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의 호수> 김기민
운명의 무게에 지지 않는 법
지난 2011년 무용계를 돌아봤을 때, 그해 최고의 사건은 누가 뭐래도 이제 막 스무 살을 넘긴 김기민의 마린스키 발레단 입단 소식일 것이다. 세계 발레 역사에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정상급 단체이자,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부설 학교인 바가노바 아카데미 졸업생에게만 오디션 응시 자격을 주었던 폐쇄적인 곳에서 한국에서 나고 자란 동양인 무용수를 처음으로 받아들였다는 소식에 뜨거운 관심이 쏟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입단 이후의 인터뷰에서 “마린스키에 입단한 것만으론 만족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던 당찬 청춘은 입단 4년 만에 수석 무용수의 자리에 오르며 다시 한 번 동양인 무용수의 역사를 새로 썼다. 여전히 더 높은 곳을 꿈꾸는 무서운 청춘. 김기민, 그가 클래식 발레의 모든 것이 담긴 정수 <백조의 호수> 내한 공연으로 오랜만에 고국 무대에 선다.
*이 인터뷰는 서면으로 진행됐습니다.
단숨에 이뤄낸 놀라운 성취
마린스키 발레단에 입단한 지 어느덧 5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처음 입단하던 때와 비교해 보면 무엇이 가장 달라진 것 같습니까.
지난 2011년 11월 마린스키에 입단했으니까 곧 있으면 입단한 지 벌써 6년이 다 되어갑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가 스무 살이었는데, 한국 나이로 벌써 스물여섯…. 오랜 시간 이곳에서 많은 것을 느낀 만큼 제 춤의 색깔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섬세한 표현을 중요시하는 마린스키 스타일에 완전히 녹아들어 갔다고 할까요. 지금 이 시기의 저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마린스키 스타일에 녹아든 김기민이, 김기민 자신만의 색깔을 찾아가는 시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입단한 지 두 달 만에 주역을 따내고, 또 입단 4년 만에 어린 나이에 이례적으로 수석 무용수 자리에 승급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수 있었다고 생각하나요?
마린스키에서 수석 무용수로 발탁되는 것은 매우 까다롭고 어려운 일입니다. 수석 무용수가 되기 위해서는 당연히 춤을 잘 추어야겠지만, 다양한 레퍼토리를 경험했다고 해서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짧은 기간에 이런 성취를 이룬 것은 저 스스로도 대단한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스무 편 넘는 작품과 2백 회 이상의 갈라 공연, 다양한 해외 초청 공연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 아마 단장님이 그만큼 저를 신뢰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발레 종주국 러시아의 역사적인 발레단에서 경쟁하기 위해서는 그들과 다른 경쟁력이 필요했을 텐데요. 스스로는 그게 뭐라고 생각하는지요.
마린스키에는 3백여 명의 단원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 훌륭한 무용수들도 대단히 많고요. 따라서 동양인인 제가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선 무엇 하나가 달라야 한다기보다 모든 면에서 더 뛰어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조금 더 잘하는 것으론 부족하고, 무시무시할 만큼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이 오늘의 저를 만든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춤의 본질은 국경과 상관없이 하나라는 점입니다.
입단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영국의 일간지 <인디펜던트>로부터 “길고 우아한 라인과 따뜻한 존재감으로 마린스키를 흥분시키는 신인”이라는 평가를 얻었습니다. 이후에도 여러 유명 매체에서 숱한 찬사를 받았는데, 지금까지 리뷰 중 특별히 기억나는 게 있나요?
<인디펜던트> 리뷰는 저도 본 기억이 납니다. 그 외에 뉴욕이나 런던, 파리 등 대도시에서 해외 투어 공연을 했을 때 좋은 리뷰가 나왔던 것 같습니다. 작년에 브누아 드 라 당스에서 상을 받았을 때도 많은 매체에서 주목해 주었고요. 물론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은 언제나 기분 좋은 일입니다. 중요한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제가 기억하는 특별한 순간은 언젠가 마린스키 극장에서 공연을 마치고 나왔을 때, 극장 입구에서 저를 기다려주신 나이 지긋한 관객분이 제 손을 꼭 붙잡고 한동안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리셨던 것입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마린스키 발레단 소속으로 지난 6년 동안 한 레퍼토리 중에서 가장 좋았던 작품은 뭔가요? 그리고 특별히 호흡이 잘 맞는 파트너가 있나요?
