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 텅 빈 무대. 그 위로 조명이 들어오면 리허설 복장의 배우들이 강렬한 에너지를 내뿜으며 자신의 끼를 발산하고 있다. 1천 명이 넘는 지원자가 몰린 <코러스 라인> 오디션에서 1차 서류 심사와, 하루 12시간씩 진행된 2차 오디션, 춤과 노래, 지정 연기를 심사한 3차 오디션과 4차 배역 오디션을 모두 통과한 최정예 배우들이다. <코러스 라인>의 브로드웨이 초연에서 코니 역을 연기한 배우이자 2006년 브로드웨이 리바이벌 투어 공연의 연출 겸 안무가인 바욕 리 Baayork Lee 가 배우들을 지휘하며 그들의 숨은 끼를 이끌어내고 있다.
“자, 이제 호명하는 배우들은 한 줄로 서세요. 신선호, 육현욱, 정주영, 김민건, 박우식, 박재원, 고명석, 유미, 김윤경, 이영은, 강웅곤. 이상은 사진과 이력서를 제출해 주시고, 윤길과 최영화, 한연주, 전진희, 김형근, 지혜근은 객석에서 대기해주세요. 나머지 분들은 수고하셨습니다.”
바욕 난 댄스와 코러스를 같이할 수 있는 유능한 인재들을 찾고 있어요.
두 가지를 완벽하게 해낼 뿐 아니라 전체 하모니를 이룰 수 있는 배우들이 필요해요. 여러분의 사진과 이력서도 있고, 어떤 무대에 섰는지도 알지만 더 많은 얘기를 듣고 싶어요. 여러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주세요. 연기하지 말고 최대한 긴장을 푸세요. 이번 오디션은 어땠나요?
고명석 전문 춤꾼이 아니어서 오디션 원서를 넣으면서부터 걱정했어요.
부족함을 많이 느끼기도 했지만, 정말 죽을 각오로 덤볐어요. 디아나를 처음 연기할 땐 정말이지 제 얘기 같아서 엄청나게 많이 울었어요. 그래서 더 욕심이 더 났죠. 디아나처럼 저도 무대 위에서야 비로소 숨을 쉬고 살아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느껴요. 전 중학교 때부터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었어요. 부산 출신이라 문화적인 혜택을 많이 받지는 못했고, ‘대학에 가서 네 마음대로 하라’는 부모님 덕분에 대학 졸업하고서야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지만요. 아마 그때 부모님은 시간이 지나면 제 꿈이 바뀔 거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웃음) 2003년 <그리스> 때 처음으로 오디션을 보고 데뷔했어요. 그땐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열정과 오기만으로 오디션에 참가했던 것 같아요. 의상부터 소품까지 다 준비하고 어떻게든 튀어보려고 발악을 했거든요. 그동안 잠시 잊고 있었는데 이번 오디션을 보면서 그때의 열정과 오기가 되살아난 것 같아요.
김윤경 제가 무용을 시작한 건 스무 살 때부터예요. 고3 때 한 달 공부하고 입시를 봤는데 운이 좋았죠.
2005년 <갓스펠>에 출연하면서 뮤지컬에 데뷔한 것도 그렇고, <드라큘라>에서 피의 천사 중 한 명을 연기했던 것도 그렇고. 제 손으로 직접 오디션 원서를 쓴 건 <에비타> 때가 처음이었어요. 그때 팔이 부러져서 깁스를 하고 갔는데 그게 인상적이었는지 무대에까지 서게 하셨죠. 초조하고 기다림도 길었지만 합격의 기쁨은 몇 배로 더 좋았어요. 지금 이 코러스라인에 서 있는 기분은 그보다 몇 십 배 더 좋아요. 역시 전 운이 참 좋은 것 같아요.(웃음)
박우식 저를 왜 리치 역에 캐스팅하셨는지 아직까지 잘 모르겠어요.
