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모로 어린 사랑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1995년,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개봉됐을 때, <씨네21>의 김혜리 기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세계 어디에서나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풀어야 할 고민거리는, 부모보다 더 늙은 주인공들의 로맨스를 봐야 할까 망설이는 20대 초반의 관객들이다.”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중년에 찾아든 운명적인 사랑이야기」, 『씨네21』 No.21, 1995, 43쪽). 아닌 게 아니라, 1965년 미국 아이오와 주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가정이 있는 중년 여인 프란체스카와 사진작가 로버트가 겪게 되는 나흘간의 운명 같은 사랑을 주제로 한 로버트 제임스 월러의 원작 소설은 ‘중년을 위한 하이틴 로맨스’라 불렸고, 영화의 두 주인공으로 분한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은 영화를 찍을 당시 나이가 각각 65세, 46세였다. 그러니 두 주인공이 얼마나 애틋한 사랑을 하든 그 사랑이 산뜻하게 보이기는 쉽지 않을 노릇이었으며, 젊은 독자와 관객들이 이렇게 ‘늙은’ 사랑에 마음을 내어주기를 기대하는 것 또한 과한 욕심 같았을 것이다. 허나, 2017년 뮤지컬로 한국 관객을 찾은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 이런 우려는 공연(空然)하다. 원 캐스트로 옥주현과 박은태를 무대 위에 올렸기 때문이다. 무대 위에서 열연하는 두 삼십 대 중반의 배우는 참으로 젊고 화사하다. 무엇이 두 배우의 미려함을 가릴 수 있겠냐는 듯 분장에 애쓴 기색도 없다. 아니, 뮤지컬의 제작진들은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사랑에 ‘늙음’이 자리할 곳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그리는 사랑이 늙지 않아도 되는 사랑이었던가? 아니면 뮤지컬은 배우뿐만 아니라 사랑 또한 회춘케 한 것일까?
영화의 늙고 늙어 복잡하고 난해한 사랑
뮤지컬에 펼쳐진 사랑의 풍광에 대해 생각하기 전, 영화 속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메릴 스트립의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영화는 프란체스카의 임종 후 그녀가 남긴 편지를 그녀의 자식들이 읽어가는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프란체스카의 시선으로 과거가 재연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잘 알려진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의 줄거리와 다를 바 없지만, 가족에 대한 헌신과 책임감 때문에 포기한 불륜 이야기라고 간추리기에 프란체스카의 마음은 훨씬 미묘하고 복잡하다. 함께 떠나자는 로버트에게 눈물로 호소하며 그녀는 말한다. “누군가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기로 결정하는 순간 어떤 면에서는 사랑이 시작된다고 믿지만 사랑이 멈추는 때”이기도 하며, 이런 까닭으로 “[로버트를] 따라나서면 [그들의] 사랑도 지금과는 달라질 거”라고. 즉 프란체스카가 사랑의 도주를 포기한 것은 남겨질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의 이별 결정은 일면 로버트와 자신이 서로에게 느끼고 있는 특별한 감정을 빙결(氷結)시키기 위함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프란체스카가 세상에 로버트와 단둘이 남겨져도 지금의 사랑을 영원으로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며, 사랑이 일상으로 전환될 때 그 사랑은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시사한다. 어쩌면 인생을 너무 많이 알아 복잡하고 어려운, 어른의 사랑이다.
뮤지컬의 얄팍하고 그저 부정(不正)한 사랑
뮤지컬이 그려내는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사랑은 이처럼 복잡하지 않다. 뮤지컬은 이들의 사랑이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해도 결국은 간통이자 불륜일 뿐이라는 사실을 잠시도 잊게 하지 않는다. 뮤지컬의 거의 모든 순간 프란체스카와 로버트는 둘만 남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가 만나, 마음을 키우고, 밤을 함께 보내고, 힘겹게 이별하는 모든 순간 두 사람 곁에는 프란체스카의 이웃과 남편, 아이들이 무대 위에서 함께하며 프란체스카가 유부녀란 사실을 상기시킨다. 두 사람이 함께하는 첫 번째 저녁 식사 시간, 두 사람이 나누는 인생 이야기는 다른 배우들을 통해 재연된다. 호감을 느끼는 남녀가 처음으로 자신들에게 찾아온 내밀한 순간 자신의 이야기를 (서로에게 들려주고 싶은 방향으로 각색하여) 속삭이고, 눈빛과 제스처를 주고받는 일을 확인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심지어, 두 사람이 서로를 안고 춤을 추는 장면, 즉 프란체스카와 로버트가 처음으로 서로의 몸을 느끼는 순간조차 무대는 춤추고 노래하는 다른 배우들로 소란스럽다. 대극장 뮤지컬의 특성상 연인들의 내밀한 순간들을 지속적이고 섬세하게 전경화하는 것이 쉽지 않고, 또 어쩌면 그다지 현명한 선택이 아닐 수 있겠으나, 무대 위 시끌벅적한 재현에 두 사람의 사랑이 성장하는 과정이 너무도 철저하게 지워졌다는 인상은 지울 길 없다.
