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반대편에 있던 두 피터팬의 만남
2004년 <우리는 친구다> 이후 <고추장 떡볶이>, <슈퍼맨처럼!> 등 주로 독일의 작품을 우리 정서가 깃든 노랫말로 어른과 어린이, 청소년이 함께 볼 수 있는 뮤지컬을 제작하는데 노력을 기울여 온 극단 학전의 2010년 레퍼토리 작품은 프랑스 뮤지컬 <분홍 병사(Le Soldat Rose)>다. 어른들의 모습을 한 여러 장난감들이 주인공인 소년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어른들의 세계는 악하고 어린이의 세계는 선하다는 흔히 저지를 수 있는 오류를 비껴가며, 어린이들에게 ‘어린이로서의 눈’을 잃지 않도록 격려한다. 감성적이고 중독성 강한 음악으로 유명한 <분홍병사>의 작곡가 루이 셰디드가 6월 초 내한하였다. 그는 공연을 관람한 후 번안과 연출을 맡은 김민기 학전 대표와 작품과 캐릭터, 어린이 공연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눴다. 여전히 동심을 간직한 두 사람의 대화는 지구 반대편에서 각자 활동하던 두 피터팬의 이야기처럼 유쾌했다.
<분홍병사>와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되셨나요?
김민기(이하 ‘김’) : 여러 해 전부터 어린이 공연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어요. 창작 공연도 하지만, 외국의 많은 공연들을 경험하고 공부하기 위해서 그간 독일 작품들을 해보았는데, 다른 문화권의 작품들도 해보고 싶더군요. 몇 해 전에 원주에 ‘토지 문화관’이라고, 작가들이 작품을 집필할 수 있게 해주는 곳에 들어갈 기회가 있었어요. 때마침 외국 작가들이 들어와 있었는데, 거기에 프랑스 작가가 하나 있었죠. 혹시 자국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콘텐츠를 아는 게 있으면 소개를 해달라 했더니 이 <분홍병사>를 소개해 주더군요. 그때부터 리서치를 하고 있다가 2008년 말, 이 작품이 뮤지컬로 공연된다는 소식을 듣고, 마지막 공연 며칠을 앞두고, 바로 파리로 가서 공연을 봤습니다.
루이 셰디드(이하 ‘셰디드’) : 그 작가 이름이 혹시 기억나시나요?
김: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주 젊은 작가였어요.
독일 작품을 주로 하시다가 프랑스 작품은 처음인데, 처음에 어떤 느낌을 받으셨나요?
김 : 굉장히 달랐죠. 구조적인 구성과 논리가 굉장히 강한 독일 작품은 대개 연극에 몇 편의 노래가 들어가는 ‘레뷔’ 형식인데, <분홍병사>는 노래가 전체적으로 주관하는 작품이었습니다. 독일 작품에 비해서 프랑스 작품은 굉장히 이미지가 강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다르기 때문에 이것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공부한다는 입장에서 이 작품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두 분의 이력을 살펴보니 공통점이 많습니다. 연세나 데뷔 시점도 비슷하시고, 두 분 모두 어두웠던 시기에 노래로 저항하며 살아오신 분들입니다. 재미있는 건 두 분의 주 악기가 기타라는 것, 흔치 않은 인연인 듯 합니다.
셰디드 : 사실 2008년 빨레 데 콩그레 공연에 오셨을 때, 누군가 저에게 한국에서 오신 분이라며 김 선생님에 대해 귀띔해주었습니다. 그때는 선생님께서 작품을 올릴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었는데, 몇 달 후에 보니 작품을 준비하고 계시더군요. 그 전에는 김민기 선생님에 대해 잘 몰랐지만, 이제는 한국에서 유명한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분홍병사> 한국 공연은 어떠셨나요?
셰디드 : 굉장히 만족했습니다. 2008년 ‘빨레 데 콩그레’에서의 <분홍병사>는 5,000석 규모의 대극장 용이었다면, 한국에서 공연된 이번 작품은 약 200석의 소극장 조건에 아주 잘 적용이 되었고, 그에 맞춰 각색이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우들이 노래를 잘했고, 특히 몇몇 인물은 원작과 다르게 바뀌었음에도 - 예를 들면, 원작에서는 체스의 왕과 왕비가 국내 작품에서는 시침과 분침의 남녀로 바뀌었는데- 굉장히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잘 봤습니다.
김 : 사실 저는 셰디드씨가 오시기 전에 조금 걱정이 되었습니다. 원작과 너무 다르게 바꾸어 놓아서, 원작자들이 봤을 때 불쾌해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움이 있었죠. 만족하신다니 대단히 감사하네요.
