 초록 지붕 집에서 함께 살자고 하는 장면이죠. 원래 매슈 아저씨와 마릴라 부인은 농사일을 도울 사내아이를 입양할 예정이었는데, 중간에 착오가 생겨서 앤이 아저씨네로 오게 되거든요. 하지만 다행히도 매슈 아저씨가 앤을 고아원으로 돌려보내지 않기로 결정하죠. “앤, 널 여기에 두기로 결정했단다. 초록 지붕 집에 두기로 결정했단다. 교육도 시키고 일도 가르칠 거다. 좋은 아이가 되도록 널 도와줄 테다. 착한 아이가 되겠다고 마릴라에게 약속해 주렴.” 무대 위에서 매슈 아저씨의 이 말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행복한지 몰라요. 어딜 가든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였던 앤에게 처음으로 가족과 집이 생기는 순간이니까요. 매회 가슴 벅찬 감동을 느낀답니다.
임소윤 / 앤1
“앨리자가 말했어요. 세상은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는 건 정말 멋지네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나는걸요.” 저는 앤의 이 대사를 가장 좋아해요. 보통은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단 생각에 앞날을 걱정하기 마련인데, 앤처럼 생각을 조금만 달리 해보면 미래를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는 거잖아요. 저는 특히 쓸데없는 걱정이 많은 편이었던 터라 앤의 대사에 많은 용기를 얻었어요. 저희 작품 엔딩곡 ‘저 길 모퉁이’란 곡이 이 대사와 참 닮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부를 때마다 항상 마음이 따뜻해져요. 제가 느꼈던 감동을 관객분들과 나눌 수 있는 노래라서 더욱 특별하게 느껴지죠.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공연 동안 많은 분들이 극장에 오셔서 저처럼 용기를 얻고 돌아가셨으면 좋겠어요.
신혜지 / 앤2
소설 『빨강 머리 앤』에서 가장 마음에 남은 장면은 앤이 단짝 친구 다이애나랑 생이별을 할 때예요. 앤 때문에 화가 난 다이애나의 엄마가 둘을 어울리지 못하게 하거든요. 다이애나가 작별 인사로 너만큼 사랑한 친구는 다신 못 만날 거란 이야기를 하는데, 그 말에 앤은 엄청난 감동을 받아요.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사랑받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사랑해 줄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면서요. “다이애나, 너 정말 나를 사랑하니? 물론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어. 하지만 날 사랑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 이 얼마나 멋진 일이니!”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깨닫게 된 앤의 기쁨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데, 동시에 그런 친구를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이 함께 느껴지는 장면이랍니다.
임찬민 / 앤3
“난 나 자신 외에는 어떤 사람도 되고 싶지 않아. 난 진주 목걸이를 한 초록 지붕 집의 앤으로 아주 만족해. 매슈 아저씨가 분홍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보석보다 훨씬 더 귀한 사랑을 이 진주 목걸이에 담아주셨다는 걸 난 알거든.” 이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앤의 대사인데, 저희 작품 <앤ANNE>에도 이 말이 나와요. 많은 관객분들이 좋아해 주시는 대사죠. 저는 무엇보다 첫 문장 때문에 이 대사를 좋아하게 됐는데, 제가 무대 위에서 앤3으로 존재할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말이랍니다. 앤은 스스로를 소중히 여길 줄 알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마음도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내가 내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아껴줘야 한다는 것, 제가 책 속의 앤으로부터 배운 교훈이죠.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2호 2018년 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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