프란체스카와 로버트의 관계는 ‘불륜’일 뿐이라고 재단하고 강조하는, 소란스러운 무대는 거의 뮤지컬 내내 계속된다. 심지어 두 사람이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의 장면은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일리노이 박람회와 겹쳐진다. 그리고 프란체스카와 로버트가 마지막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순간조차 무대는 그들의 애틋한 감정에 집중하기보다는 프란체스카가 있어야 할 곳은 가족의 곁이라는 점을 역설한다. 가족들과 함께 찾은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서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와 만나고 그 순간 두 사람을 제외한 세상의 시간이 멈춘다. 영화 <라라랜드>의 마지막 세바스찬과 미아가 그들이 누리지 못했던 ‘미래’를 잠시 ‘가정’해 보는 장면처럼, 프란체스카는 로버트에게 다가선다. 그러나 그녀는 한순간도 환상을 만끽하지 못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돌아보는데, 그 순간 남편과 아이들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로써 프란체스카가 로버트를 떠나보내는 것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 가족들이 실은 끝내 겪지 않을 절망에 대한 우려 때문이라는 것이 선명해진다. 불륜이기에 그녀는 번뇌했고, 하여 포기하는 것이다. 이처럼, 뮤지컬에는 복잡다단한 ‘사랑의 여정’을 알아버린 중년이 다시 사랑을 마주하고 결결이 찢어지는 마음에 겪는 다층의 감정은 없다. 영화의 사랑보다 얄팍하다는 면에서, 뮤지컬의 사랑은 어리다. 사랑에 대한 쓸데없는 사변(思辨) 없는 어린 사랑, 뮤지컬이 그리는 사랑은 확실히 영화보다 선명하고, 명쾌하다. 어리다 해서 나쁘겠는가. 다만, 이들의 사랑이 ‘불륜’일 뿐이라면 그 사랑의 여정을 이토록 오랫동안 지켜볼 까닭이 무엇인가? 진정 생의 사랑이 뮤지컬처럼 산뜻한 것일까? 이런 의문이 잦아들지 않을 뿐이다.
‘애매함으로 가득한 이 우주에 딱 한 번 찾아든 확실한 마음’?
뮤지컬에서 소란스럽지 않았던 단 한순간을 기억한다. 로버트로 분한 배우 박은태가 ‘단 한 번의 순간’을 부르기 시작하는 순간, 심지어 오케스트라도 숨죽여 그의 목소리를 듣는다. 반주 없이 배우의 목소리만으로 로버트가 태어나 처음으로 느낀다는 감정을 고백하기 시작한다. 뮤지컬이 홍보용 문구로 인용하는 것처럼, “애매함으로 가득한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딱 한 번 찾아오는 것”이라고 호소한다. 허나, 뮤지컬이 그린 우주가 애매함으로 가득하였던가? 너무도 명쾌한 옮고 그름으로 재단된 우주가 아니었던가? 프란체스카와 로버트가 ‘불륜하고, 불륜하여 이별’하는 뮤지컬의 우주는 이 사랑에 ‘불륜’이라는 낙인으로는 채 담아내지 못할 어떤 감정의 덩어리가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그 감정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일까 하는 질문을, 그리고 끝내 이별하는 두 사람에 대한 연민을 남겨두지 않았다.
뮤지컬이 남긴 질문은 이야기의 윤리성의 문제였다. 윤리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합당한가라는 문제 말이다. 어려운 문제이다. 허나 ‘어린 사랑’보다는 ‘어려운 사랑’에 마음이 움직였던 기억에,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문장에 기대어 질문한다. “적어도 이야기라는 장르에서만큼은 이 세상의 모든 단호한 경계들에 대해서 확신보다는 회의를 품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는 결과”를 낳지 않을까? (신형철, 『정확한 사랑의 실험』, 마음산책, 2014, 161쪽). 적어도 ‘나쁘다, 나쁘니 하지 말아야 한다’는 문장만으로 충분할 ‘불륜’보단 ‘애매함으로 가득한 이 우주에 딱 한 번 찾아든 확실한 마음’을 더 오래 궁금해하고, 생각하고, 아파하는 일이 가치 있다 믿기 때문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5호 2017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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