셰디드 : 원작의 작곡가로서, 또한 글을 쓰는 작가로서, 타국의 작품을 한국에 아주 잘 맞게 각색하고 완벽히 표현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원작에서 멀어졌다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훨씬 강하게 와닿을 것 같다는 좋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연출의 방식이 공연하는 나라에 맞게 달라져 더 좋게 느껴졌고, 진정성이 듬뿍 담긴 연출을 보여주셔서 매우 좋았습니다.
김 : 감사합니다. 사전에 계약 단계에서부터 한국 관객을 고려해서 변형을 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를 했는데, 원작자 분들이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용기를 얻었습니다. 소극장 무대에서 공연되다 보니 또한 공간에 맞춰서 바뀌기도 했지요.
대극장에서 소극장으로 옮겨오면서 고민이 많으셨을 것 같습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원작에서는 백화점 진열대 모양의 자동 무대가 등장하는데, 소극장에서는 팝 업 북 형 수동 무대가 펼쳐진다는 것, 한 진열대에서 다른 진열대로의 이동을 타임머신을 타고 이동하는 등의 상상력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소극장 공연이 되면서 바뀐 것들이 꽤 있는데, 만족하시나요?
김 : 큰 무대를 작게 바꾸다 보니, 사실은 팝 업 북과 대형 백화점 매장 사이의 이질감을 해결하지 못했어요. 그게 무대 위에서 충돌하고 있는데, 내년에 이 작품이 새로 올라가게 되면 그 부분을 개선하려 합니다.
계약 때 원작자 측에서 말하길, 한국 관객을 위해서 캐릭터 등을 변화시키는 것은 허용하지만 ‘분홍병사라는 캐릭터 디자인’ 이것 하나만은 유지해주길 원했어요. 어린왕자의 이미지처럼 말이죠. 그런데 그 부분이 한국 관객에겐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원작에도 없는 캐릭터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만들어 넣어봤는데, 그것도 충분히 딱 떨어지는 것 같진 않아서 고민 중입니다.
셰디드 : 네, 어린 왕자의 심볼 이미지처럼 분홍병사의 캐릭터 이미지는 지켜져야 했어요.
이 작품의 매력은 무엇이었나요?
김 : <토이 스토리>란 영화가 있죠. 그 영화에서 보면 인형과 장난감들이 서로 ‘팔려나가 보자’고 하는데, 물론 상품이라면 이런 경우가 가장 일반적이겠죠. 그런데 <분홍병사>의 경우는 첫 노래가 ‘팔려나가기 싫어’라는 노래에요. 상품이 팔려 가기 싫다는 의사를 강하게 주장하는 것, 참 역설적이죠. 그것이 이 작품의 첫 번째 매력으로 느껴졌어요. 거기서 느껴지는 분홍병사의 이미지는 예쁜 분홍병사 인형이 아니고, <노트르담 드 파리>의 콰지모도 같은 이미지로 들어오는 거였죠. 그런 이미지와 디자인, 느낌 등이 한국식으로 번안되면서 여러 가지 혼돈스럽게 충돌하고 있고 이번 공연에서 그대로 다 드러나고 있는데, 내년에 새로이 하는 공연에선 그런 충돌들을 좀 더 조정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년 공연에서 바뀌는 것은 무엇인가요?
김 : 지금보다 조금 큰 극장에서 공연될 것 같습니다. 계속 수정해서 완성도를 높이려 합니다. 게다가 이번에 셰디드 씨의 얘기를 들어보니 프랑스 쪽에서 애니메이션 영화를 준비 중인데 기존의 곡에 두세 곡을 더 추가할 계획이라는군요. 그 곡들이 완성이 되면 바로 좀 보내 달라 했어요. 새 노래를 추가시키면 조금 더 완성도 있는 공연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분홍병사>를 어떻게 만들게 되었나요?
셰디드 : 오래 전부터 아이들을 위해 공연하길 원했습니다. 저는 가수인데, 사실 어른들을 위한 가수였죠. 아이들을 위한 노래를 부르진 않았으니까요. 현재 프랑스에는 아이들을 위한 좋은 퀄리티의 뮤지컬이 많지는 않습니다. 아이들뿐 아니라 부모들을 위해서라도 뮤지컬 공연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오랫동안 이런 생각을 간직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피에르 도미니크 뷔르고라는 작가를 만나게 되었지요. 저에겐 좋은 기회였고, 함께 이야기를 만들면서 몇몇 프랑스 가수들에게 노래를 불러줄 것을 요청해 큰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사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공연으로 시작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주인공은 어린 아이인데, 제목은 왜 분홍병사이고, 어떤 부분 때문에 이 작품을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을까요?