활발하긴 하지만 리치는 제가 가진 에너지 색깔과는 좀 다른 인물이거든요. 제가 알지 못하는 저를 연출님께서 발견하신 건가요? 믿겠습니다.(웃음) 이번 오디션은 마치 <코러스 라인> 공연을 하고 있는 듯해서 무척 신선했어요. 연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전공이면서도 연극이다 아동극이다 하며 따라다닌 걸 보면 제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무대에 대한 열정이 꿈틀대고 있었던 것 같아요. 군대에서도 고민을 많이 했죠. 대학원에서 연극을 제대로 공부해볼까 하던 시기에 남경주 선배님이 제작하는 뮤지컬 콘서트 오디션에 합격했어요. 그렇게 뮤지컬과 인연이 닿았고 작품으로는 재작년에 공연한 <지붕 위의 바이올린>으로 데뷔를 했죠. 이번 공연이 네 번째 작품인데 오디션 결과가 좋아서 정말 다행이에요. 떨어지면 죽을 것 같았거든요.(웃음)
신선호 오디션 때 워밍업 시간이 있는 줄 알았으면 한 시간이나 먼저 도착해서 몸을 풀지는 않았을 거예요.(웃음)
그래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 오디션에 참가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어요. 어렸을 때 비디오를 보면서 배우들의 에너지와 완벽한 테크닉에 반해서 많이 따라 추곤 했거든요. 뮤지컬 데뷔작은 2006년 <콘보이쇼>인데 당시에는 춤을 잘 추는 배우가 많지 않았나 봐요. 연출하셨던 최형인 교수님이 학교로 공문을 보내서 오디션에 참가했었거든요. 탁자 위에서 ‘콩나물의 항변’을 읊던 머리 긴 플라톤이 바로 저였어요. 무용만 했던 터라 많은 부분에서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춤을 추지 않고 눈빛이나 노래만으로도 관객들에게 감정을 전달할 수 있는 뮤지컬이 무척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어요.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고 즐길 수 있더라고요. 이번 공연에서는 코러스 배우가 아닌 조안무 래리를 맡게 돼서 조금 아쉬운 마음도 없진 않아요. 하지만 코러스 배우들과 함께하는 장면에서는 저 역시도 하나의 앙상블이니까 두 가지 캐릭터를 가지고 작품에 임할 생각입니다. 어쨌거나 이건 저희들 얘기잖아요.
바욕 이번엔 유미가 얘기해볼까요? 당신은 캐시를 지원했지만 난 당신을 보자마자 쉴라라고 생각했어요. 당신은 어떤가요?
유미 몰랐었는데 그녀와 살아온 가정환경이 많이 닮았더라고요.
덕분에 엄마를 생각하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전 길을 가다가도 음악이 나오면 멈춰서 춤을 추던 아이였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무용 학원에 다녔는데 그땐 몸이 너무 약해서 무용복을 갈아입으면 기절했다가 집에서 눈을 뜨는 날이 많았죠. 그래도 쉬지 않고 춤을 춘 덕분에 몸도 건강해졌어요. 뮤지컬을 시작한 후로는 전혀 활용하지 못하고 있지만 중학교 때부터 한국무용을 전공했어요.(웃음) 이번 오디션에서도 발레 콤비네이션을 무사히 치를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행이죠. 제가 처음으로 오디션을 본 뮤지컬은 2005년 <풋루스>예요. 그 전에도 뮤지컬에 출연하긴 했지만 그때까지 저는 그냥 무용수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무용할 때처럼 무대를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배우가 되고 싶어졌고 노래와 연기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어요. 전 극장 냄새가 정말 좋아요. 무대 위에만 서 있으면 설레고 가슴이 뛰어요. 극 중에서 연출가가 배우들에게 만약 춤출 수 없게 되면 어떻게 할 거냐고 묻잖아요? 아무리 상상해 봐도 저는 몸을 쓸 수 없게 된다 해도 계속 이 일을 할 것 같아요. 정말 죽고 싶겠지만 그래도 무대를 떠나지는 못할 것 같거든요.
육현욱 그래서 저는 최대한 몸을 아껴서 오래오래 쓸 수 있도록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외국 배우나 스태프들을 보면 불가능한 일은 아닌 것 같고요. 춤추는 것만 좋아했던 제가 뮤지컬에 반한 건 오재익 선생님이 안무하신 <하드락 카페>를 보고 나서예요. 문화적 충격을 받고 고3 때부터 뮤지컬 오디션을 보기 시작했어요. 벌써 10년 전 일이네요. 이번 오디션만큼이나 인상적이었던 건 3차 오디션에 6개월이나 트레이닝을 받은 후에야 최종 일곱 명을 뽑았던 <콘보이 쇼>예요. 제 얘기로 스토리를 만든 작품이라 참 재밌고 기억에 남아요. 이번에 연기하게 될 마이클도 저를 많이 닮은 캐릭터라 좋아요. 굉장히 좋은 환경에서 행복하게 자란 캐릭터죠. 누나가 다니는 무용 학원에 따라갔다가 반해서 춤에 빠져들었듯이 저는 서태지, 듀스 등의 춤을 따라 추면서 빠져들었어요. 고등학교 때 본격적으로 여러 종류의 무용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부모님이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지지해주고 계세요. 동욱 대신 현욱이라는 예명을 지어 오신 것도 어머니예요. 설마,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게 이름 덕분만은 아니겠죠?
정주영 아직 발레가 더 익숙한 저로서는 이번 오디션이 결코 쉽지 않았어요.
