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의 확장을 위한 실험
한국예술종학학교 연극원 연출과 졸업. 2007년 초연해 대학로 스테디셀러의 자리를 지켜온 연극 <모범생들> 연출로 이름을 알렸다. 2012년 뮤지컬 <브루클린>을 시작으로 연극과 뮤지컬을 오가며 활동하기 시작했다. 특히 무대의 경계를 확장하고 관객 참여를 이끌어내는 독특한 형식의 공연으로 주목받았다. 관객이 극장 곳곳을 돌아다니며 게임을 하듯 공연에 참여하는 ‘씨어터 RPG’ 시리즈, 호텔방이나 벙커처럼 꾸며진 좁은 공간에서 세 가지 에피소드를 번갈아 공연하는 ‘트릴로지’ 시리즈, 관객 참여로 이루어지는 즉흥뮤지컬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며 관람하는 카바레 쇼 형식의 1인 뮤지컬 <미 온 더 송> 등 실험적인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이 밖에도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한밤중에 개에게 일어난 의문의 사건>과 뮤지컬 <로기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등을 연출했다.
카이스트 출신 공학도에서 연출가 길로 들어선 이력이 특이하다.
성적이 좋아서 과학고와 카이스트에 진학했지만, 뒤늦게 내가 하는 공부가 진짜 좋아하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카이스트 3학년 때 산업 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꿔보기도 했으나 역시 잘 맞지 않았다. 전자 공학이든 산업 디자인이든 내 부족한 재능으로는 졸업하고 기업에 취직해 팔릴 만한 물건을 만들거나 포장하는 일밖에 못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고민을 안고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내가 공부 외에 가장 열심히 한 일은 연극 동아리 활동이라는 걸 깨달았다. 취미일 뿐이었던 연극을 업으로 삼겠다고 마음먹은 건 ‘연극의 이해’라는 교양 수업에서 브레히트를 접하고 나서다. 브레히트는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해설자를 등장시켜 감정적인 카타르시스 대신 이성적인 사고를 불러일으키는 연극을 만들었다. 그는 관객이 공연을 보는 동안 현실을 잊게 만드는 연극이 아니라 관객이 극장을 나서면서 혁명을 일으키게 만드는 연극을 꿈꿨다. 당시 나는 그 생각에 큰 충격을 받았다. 연극이 사회에 목소리를 내는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본격적으로 연극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들어간 것도 다 그때의 깨달음 덕분이다. 그렇다고 공학도로서 보낸 시간이 낭비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때 익힌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태도는 오히려 연출하면서 훨씬 요긴하게 써먹고 있으니까.
교본으로 삼는 작품이나 롤모델이 있나?
앞서 말한 브레히트의 작품을 자주 읽는다. 한예종 연극원 초대 원장님이셨던 김우옥 선생님께도 큰 영향을 받았다. 합리적인 사고방식, 타인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 모든 장면을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집요함 등 지금 내가 연출의 지표로 삼고 있는 많은 부분을 배웠다. 이상우 선생님과 돌아가신 김동현 선생님도 존경하는 연출이다.
연출로서 전환점이 된 작품을 꼽는다면?
제일 중요한 작품은 역시 <모범생들>이다. 2007년, 2009년 <모범생들>이 호평을 받으면서 작품 의뢰가 많이 들어왔다. 또 2010년
<옥탑방 고양이>는 나를 본격적인 상업 프로덕션의 세계로 이끈 징검다리가 됐다. 첫 뮤지컬 연출작이자 지금의 아내(배우 이영미)를 만나게 해준 <브루클린>, 첫 대극장 뮤지컬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도 중요한 작품이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배우에게 극 중 인물로서 일기를 써오게 했다고 들었다.
다른 작품에서도 종종 내주는 숙제다. 극 중 인물로서 이 공연 안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날의 일기를 써올 것. 배우가 인물의 내면에 깊이 파고들게 만드는 나만의 방법이다. 그렇게 써온 걸 연습실에서 읽기도 하고 프로그램 북에 싣기도 한다.