김 : 저는 인형들에 녹아 있는 어른들 캐릭터가 주인공인 푸름이를 둘러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어른 캐릭터들이 푸름이의 눈에 들어와서 보이는 거죠. 분홍병사는 가사에도 나오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아무 것도 맞아 떨어지지 않고 어긋나는 캐릭터예요. 그렇기 때문에 이 아이의 눈에 그 모습이 더 깊이 들어왔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이 작품은 첫 곡에서의 역설적인 노래부터 ‘어긋난 것에 대한 비유’가 굉장히 재미있었어요. 월트 디즈니나 일반적인 아동극, 상업적인 아동극을 보면 모든 것을 다 예쁘게, 아이는 천진난만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식으로 포장하는데, 사실은 그건 잘못 보고 있는 것이에요. 아이 안에도 자신의 세상에 대한 고뇌와 고민이 있게 마련이죠. 아이의 그런 혼란스러운 모습이 이 작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재미있었습니다.
셰디드 : 저도 원작을 만들 때 ‘아이는 바보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만들었습니다. 굉장히 활동적이고, 호기심도 많고, 이런저런 것에 대한 질문도 던질 수 있는 개방적인 존재로서 아이를 그렸습니다.
그간 한국에 들어온 대형 프랑스 뮤지컬의 경우, 대다수의 작품이 MR을 사용하는데 <분홍병사>는 원작에서도 라이브를 하더군요. 학전의 경우 실력 있는 뮤지션들이 편곡하고, 라이브 연주에 참여하기로 유명한데, 음악적인 부분은 어떻게 보셨는지?
셰디드 : 원작에선 총 여섯 명의 뮤지션들이 연주합니다. 한국 공연은 소극장 규모에 맞게 두 명으로 조정한 것으로 압니다. 적절한 판단이었고, 편곡도 굉장히 좋았습니다.
김 : 한국 공연은 공간이 작아서 라이브 연주 두 명에 MR을 섞어서 하고 있습니다. 그게 아쉬워서 원작에는 없는 코러스를 많이 넣었어요.
셰디드 : 가수들이 노래를 정말 잘하고, 목소리도 너무 아름다워 감동적인 무대였습니다.
김 : 감사합니다.(웃음) 원작이 뮤지컬로 시작된 게 아니라 음반과 그림책으로 출발했기 때문에 노래들이 각각 독립돼 있었어요. 그것을 옮기다 보니까 원래는 한 곡이었던 타임머신 노래를 쪼개야 하는 경우가 있었죠. 공간 배열을 하기 위해서였죠. 다른 노래들은 원형을 유지했는데, 그 노래만은 서사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 세 토막을 내서 변형을 시켜봤습니다.
셰디드 : 사실 저희(원작자)는 한국의 대중들을 잘 모르고, 김 선생님께서는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그러한 각색과 적용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지지합니다. 프랑스 관객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해서 한국의 대중들에게도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같은 의미일 수도 있지만 반대의 의미를 지닐 수도 있기 때문에, 표현상 다르더라도 각 대중에 맞게끔 잘 각색을 하고 적용을 시킨 것은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김 :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원작자로서 자신이 만든 것을 변형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고, 와서 보고, 칭찬까지 해주신데 대해서 정말 대단히 감사합니다.
셰디드 : 만약에 한국 작품을 프랑스에서 올린다 해도 그렇게 바꾸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2006년에는 그림책 CD로, 2008년에는 뮤지컬로 대중에 소개되었고, 또 앞으로는 에니메이션으로 나올 예정이라 들었습니다. 각각 어떻게 다른가요?
셰디드 : 뮤지컬은 일정한 캐릭터와 이야기를 배우들의 연기와 노래로 펼치는 것이지만, 애니메이션은 뮤지컬보다 더 많은 캐릭터와 상황을 필요로 합니다. 이처럼 각 형식마다 새롭게 요구되는 지점들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캐릭터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것들을 창출해서 다른 것을 만들 아이디어를 항상 떠올려야 합니다. 처음엔 그림책 CD였고, 그 다음엔 뮤지컬, 지금은 더 새로운 것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애니메이션은 2012년에 나올 예정입니다.
학전은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왔습니다. 앞으로 지향하는 어린이 공연이 어떤 것인가요?
김 : 그간 한국에서 가장 취약한 영역으로 본 것이 초·중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유아극들은 오히려 많은데 초·중학교 아이들을 위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영역을 대상으로 하는 콘텐츠를 찾아보려고 노력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동극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언제부터 인가요?
김 : 젊어서 20대에 노래 만들 때에 아이들 노래도 만들었어요.
셰디드 : 그럼 더 이상 노래는 안 하시나요?
김 : 잊어버린 지 30년 가까이 됐네요.(웃음)
셰디드 : 하지만 여전히 유명하시군요.(웃음)
한국 어린이들이 이 뮤지컬을 보고 어떤 생각을 품길 기대하나요?
셰디드 : ‘피터팬’과 같은 시각입니다. 어른이 되고 난 후에도 세상을 보는 시각이 여전히 아이의 시선으로, 피터팬과 같은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2호 2010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