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치지 않을
발걸음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대신 편지를 써주며 자신의 사랑을 조용하고 소중하게 지켜왔던 시라노. 그의 이야기를 그린 뮤지컬 <시라노>에는 또 다른 지고지순한 사랑이 있다. 시라노와 크리스티앙을 견제하는 허세와 자만심으로 가득찬 부대 지휘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시라노 못지않은 ‘순정남’ 드기슈의 사랑이다. 그는 록산을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전쟁터에 남고, 죽은 크리스티앙을 그리워하는 그녀의 곁을 긴 시간 지켜왔다. 단순히 악역이나 서브남이라는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인물인 드기슈. 훤칠한 키와 외모로 드기슈의 사랑을 이야기하는 주종혁을 만났다.
찰나의 순간
<시라노>를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단연 선배들이었어요. ‘좋다’는 말로도 표현이 모자라는 선배들이 계셨죠. 류정한, 홍광호, 김동완. 이름을 듣고서는 다른 건 생각할 필요도 없이 ‘해야지’라는 마음이 들었어요.
배우 류정한이 직접 프로듀서를 맡은 작품이죠. 직접 오디션 현장에 있었다던데요.
어우, 엄청 떨렸어요. (웃음) (류정한) 형은 살아 있는 레전드이니까요. 사실 <시라노> 식구들끼리도 이야기했는데, 작품을 함께하게 된 것 중 가장 큰 부분이 바로 시라노 형들(류정한, 홍광호, 김동완) 때문이었어요. 특히나 정한 형의 이름이 크게 다가왔죠.
배우며 스태프들 분위기가 정말 좋더라고요. 연습 기간이나 공연은 어떤 편이에요?
마치 가족 같아요. 전 얼마 전에 방송에 출연하느라고(주종혁은 최근 MBC <복면가왕>에 출연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노래를 불렀다.) 어쩔 수 없이 며칠 사라졌었어요. 보안상의 이유로 정확하게 어딜 가는지 설명할 수 없었거든요. 그런데 제 얼굴을 보는 사람마다 ‘피곤해 보여, 어디 아프니?’라고 다정한 말을 건네줬어요. 자신보다 서로를 생각해 주는 정말 엄청난 팀워크죠.
작품의 매력은 무엇인가요?
음…, 결핍이요.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하나씩 결핍을 가지고 있어요. 시라노는 코(외모)에 대한 결핍이 있고 크리스티앙은 언어 표현에 결핍이 있죠. 록산은 채워지지 않는 사랑에 결핍을 느껴요. 드기슈도 사랑하는 여자의 사랑을 얻지 못해요. 끝까지 그녀의 틈을 채울 수 없죠. 모든 사람은 저마다 결핍이 있잖아요. 그리고 누군가의 결핍을 보면서 위안을 느낄 수도 있죠. 이런 부분을 이야기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에요. 물론 시라노의 멋진 모습 그리고 부대원들이 모여서 내는 전체적인 분위기도 상당히 좋죠.
드기슈라는 캐릭터를 접했을 때, 첫인상은 어땠나요?
처음엔 엄청나게 기대했어요. 왜냐면 특수 분장을 할 거라 생각했거든요. 개인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원작의 모습이 있었어요. 그 모습 때문에 ‘<시라노>를 우리나라에서 한다고요? 저 꼭 하고 싶어요!’라는 말이 나왔죠. 원작이나 영화 등 다른 매체에서 표현됐던 드기슈는 결혼을 한 유부남이자, 바람둥이에 허세 넘치는 배 나온 귀족이었거든요. 심지어 나이도 많죠. 그래서 전 정말로 특수 분장을 하고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구스타보 자작) 연출님이 생각한 작품의 방향성이 다르더라고요. 원작 텍스트와 독립적인 작품으로 접근하길 원하셨어요. 그리고 역시나 드기슈도 원작이나 보편적인 이미지와는 달라졌어요. 아, 맞다. 수염도 극적으로 달린 거 아세요? 첫 공연 전날에 수염을 붙였어요. 연출님이 ‘드기슈가 크리스티앙이랑 뭐가 다르지? 이렇게 멋있는 드기슈를 록산이 싫어할 이유가 있나?’라는 말씀을 조심스럽게 하셨거든요. 그래서 엘비스 프레슬리처럼 볼까지 이어진 구레나룻과 수염을 붙였죠. 이렇게 허세 넘치는 귀족의 모습을 표현했어요.