실험적인 공간 활용과 관객 참여가 돋보이는 공연은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2007년 데뷔 무렵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커피 플레이>라는 공연을 했다. 카페 테이블 하나에 배우가 앉고 관객이 그 주변에 둘러앉아 음료를 마시며 관람하는 공연이었다. 그렇게 연출한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무대와 객석이 아닌 일상적인 공간에서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고 싶었고, 또 하나는 극장 대관료보다 카페 대관료가 쌌기 때문이다. 당시 그 공연을 본 아르코예술극장 예술감독 최용훈 연출님 덕분에, 2012년 마로니에 축제 때 대학로 예술극장에서 <커피 플레이>를 재공연할 수 있었다. 이후 대학로 예술극장에서 카페 대신 백스테이지, 분장실 등 극장 전체를 무대로 한 공연을 만들어보자는 제안을 받고 ‘씨어터 RPG’ 시리즈를 만들었다. 일련의 과정 속에서 전형적인 프로시니엄 무대를 벗어난 새로운 공연 형식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본 독특한 해외 공연들도 내게 영감을 줬다. <카포네 트릴로지>와 <벙커 트릴로지>는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공연을 보고 라이선스를 사와 각색한 작품이고, 즉흥 뮤지컬 <오늘 처음 만든 뮤지컬>과 카바레 쇼 형식의 뮤지컬 <미 온 더 송> 역시 에든버러 페스티벌에서 본 공연에서 영감을 얻었다.
연극에서 뮤지컬로 영역을 넓히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처음엔 뮤지컬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을 하다가 갑자기 노래를 하다니 너무 이상하지 않나. (웃음) 그러다가 처음으로 감동받은 뮤지컬이 <미스 사이공>이다. 무대 운용이나 송 모먼트가 정교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이희준 작가님께 배운 뮤지컬 넘버의 구조적 형식에 대한 수업도 나의 흥미를 자극했다. 더 이상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감정이 끓어올랐을 때 노래가 나와야 한다는 등 몇 가지 공식을 안 다음부터는 뮤지컬이 수학적이고 체계가 분명한 장르라는 생각이 들더라.
즉흥 뮤지컬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은 그러한 뮤지컬 공식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었다.
그렇다. 주인공이 모험을 떠나 난관을 겪고 무언가를 얻어 돌아온다는 원형적인 이야기에 아이엠송, 아이원트송, 쇼스타퍼 등 뮤지컬 넘버의 전형적인 흐름을 반영했다. 이는 전형적인 뮤지컬에 대한 탐색이기도 하고, 너무 전형적으로 짜인 뮤지컬에 대한 비아냥이기도 하다. 이 시대에는 뮤지컬의 성공 여부가 정해진 구조를 얼마나 영리하게 비트느냐에 달렸다.
앞으로 준비 중인 작품에는 무엇이 있나?
연말에 지이선 작가와 <룸스>라는 연극을 올린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2개의 방에서 2개의 공연이 동시에 진행되는 작품이다. 중간 중간 옆방에서 새어 나온 소리를 이용해 장면을 전개하기도 한다. 2부에는 관객이 방을 바꿔 들어가 실제로 옆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보게 된다. 구상 중인 작품도 몇 개 있다. 하나는 시위대 안에서 벌어지는 로맨스를 그린 대형 뮤지컬이다. <레 미제라블>, <빌리 엘리어트>처럼 지금 우리나라 전경과 시위대의 이야기로도 충분히 감동적인 뮤지컬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또 하나는 지리산 호랑이의 위엄이 무너져가는 이야기다. 사냥꾼이 산에 고기를 뿌려놓고 그 맛에 길들여져 사냥할 힘을 잃은 호랑이를 손쉽게 잡아간다는 내용의 동화를 어릴 적 읽은 기억이 있다. 그 이야기를 현대인의 직장 생활과 연결지어 풀어보고 싶다.
이제 10년 차 연출로서 지향점에 대한 고민이 있을 것 같다.
희한하게도 올해 참여한 작품 안에 하고 싶은 게 다 들어 있었다. 라이선스와 창작, 기존 대표작과 신작, 씨어터 RPG, 대극장 뮤지컬, 즉흥뮤지컬, 1인 뮤지컬 등등. 앞으로도 올해처럼 여러 형식의 다양한 레퍼토리를 쌓아가고 싶다. <미 온 더 송>으로 오랜만에 극작까지 경험했으니 이제 앞서 말한 소재로 내 작품을 써봐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몇 년간 할 일이 떨어지진 않을 것 같다. 누가 시켜주든 안 시켜주든 내겐 하고픈 일이 있으니까.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7호 2017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