체력적으로도 그렇고 다양한 장르의 춤도 그렇고. 사실 제가 오디션이라고 본 건 대학 입시와 국립발레단 입단 오디션 정도거든요. 뮤지컬을 하면서 오디션을 제대로 알게 된 거죠. 발레는 중3 때부터 시작했는데 대학 가서야 열심히 했어요. 늦게 철이 든거죠. 발레단에서 곧잘 한다는 얘기도 많이 듣고 또 좋은 역할로 많은 무대에 오르다보니 뮤지컬 작업을 하면서 잘난 척하는 구석이 없지만은 않았던 것 같아요. <캣츠>를 하면서 많이 겸손해지려고 노력했고 계속 노력할 거예요. 이건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던 건데, 음, 제가 처음으로 본 오디션은 <이블 데드>였어요. 그냥 무작정 지원한 건데, 심사위원들에게 현장에서 작품과 안 어울린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죠. 이번 공연에서는 그레고리 가드너라는 사람을 연기하게 됐잖아요. 실제로 발레리노였던 인물이라 자신이 있는데 동성연애자임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인물인 점은 조금 걱정이 돼요. 여자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들만의 정서를 빨리 찾는 게 숙제예요. 이번 공연의 목표요? 글쎄요, 다른 건 몰라도 정주영이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해 또 다른 매력을 보여주었다는 얘기를 듣는 거?
이영은 근력과 인내력, 심사위원들의 요구를 바로바로 습득하는 방법을 이번 오디션으로 얻게된 것 같아요.
지금이야 능청스럽게 시키는 거 다 하지만 처음 오디션을 봤을 땐 질문만 받아도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였거든요. 2006년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와이키키 브라더스>가 제 첫 작품인데, 그때 제가 막내였는데 이번에 또 막내네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데! 춤은 10점이지만 외모는 3점이라 의학의 도움을 받아 예뻐진 발을 맡기신 건 제 외모 때문인가요?(웃음) 말투나 외모와 달리 착하고 귀여운 캐릭터라는 점에서는 저와 많이 닮은 것 같아요. 참고로 전 마음 여리고 눈물도 많은 여자랍니다.
박재원 얼마 전까지 영은이와 <시카고>에 출연했던 저는 이십칠 년째 꿈나무예요.
한참을 밥 포시 스타일에 젖어 있다가 마이클 베넷 스타일을 연출하려니 쉽지가 않네요. 제가 맡은 마크는 마이클과 함께 춤을 잘 추는 매우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스무 살 청년이에요. 책을 보고 몽정을 하고는 임질에 걸렸다고 상상을 할 정도로 말이에요. 아마 그 순수함 때문에 저를 마크로 뽑아주신 거 아닌가요? 참, 저 오디션 때 기분이 좀 상했다고 말씀드려도 되나요? 제가 답변 준비를 많이 하지는 못했지만 어렸을 때 비보이를 했고… 하는 얘기를 꽤 했는데 통역만 거치면 두세 마디로 끝나버렸거든요.
김민건 모두가 이번 오디션이 가장 힘들었다고 하는데, 전 좋아서 한 일이라 그런지 전혀 힘들지가 않았어요.
저한테 무대는 놀이터예요. 마음이 편해져서 놀기 좋거든요. 공개 오디션을 좋아하는 것도 같은 이유고. 그렇지만 무용을 전공하지 않은 제가 여기까지 온 건 참 신기한 일인 것 같아요. 전 주말의 명화, 토요명화를 즐겨보면서 나도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호기심도 많았고요. 뮤지컬을 알게 된 건 스물한 살 때 극단 예맥의 <더 킹>의 앙상블 역할로 출연하면서부터예요. 노래도 하고 춤도 추고 연기도 하는 게 무척 새롭더라고요. 그땐 어려서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몰랐는데, 언젠가부터는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거짓으로 보여주면 안 될 것 같았어요. 그래서 짬날 때마다 발레도 배우고 한국 무용도 배우고 판소리도 배우고 성악도 배우고 그랬어요. 엉뚱하고 말하기 좋아하는 바비를 지원했는데 리치 역을 주셨네요. 영화에서 리치가 부르는 노래를 무대에서 부르지는 않지만 공연 내내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다른 배우들에게 ‘엔돌핀’이 되어볼 생각이에요.
강웅곤 큰 키 덕분에 <클레오파트라>나 <시카고>에서 제일 많이 벗고 출연했다고 하면 웃으실 건가요?
전 사실 댄스 강사를 하려고 했다가 가족들한테 이끌려서 뮤지컬과를 가게 됐어요. 졸업장이 필요했던 거지 뮤지컬을 할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이렇게 매력에 빠져들고 있는 중이에요. 주디는 할 말이 너무 많아서 정리를 하지 못하는, 머릿속에 하얀 얘기가 수만 개인 아이잖아요. 오디션 때 제가 준비한 말의 반도 못한 거 눈치 채고 주디를 그때 맡기신 건가요? 그래도 머릿속으로는 백만 가지 이야기를 중얼거리고 있었어요.(웃음) 얼마 전에는 대학로 소극장에서 <스켈리두>라는 작품에 출연했어요. 무대 위에서 처음으로 관객들과 눈을 맞춰 얘기를 해본 것이었는데, 많이 떨렸지만 한 번 해보니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이번 공연은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두 번째 작품이니까, 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정말 잘하고 싶어요.
바욕 여러분 모두 훌륭했어요. 리허설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진행되고, 오는 6월 27일 첫 공연을 가질 계획입니다. 함께 일 할 수 있게 돼서 정말 기쁩니다. 자, 이제 객석에 있는 배우들과 자리를 바꿔주겠어요?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1호 2010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