마린스키의 모든 작품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몇 작품을 골라야 한다면, <라 바야데르>와 <로미오와 줄리엣>을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로미오와 줄리엣>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발레 음악 작품이라 그런지 애착이 많이 갑니다. 개인적으로 특별한 파트너는 아무래도 제 데뷔 무대를 함께해 준 빅토리아 테레시키나입니다. 테레시키나는 지금까지 가장 많은 작품을 같이한 무용수이기도 해서 함께하면 매우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물론 마린스키의 다른 발레리나들도 제게는 모두 뛰어난 파트너입니다. 울리아나 로파트키나, 디아나 비쉬네바, 옥사나 시코릭, 알리나 소모바 등 다들 어디 하나 흠 잡을 데 없는 최고의 무용수들이죠.
지금까지 활동하면서 러시아 발레의 어떤 점을 더욱 사랑하게 됐나요?
발레 역사에 큰 영향력을 끼친 많은 무용가들이 이곳 마린스키에서 활동했습니다. 아그리피나 바가노바, 마리우스 프티파, 미하일 포킨, 바츨라프 니진스키 같은 전설의 무용수들이 다 이곳을 거쳐갔죠. 때문에 발레단 구석구석에서 그들이 흘린 땀의 의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전 춤을 추면서 항상 그분들을 생각합니다. 그들이 남긴 예술적 영감을 느끼려고 노력하죠. 그동안 세계 유수의 발레단에서 이적 제의를 받았지만, 저는 마린스키가 좋습니다. 다른 어떠한 발레단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을 마린스키는 지니고 있습니다.
스스로 만든 자부심
발레 또한 궁극적으로는 감정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예술인 만큼 다양한 경험이 많아야 할 텐데, 최근에 자신을 확장시켜준 경험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공연 연습이 끝나면 걸어서 집으로 돌아갑니다. 마린스키의 많은 예술가들이 걸었던 그 길을 오늘의 제가 걷고 있는 겁니다. 길을 걸으면서 앞선 예술가들의 흔적을 느낍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것을 생각해 보려 하고요. 그리고 음악을 많이 듣습니다. 제 자신을 확장하는 일은 결코 단시간에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들이 무대에서 표출된다고 믿습니다.
과거에는 모던 발레보다 클래식 발레를 더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여전히 같은 생각인가요? 만약 그렇다면, 정확한 테크닉을 정답처럼 보여줘야 하는 클래식 발레를 더 좋아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마린스키는 클래식 발레 레퍼토리뿐 아니라 다양한 모던 발레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데, 전 아직도 클래식 발레를 더 좋아합니다. 아무래도 클래식 발레가 체력적으로 더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기 때문에 젊어서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랄까요. 아무튼 클래식 발레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편입니다.
이번 내한 공연의 파트너인 빅토리아 테레시키나와는 이전에도 국내에서 같은 작품으로 호흡을 맞춘 바 있죠. 테레시키나는 마린스키 입단 16년 차인 선배이기도 한데, 파트너로서 그녀는 어떤 무용수인가요?
매우 훌륭한 발레리나입니다. 테레시키나의 섬세한 표현력이나 강렬한 카리스마는 누구도 쫓아갈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이거든요. 모든 남성 무용수들이 그녀와 춤추는 걸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더욱 존경스러운 이유는 최고의 발레리나임에도 불구하고 평상시엔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예의 바른 사람이라는 점입니다. 인성 또한 최고죠. 테레시키나와는 <라 바야데르>나 <지젤>, <돈키호테> 등 무수한 클래식 발레 작품을 수십 차례 함께했는데, 함께 춤을 출 때마다 항상 배울 점을 느낍니다.
오랜만에 한국 관객들과 만남을 앞두고 있는 소감은 어떤가요?
실로 오랜만에 고국 무대에 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무척 흥분되는데, 조금은 두렵기까지 합니다. 사실 한국 발레 관객들 가운데 제 춤을 직접 보신 분은 많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마린스키에서 활동하면서 가끔 한국 기자분들과 인터뷰하게 될 때가 있는데, 기자분들께 혹시 제 춤을 직접 보신 적이 있는지 여쭤보면 거의 없다고 하셨거든요. 아무래도 한국에서 활동한 기간이 길지 않다 보니 제 춤을 보여드릴 기회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영상을 통해 제 춤을 보신 분들도 있을 텐데, 실제로 보는 것과 영상으로 보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무대에서 꼭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계획입니다. 왜 김기민인지. 김기민이 표현하는 <백조의 호수>는 어떻게 다른지 보여드릴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9호 2017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