맞아요, 드기슈가 너무 잘생겼다고 생각했어요.
그 이유로 특수 분장을 끝까지 고집했어요. 저는 드기슈를 통해 ‘확실한’ 조연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었어요. 그 전에도 확실한 캐릭터 연기를 보여주고 싶어서 참여한 작품들도 꽤 많아요. 이런 점에서 볼 때 <시라노>의 드기슈는 ‘확’ 끌린 캐릭터예요. 혼자서 대머리에 배불뚝이의 모습으로 연기하면 얼마나 재미있을까. 천연덕스럽게 해봐야지. 다짐했거든요. 앞에서 말씀드린 이유로 특수 분장을 하지 못하게 되니까, 고민을 많이 했어요. 사람은 누구에게나 허세나 자만심이 있어요. 그런데 강하게 허세와 자만심을 부려야 한다면 단편적인 악역밖에 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냥 못된 놈이 되는 거죠. 그러면 재미가 덜 하잖아요. 그래서 전 여기에 허당의 이미지를 더했어요. 빈틈이 있는 사람이요. 허세 가득하고 머리를 굴리는 게 보이는 사람 중에서는 재수 없어 보이는 사람도 있지만 속이 훤해서 귀여운 사람이 있잖아요. 저는 이런 부분을 생각했어요. 정말 감사한 것이 연출님께서는 이런 제 고민을 들어주면서 ‘자유롭게 놀아봐’라며 믿어주셨죠.
그동안 대학로 소극장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어요. 많은 인원의 대극장 공연은 어떤가요?
개인적으로는 대극장이나 소극장을 떠나서 ‘주종혁이 이런 역할도 할 수 있네’라는 말을 듣는 것이 소망이자 목표에요. <시라노>는 겸손하게 관객들에게 ‘주종혁이라는 배우가 있는데, 무대에서 정말 열심히 연기하고 있어요’라고 인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다른 배우들도 다 마찬가지겠지만, 정말 솔직하게 이 커다란 무대 위에서 하나도 허투루 보내고 싶지 않아요. 내게 쏟아지는 조명이 없어도 연기가 끊어지는 게 싫어서, 늘 온 신경을 집중해요. 등퇴장이 많아서 자칫하면 호흡을 놓칠 수도 있는데, 매번 그 점을 자각하고 긴장하고 있어요. 저는 알아요. 무대에 서 있는 제게 시선을 주는 사람이 많이 없다는 걸. 아마 1막 1장에서 저를 바라보시는 관객들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시라노나 크리스티앙을 보시다가 우연히 드기슈에게 눈길이 닿으면 ‘어? 저 사람 저기서 살아 숨 쉬고 있구나’ 이런 걸 느끼게 해드리고 싶어요. 찰나의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아요. 그만큼 무대에 있는 순간이 소중해요.
드기슈는 사랑으로 많은 변화를 겪는 인물이에요. 어떤 부분에서 가장 공감됐나요?
록산이 시라노를 향한 노래를 부를 때요. 드기슈는 그때 록산을 찾아가면서 ‘크리스티앙이 죽고 15년의 세월이 지났고, 이 정도 시간이면 그녀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동안 그녀를 변함없이 사랑했다면 다시 내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봐요. 내 모든 걸 내려놓고서, 그러니까 그동안 내가 가졌고 쌓아왔던 모든 것보다 록산이 더 중요하다는 거죠. 그런데 그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마음을 다잡고 빠르게 다시 돌아오는 게 드기슈의 마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사실 드기슈는 록산보다도 먼저 시라노의 진짜 모습을 알아차려요. 그리고 록산이 시라노의 영혼을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아요. 마지막으로 ‘아, 15년이 지났어도 록산에게 나라는 사람은 없구나’를 철저하게 깨닫고 그녀의 행복을 빌어주죠. 그런 마음은 진짜로 사랑해야만 나올 수 있어요. 허세와 자만심이 가득한 사람이 왜 갑자기 죽을 수도 있는 전쟁터에 남아요? 사랑하는 여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전쟁터에 남죠. 아무리 고민해도 록산을 향한 마음이 진심이 아니라면 그럴 수 없어요. 그래서 드기슈를 통해 남자가 사랑하면 불구덩이에도 들어갈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싶어요. 사실 전 사랑할 때 그래 본 적 있었거든요. ‘상식적으로 이게 아닌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했었던, 그런 마음이요.
