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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SPOTLIGHT] <시스터 액트> 김소향 [NO.171]

글 |안세영 사진 |김호근 2017-12-22 5,853

용기 있는 한 걸음


한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활약 중인 뮤지컬 배우, 김소향. 2013년 브로드웨이에서 <미스 사이공>의 지지와 킴 역을 맡아 화제가 된 그가 이번에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시스터 액트>의 아시아 투어 공연에 참여했다. 그가 맡은 역할은 동명 원작 영화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한 견습 수녀 메리 로버트. 이 작품에서 동양인이 주역을 따낸 건 김소향이 최초다. 지난 5월 투어를 시작해 12월 한국 공연을 앞둔 그에게 소감을 들었다.




첫 동양인 시스터의 탄생


<시스터 액트>에 캐스팅된 걸 축하해요. 싱가포르, 필리핀, 일본에서 투어 공연을 마친 소감이 어때요?
행복했어요. 이전에 출연한 <킹 앤 아이>, <미스 사이공>과 달리 <시스터 액트>는 동양인이 주연을 맡은 적이 없는 작품이잖아요. 게다가 아시아 투어 공연에서, 어찌 보면 아시아 대표로 무대에 서는 거니까 더 자랑스럽죠. 관객분들도 절 보며 자부심을 느끼는 것 같아 기뻐요. 투어 공연을 다니면서 절 보고 세계적인 배우의 꿈을 꾸게 됐다는 관객의 메시지를 많이 받았거든요. 커튼콜 때도 주인공 못지않게 큰 박수를 받았고요. 특히 처음 공연했던 싱가포르에서는 모든 프레스 인터뷰가 제게 집중될 만큼 관심이 대단했어요. 동료 배우들이 ‘너 아시아에서 유명한 스타야?’라고 물어볼 정도로요. (웃음)


동양인이 수녀로 캐스팅된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어떻게 오디션에 도전할 마음을 먹었어요?
처음에는 엄두도 못 냈죠. 그런데 소속사 대표님께서 ‘그래도 아시아 투어니까 한번 오디션을 보는 게 어떠냐’ 권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앙상블과 메리 로버트 커버 오디션을 본 거예요. 노래부터 영어 발음까지 엄청 독하게 준비했어요. 심지어 한국에서 수녀복같이 생긴 원피스를 공수해 오디션장에 입고 갔죠. 뜻밖의 동양인 배우가 수녀복까지 입고 들어오니 심사위원도 관심을 갖더라고요. 결국 3차에 걸친 오디션 끝에 메리 로버트 역을 따냈어요.


오디션장에 다른 동양인은 없었나요?
저 혼자였어요. 이 작품에는 흑인과 백인에 대한 조크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동양인이 끼는 걸 상상하기 힘들어요. 더러 한국 공연 때문에 제가 캐스팅됐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신데, 절대 아니에요. 오디션을 볼 때만 해도 한국행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어요. 동료 배우들도 처음에는 제가 메리 로버트 역에 캐스팅 된 걸 의아하게 여겼죠. 그런데 리허설을 마치고 나니 ‘메리 역을 동양인이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게 없구나’ 하더라고요. 오히려 백인보다 잘 어울린다는 말도 들었고요.


왜 소향 씨가 메리 로버트 역에 어울린다고 생각했을까요?
메리는 수녀원의 규칙에 순종하는 수줍고 얌전한 캐릭터예요.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란 저는 그런 캐릭터를 쉽게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죠. 또 제가 영어 실력이 부족하다보니 평소 말수가 적고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런 모습이 미국인 눈에는 딱 메리답게 보인 거예요. 하지만 노래를 시작하면 한국인 특유의 파워풀함이 나오잖아요. 동료들이 ‘너는 몸집도 작은데 어디서 그런 성량이 나오냐’라며 놀라더라고요. 메리도 극 후반부에 가면 용기 있게 친구들을 대변해 목소리를 내기 때문에 저와 캐릭터가 잘 맞아요.


메리 로버트는 오디션에서 특히 경쟁률이 높은 역할이라면서요?
사랑스럽고 용기 있는 메리는 미국의 백인 여배우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역할이에요. 특히 메리의 솔로곡 ‘The Life I Never Led’는 배우들 연습곡으로 인기가 많아요. 마치 한국에서 <레베카>의 ‘Rebecca’나 <지킬 앤 하이드>의 ‘Someone Like You’처럼요. 아시아 투어가 아니었다면 제가 뽑히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만큼 제게 주어진 기회에 감사드리죠.


원작 영화를 기억하고 극장에 오는 관객이 많을 텐데, 뮤지컬만의 매력 요소는 뭔가요?
뮤지컬에는 영화와 같은 노래가 하나도 없어요. 영화의 노래를 좋아했다면 이 점이 아쉬우시겠죠. 한국 제작사인 EMK뮤지컬컴퍼니는 영화 삽입곡인 ‘I'll Follow Him’을 커튼콜에라도 집어넣어야 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대요. 하지만 직접 공연을 보고 나니 그럴 필요 없다는 확신이 섰대요. 그만큼 음악이 좋고 귀에 맴돌아요. 디즈니 애니메이션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에 참여한 거장 작곡가 알란 멘켄의 곡이니 말 다 했죠. 신나는 디스코 노래가 많고, 흑인의 소울과 백인의 팝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아요.





