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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PEOPLE]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정인지 [NO.170]

글 |안세영 사진 |심주호 2017-12-05 7,820

견고한 시선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안타까운 사랑을 그린 창작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무대로 돌아온다. 백석과 이별 후 국내 3대 요정 중 하나인 ‘대원각’의 주인이 되었으나, 말년에 그 대원각을 법정 스님에게 시주하고 ‘천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하다’는 말을 남긴 자야 김영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자야의 시선으로 애틋한 사랑의 추억을 돌아보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순정을 비극적이거나 희생적으로 그리지는 않는다. 그 아슬아슬한 균형의 축에는 트라이아웃과 초연을 거치며 단단한 캐릭터를 쌓아올린 정인지가 있다.





“자야는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에요”


근 1년 만의 재연이네요. 초연이 관객과 평단의 사랑을 받고 시상식을 휩쓸었던 만큼 감회가 새로울 것 같아요.
초연이 정말 큰 사랑을 받아서 깜짝 놀랐어요. 왜냐면 저희 작품에는 자극적인 소재가 없잖아요. 어쩌면 밍숭맹숭할 만큼 담담한 분위기에, 노래는 백석의 시로 이루어져 있죠. 사랑한다고 직접 말하는 대신 함축적인 가사와 대사로 감정을 전달해요. 심지어 말맛을 살리기 위해 센 발음도 조심해요. ‘어쩔 수 없는 슬픈 밤’을 ‘어절 수 없는’이라고 발음하고, ‘오랜만에 쏘주나 한잔’이 아니라 ‘소주나 한잔’이라고 발음하죠. 그래서 이게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걱정도 했어요. 그런데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 작품상까지 받았을 땐 눈물이 나더라고요. 관객으로부터 ‘이렇게 힘 실어줄 테니 앞으로 창작뮤지컬 잘 만들어달라’는 보증을 받은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 믿음을 얻었다고 생각하니 천군만마가 부럽지 않았죠.


지난해 초 트라이아웃 공연 때부터 자야 역을 맡아왔는데, 어떻게 이 작품에 참여하게 된 거예요?
이전에 다른 리딩 공연을 하며 알게 된 박해림 작가님과 채한울 작곡가님께 함께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공교롭게도 당시 <벽을 뚫는 남자>에 원캐스트로 출연을 앞두고 있어 참여가 어려운 상황이었는데, 두 분이 무려 4개월이나 공연 일정을 미루고 절 기다려주셨어요. 그 믿음 때문에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게다가 공연을 해보니 시를 노래하는 데서 오는 매력이 어마어마한 거예요. 트라이아웃이 끝나고 작품앓이를 엄청 했어요. 백석 평전을 읽고, 가사를 필사하고, 잘 때도 공연 녹음한 걸 들으면서 잠들 정도였죠. 


작품에 사용된 백석의 시 중 특히 좋아하는 건 무엇인가요?
‘흰밥과 가재미와 우린’이라는 넘버에 쓰인 ‘선우사’라는 시를 좋아해요. 극 중에서 백석과 자야가 가장 사랑할 때 부르는 노래죠. 특히 이번에 재연을 준비하면서 이 곡의 가사 하나하나가 마음에 파고들었어요. ‘미덥고 정다우니 서로 좋구나’, ‘이렇게 둘만 있으면 세상 같은 건 밖에 놔도 좋다’라는 가사를 읊다보면, 세상에 이런 사랑 노래가 또 있을까 싶어요.


백석과 자야의 실제 삶에 대해 조사하면서 인상 깊었던 점이 있나요?
백석 평전에서 그가 시를 쓰기 위해 통영부터 만주 벌판까지 돌아다니고, 기차를 타고 학생들과 시베리아로 수학여행을 갔다는 일화를 읽고 충격을 받았어요. 당대 사람들이 생각보다 훨씬 능동적이고 깨어 있는 삶을 살았다는 걸 알게 됐죠. 백석은 일본어, 영어는 물론 러시아어에도 능통했대요. 그럼에도 오롯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살린 시를 쓴 거예요. 저는 그가 자기만의 방법으로 일제에 저항했다고 봐요. 탄압과 제약 속에서도 자기 뜻대로 삶을 선택했다고요. 그리고 그건 자야도 마찬가지예요. 극에서는 ‘가난해서 기방에 팔려왔다’고 말하지만 그게 진심은 아닐 거예요. 기생이 된 건 자야 자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해요. 실제로 자야는 기생이 된 후 전통 가무의 명인을 찾아가 스승으로 모시기도 했대요. 당시의 기생은 예인이기도 했잖아요. 배움에 대한 열망과 목표가 있었던 사람이기에 문인인 백석과도 서로 통한 게 아닐까요.



마지막에 자야가 백석과 함께 떠나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것도 따라가는 걸 포기한 게 아니라 따라가지 않는 걸 선택했다고 생각해요. 백석이 유부남이고 자기보다 가방끈이 길어서 차마 따라가지 못한 건 아니었을 거예요. 지금이야 부인 있는 남자를 사랑하는 기생이 비극적으로 느껴지지만, 당시에는 부모의 강요로 서로 얼굴도 모른 채 결혼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잖아요. 자야도 그런 백석을 크게 원망하진 않았을 것 같아요. 백석을 따라가지 않은 건 ‘당신에겐 당신의 인생이 있고, 나에겐 나의 인생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거예요. 물론 그게 영원히 이별이 될 거라곤 꿈에도 몰랐겠지만요.