작품을 위해 특별히 준비했던 부분이 있어요?
정확한 발음이요. 공연장 3층 끝에 계시는 분들도 제 대사가 안 들리는 분이 없으셨으면 좋겠어요. 특히나 드기슈는 쭈욱 이어지는 대사가 많거든요. 그 대사들이 어떻게 하면 잘 들리고 한 번에 이해시킬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어요. 질문을 받고 변명을 하는 대사가 있는데, 상당히 길어서 자칫하면 지루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대사 자체가 정확하게 들리면 이해가 되고 그러면 조금이나마 덜 지루해요. 텍스트 수정을 많이 한 이유기도 하죠. 개인적으로 전 정보 전달에서는 친절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이 신경을 쓴 편이에요.
운명을 만들어내는 남자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나요?
음…, 특별한 기준이 없어요. 제게 들어온 작품이 최고라고 생각해요. 저는 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세상 모든 것에 이유가 있죠. 운명론자같이. 이렇게 <더뮤지컬>을 만나는 것도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 정말 <더뮤지컬> 인터뷰하고 싶었거든요. (웃음)
연기 인생의 전환점이 된 작품을 꼽자면 무엇인가요?
제대하고 참여한 작품이 느낌이 확 달랐어요. 군대에 가기 전에도 무대는 늘 진지했지만요. 많은 분들이 제대 후 첫 작품인 <빈센트 반고흐>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세요. 작품과 캐릭터에 대해 연구하는 버릇이 시작된 게 이 작품이었거든요. 휴학한 상태인데도 대학교 도서관에 가서 공부했죠. (웃음) 결국엔 ‘빈센트 병’까지 걸렸어요. 모든 것이 안 풀리고 우울한 병이요. 저는 항상 밝은 기운의 웃는 얼굴이었는데, 어두운 기운이 서리더라고요. <빈센트 반고흐>가 준 선물이죠. 또 이 작품을 통해 캐릭터에 몰입한다는 것에 대해 어렴풋이 알게 된 것 같아요.
이후 어떤 작품과 캐릭터에 도전해 보고 싶은가요?
특별하게 생각하지는 않아요. 주어진 모든 것에 항상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시라노>를 보면서 느꼈는데, 멜로 연기도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저 멜로를 되게 좋아해요. 그리고 달달한 음악도 좋아해요. 그동안 배우로서의 도전을 보여주고 싶어서, 다양한 역할을 맡았지만 주종혁이라는 사람은 사랑스럽게 살고 싶어요. 친구들이나 동료들한테나 ‘주종혁은 정말 달달한 친구야’라는 말을 듣고 싶을 정도로. (웃음) 사랑을 주고받는 걸 너무 하고 싶어요. 만약에 멜로 연기를 하게 된다면 정말 독서실을 끊을 정도로 연구하게 될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싶어요?
제게 제일 힘든 생각이 무엇이냐면…, 날 지금까지 사랑해 주고 지금도 날 위해서 뛰어주는 사람들한테 자랑이 되고 싶어요. 그래서 이 사람들이 내게 지치지 않고 날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저는 인생의 무상을 빨리 느꼈어요. 돈을 엄청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것이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걸 20대에 깨달았죠. 그래서 전 편법 같은 건 안 쓰고 살아왔어요. 어느 순간 돌아보니 저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거예요. 나는 왜 이렇게 날 못살게 굴까. 나는 칭찬받을 구석이 하나도 없는 사람인가. 비참했어요. 그래서 이젠 제게 작은 칭찬을 해주고 싶어요. ‘잘 해왔어, 종혁아. 지치지 마.’ 그래서 앞으로는 제가 지치지 않을 만큼만 잘됐으면 좋겠어요. 주변 사람들도 제게 지치지 않을 정도로, 창피하지 않을 정도로만 계속 걸어가고 싶어요. 그게 제 바람이에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6호 2017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