미국 무대를 노크하다


한국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다가 2010년 돌연 미국 유학을 결심한 이유가 궁금해요.
2010년은 제가 한창 슬럼프에 빠져 있던 때예요. 저는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진 않지만, 훌륭한 배우라는 인정은 꼭 받고 싶거든요. 근데 제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봤을 때 이대로는 그러지 못할 것 같더라고요. 계속 비슷한 역할만 맡는 것 같아 고민이 많았어요. 그러던 차에 친언니가 있는 미국에 갔다가 뉴욕필름아카데미 광고를 본 거죠.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실력을 키우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비싼 학비에 망설이기도 했지만, 포트폴리오에 한국에서의 경력을 어필하고, 춤·노래·연기 영상을 찍어 보낸 결과 장학생으로 합격했죠.


떠난다고 했을 때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모두 말렸죠. 영어도 못하고 나이도 적지 않은 제가 한국에서 잊혀질 위험을 감수하고 미국으로 떠난다니까. 하지만 미국에서의 공부가 제겐 큰 도움이 됐어요. 특히 뮤지컬의 역사를 아는 게 작품의 색깔이나 노래 스타일 파악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걸 깨달았어요.


미국에서 배우 생활을 하면서 힘든 점도 많았을 텐데요.
실기 과정을 마치고 미국에서 합법적으로 일할 수 있는 비자를 받아 오디션을 보러 다녔어요. 그 기간이 말도 못하게 힘들었죠. 춤, 노래 다 합격하면 뭐해요. 영어로 대본만 읽으면 떨어지는데! 인종 제약도 느꼈어요. 동양인이 오디션을 볼 수 있는 작품 자체가 드무니까요. 2013년 <미스 사이공>의 지지 역을 맡기 전까진 힘든 시간이 계속됐어요. 다행히 지지 역으로 캐스팅되어 배우 노조(AEA, Actors' Equity Association)에도 가입할 수 있었죠.


브로드웨이에서는 배우 노조의 힘이 막강하다던데, 가입하려면 뭘 해야 해요?
노조와 협의된 프로덕션에서 50주 이상 일해야 해요. 그런데 노조 소속이 아닌 배우는 이런 작품의 오디션을 보는 것 자체가 힘들어요. 무조건 노조 소속 배우 먼저 오디션을 보게 돼 있거든요. 비노조 배우는 오디션 당일 현장에서 명단에 이름을 적고 대기해요. 노조 배우의 오디션이 다 끝나면 남는 시간에 명단에 있는 비노조 배우가 오디션을 보죠. 비노조 배우일 때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기다리고도 오디션조차 못 보고 울면서 돌아오기 일쑤였어요. 그런데 <미스 사이공>은 동양인 배우 위주로 캐스팅하잖아요. 동양인은 노조 배우가 다 오디션을 봐도 시간이 남거든요. 그러니 비노조 배우인 저도 오디션을 볼 수 있었던 거죠. 제가 <미스 사이공>에 캐스팅되어 노조까지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이 작품이 아시아 배경 뮤지컬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예요.



지원자의 인종을 모른 채 오디션을 보는 ‘컬러 블라인드 오디션’이 있다는 말도 들었는데요.
솔직히 그건 말뿐인 것 같아요. 제 주위에는 그런 오디션 봤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걸요. 하지만 인종의 벽을 부숴야 한다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점점 더 많은 작품이 ‘우리는 인종에 상관없이 캐스팅한다’고 공표하고 있어요. <해밀턴>은 아예 ‘논-화이트’만 뽑는다고 공표했죠. 거기서도 동양인 배우는 아시안 아메리칸인 필리파 수 하나뿐이었는데, 최근 남자 동양인 하나가 앙상블로 뽑혀서 아시안 배우 커뮤니티에 난리가 났어요. 이렇게 한 번 벽이 뚫리면 다음부터는 다른 동양인도 같은 작품에 도전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시스터 액트>에 캐스팅됐을 때도 마찬가지로 함께 기뻐해 줬죠.


그동안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활동했는데, 앞으로 계획은 어떻게 돼요?
미국 활동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앞으로 일이 년은 한국에서 활동하고 싶어요. 미국에서 지지고 볶다 보니, 우리나라에서 우리말로 공연하고픈 마음이 간절해지더라고요. 지금 <더 라스트 키스>를 연습하고 있는데 사소한 말장난까지 다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게 너무 행복해요. 그리고 한국에서는 나이를 먹으면 맡을 수 있는 역할이 적어지잖아요. 미국은 배우의 나이를 묻지 않거든요. 한번은 동료 배우가 제게 어린 역을 추천하기에 ‘나 나이 많아서 그거 못해’라고 대답했더니 ‘야, 나이는 그냥 숫자지’ 그러더라고요. 그들에겐 그게 거짓말이 아닌 거예요. 더욱이 미국에서는 저를 실제 나이보다 한참 어리게 보는 경향이 있어서 (웃음) 얼마든지 나이에 구애받지 않고 배역을 맡을 수 있어요.


배우 생활이 힘들어질 때면 어떤 생각을 떠올리나요?
미국에서 오디션을 보는 족족 떨어졌을 때, ‘뮤지컬은 내 길이 아닌가, 그만둬야 하나’라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다시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서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과 역할을 만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고요. 근데 계속 이를 갈고 준비하다 보니 기회가 생기더라고요. 나 자신을 믿고 나아가니까 두드릴 문이 보였어요. 이제는 웬만한 일로 좌절하지 않아요. 흔들리지 않아요. 제가 이 직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아니까요. 하고 싶은 일에 얼마나 구체적으로 다가가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고 믿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71호 2017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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