연기에도 그런 해석이 잘 묻어난 것 같아요. 자야를 너무 희생적이거나 비극적인 인물로 표현하지 않은 점이 좋았는데, 연기하면서 감정을 절제하는 게 힘들지는 않나요?
맞아요, 그게 참 어려워요. 자야는 백석을 위해 자기 삶을 포기한 비련의 여주인공이 아니에요. 오히려 저는 그녀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천하를 호령했을 장군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하지만 사랑 앞에서는 소녀같이 순수한 면도 있기에 너무 강하게만 표현할 순 없죠. 또 아무리 냉정해지자 다짐을 하고 무대에 올라도 연기를 시작하면 마음이 아파 눈물을 참기 힘들 때가 많아요. 오죽하면 공연 때마다 ‘자야님이 찾아오시나’라는 생각도 한다니까요.


자야가 기부를 하면서 남긴 ‘천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하다’는 말이 유명하잖아요. 자야에게 백석의 시는 어떤 의미였다고 생각해요?
그녀가 잡고 있던 마지막 끈. 이것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에게서 등을 돌리지 않고, 나를 떠나지도 않는다고 믿을 수 있는 무언가. 하지만 말년에 자야가 『내 사랑 백석』을 출간하면서 ‘내가 나타샤다’라고 말했을 때, 당대 문인들은 엄청 비웃었겠죠. ‘웃기지 마, 그 시 받은 여자 한둘이 아냐!’ 그런 말을 들은 자야는 ‘이것마저 내 것이 아니었나’라는 생각에 굉장히 상처받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어느 순간 마음을 바꿨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나타샤가 내가 아니면 어때. 어쨌든 이 시가 그동안 날 지켜준 건 사실이잖아. 나에게 이게 있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 없지.’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법정 스님한테 천억을 내놓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재연에는 백석 역에 다섯 명의 배우가 출연하는데, 호흡을 맞출 때 어떤 차이가 있나요?
천차만별이죠. 저는 강필석, 오종혁, 진태화 백석하고 무대에 서지만, 연습실에서 고상호, 김경수 백석의 연기도 지켜봤거든요. 제가 느끼기에 다섯 백석은 각각 노련하고, 깨끗하고, 귀엽고, 찐하고, 깔끔해요! 누가 누군지는 얘기하지 않겠어요. 맞춰보세요!





“결국 연기가 하고 싶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드라마로 연기 생활을 시작했는데, 뮤지컬 무대에 뛰어든 이유는 뭔가요?
원래 예중을 다니면서 성악을 전공했어요. 무대에서 표현력을 기르고 싶어 연기 학원에 들어갔다가 방송 오디션을 보게 됐죠. 1997년 청소년 드라마로 데뷔해 드라마 <학교4>, 영화 <동갑내기 과외하기> 등에 출연했어요. 이후 경희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할 때까지만 해도 뮤지컬을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우연히 제가 존경하는 박근형 연출님 작품의 오디션이 뜬 걸 보고 지원했는데, 그게 뮤지컬 <위대한 캣츠비> 초연이었죠. 그때 제가 뮤지컬을 얼마나 몰랐냐면 글쎄, 오디션에서 트로트 ‘찰랑찰랑’을 불렀다니까요. (웃음) 뮤지컬은 한국말로 의미를 전달하며 노래해야 한다는 점에서 성악과는 전혀 달랐어요. 공연하면서 혼도 많이 나고 힘들었지만 그만큼 배워가는 재미와 성취감이 있었죠.


이후 <그리스> 등에서 주연을 맡았지만 2010년부터 4년 가까운 휴식기를 가졌어요.
그때쯤 돈을 벌기 위한 연기를 계속하고 있다는 회의감이 찾아왔어요. 또 배우도 하나의 직업인데, 연기에 매여서 무대 밖에 있는 진짜 내 삶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때마침 2010년 당시 출연하고 있던 공연이 갑자기 막을 내렸어요. 출연료도 못 받고 일방적으로 공연 중단 통보를 받고 나니, 진짜 그만둬야겠다 싶더라고요. 전화번호도 바꾸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어요.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계속 연기에 대한 갈망이 남아 있었나 봐요. 직장을 다니면서 틈틈이 애니메이션 더빙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이게 너무 재밌는 거예요. 결국 연기가 다시 하고 싶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죠. 복귀하기까지 과정도 험난했지만, 이 시기를 거치면서 어떤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조바심이 사라지고 여유가 생겼어요. 


최근 공연 외의 관심사는 뭐예요?
저는 요즘 저한테 관심이 많아요. 이때까지는 남들이 보는 나한테만 관심이 많았더라고요. 내가 진짜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할 때 행복한지 찾아가고 있는 중이에요. 거창하게 들리지만 실은 아주 사소한 거예요. 예를 들면 전 이런 걸 알게 됐어요. 아, 나는 계란을 먹을 때 반숙과 완숙 사이를 좋아하는구나! (웃음) 30여 년 동안 남이 주는 대로 먹거나 남들이 먹자는 걸 따라 먹거나 했지 한 번도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려고 한 적이 없었거든요. 요즘은 저한테 수시로 물어봐 주고 있어요. ‘넌 어떻게 하고 싶어?’라고.


앞으로 어떤 뮤지컬에 출연하고 싶어요?
백석과 자야에 대해 조사하다보니 우리 근현대사에 멋진 여성들이 참 많더라고요. 그들이 시대를 초월해서 만나는 뮤지컬을 만들어봐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자야와 <사의 찬미>의 윤심덕과 <명동로망스>의 전혜린이 만나서 각자의 연애사를 공유하는 거죠! 중간에 잠깐 백석이랑 김우진도 등장하고! (웃음) 공연계에 멋진 여배우가 얼마나 많아요. 이번 자야 역 배우들만 해도 다들 역할을 위해 피 튀기는 분석을 하거든요. 그런 여배우를 한데 모을 수 있는 이야기, 여성이 사랑을 위해 희생하는 게 아니라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기 인생을 선택하는 이야기가 많아지면 좋겠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9호 2017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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