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usical

더뮤지컬

magazine 국내 유일의 뮤지컬 전문지 더뮤지컬이 취재한 뮤지컬계 이슈와 인물

뮤지컬&컬처 | [REVIEW]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No.165]

글 |정수연 한양대 연극영화학과 겸임교수 사진제공 |스토리피 2017-07-05 3,976

즉흥, 재미보다 더 큰 기대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




즉흥의 조건


연기 전공으로 대학을 가려면 입시 전형에서 꼭 해야 하는 연기가 있다. 이름하야 즉흥연기. 상황이 주어지면 그 자리에서 바로 연기하는 건데 이거, 만만치 않다. 대본을 읽고 준비할 수 있는 지정연기와는 달리 즉흥연기는 연기하는 사람이 가진 순발력과 응용력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어린 배우 지망생들의 즉흥연기? 대부분 재미없고 지루하다. 기쁜 상황이 주어지면 열에 아홉은 전화기를 들고 호들갑이고, 슬픈 상황이 주어지면 또 열에 아홉은 헉, 숨을 멈췄다가 이내 울음을 터뜨리는 식이다. 자기의 즉흥이라기보다는 만인의 거푸집 같다. 상상력이 가동하기에는 긴장감이 너무 큰 탓도 있겠지만, 아직 그들의 몸과 머리에 표현의 재료가 충분히 담겨 있지 않음이 더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흔히들 즉흥은 아무것도 없는 데서 나오는 기발함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건 즉흥에 대한 가장 큰 오해다. 즉흥에 능했던 중국 송나라 때 배우들에게 공연 목록이란 관객에게 내놓는 메뉴판과 같았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오륙십 개 이상의 레퍼토리를 좔좔 외우면서 관객들이 제목을 고르면 그 자리에서 바로 공연을 올렸다. 관람료도 정해져 있는 게 아니어서 공연 중간에 직접 관객에게 돈을 걷기도 했는데, 공연이 재미없으면 돈을 받기는커녕 벽돌 세례를 받았다니 살벌하기 짝이 없다. 말 그대로 재미없으면 죽는 거다. 미리 공연 제목을 예고하지만 관객들이 마뜩잖아 하면 그 자리에서 관객이 원하는 공연 레퍼토리로 바꿔 몇 개라도 공연해야 했다. 뛰어난 배우는 외울 수 있는 레퍼토리가 삼백 개 정도였단다. 즉흥이란 가진 게 많은 데서 나오는 여유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즉흥 자체가 새로운 형식이 되는 근거가 이것이다. 가진 패가 많으면 그것을 즐기는 방법도 다양해지는 법이니, 내용은 거기서 거기라 하더라도 수많은 경우의 수를 꺼내드는 재미에 빠져들 때 공연의 백미는 내용에서 형식으로 그 자리를 옮기게 마련이다. 돌발적인 변수조차 공연의 상수로 활용하는 치밀한 전략이 곧 즉흥의 형식인바,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 중요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마디로 즉흥은 과정과 형식을 즐기는 재미인 거다. 그래서 즉흥은 과정에서는 재미가 되고 형식에서는 실험이 된다. 혹시라도 실험이라는 말에 부담 갖지 마시길. 공연에서 즉흥은 그 표어가 명확하니 말이다. 장르에는 혁신을. 관객에겐 재미를.



즉흥의 재미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이하 <오늘 처음>)은 이러한 표어에 충실한 공연이다. 관객과 함께 만드는 뮤지컬로서, 오늘 처음 만들었기에 오늘의 관객만 볼 수 있는 유일무이한 공연을 표방한다. 말은 쉽고 기발하지만 사실 뮤지컬에서 이런 식의 즉흥을 시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뮤지컬은 형식의 틀이 확고한 장르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관객과 함께 어떻게 만들어낸다 치자. 음악과 노래는 어떻게 할 건가? 이 작품에 아이디어를 제공한 웨스트엔드의 즉흥 뮤지컬 <쇼 스토퍼>에서는 음악도 관객이 선택했다던데, 이건 거의 귀명창 수준에 이른 관객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일 터다. 기존 뮤지컬 넘버를 표절과 패러디의 중간에서 활용하는 무대의 역량도 필요하지만 그것을 찰떡같이 알아듣고 그 차이를 즐기는 관객의 귀 또한 필수적이니 말이다.


<오늘 처음>의 전략에서 돋보이는 것은 선택과 집중이다. 이 작품은 즉흥 뮤지컬로서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명확히 구분해서 할 수 없는 것은 즉흥의 범주에서 빼내고 할 수 있는 것은 최대치로 활용하는 방식을 택했다. 즉흥의 영역에서 빠진 것은 바로 음악이다. 이 작품에서 음악은 즉흥의 재료가 아니라 작품의 틀로 활용된다. 가사가 바뀌는 노래가 있기는 해도 음악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멜로디는 준비된 대로 흘러가는 거다. 이런 설정을 통해 얻는 이익은 많다. 자칫 즉흥이라는 설정 때문에 흩어지기 쉬운 극의 집중력을 음악이 적잖이 잡아주더라.


하지만 이 작품이 음악을 즉흥의 웃음에서 완전히 배제한 것은 아니다. 자기네들이 이런 식으로 음악을 설정한 이유를 ‘정통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표방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데서 벌써 웃음이 터져 나오니 말이다. 실제로 이 작품의 음악은, 프롤로그부터 제시곡을 거쳐 캐릭터송을 지나 러브송을 건너 프로덕션 넘버에 이르기까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음악 형식을 그대로 따른다. 얼렁뚱땅 만드는 것 같아도 우리야말로 정통파라고 음악을 들이대며 주장하는 순간 이 작품은 가장 뮤지컬다운 형식으로 정말 어이없게 뮤지컬을 흔들어놓는다. 이야기와 전혀 상관없는 노래가 뻔뻔하도록 진지하게 이어지는 것도 우습지만, 이래저래 갖다 붙인 가사로 얼렁뚱땅 자기네 넘버로 만들어버리는 솜씨를 보자면 이 작품이 뮤지컬을 풍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니 말이다. 쇼 스토퍼가 부르는 넘버를 보시라. 뮤지컬에 대한 자의식이 담긴 이 노래는 <스팸어랏>의 호수의 여인이 부르는 노래에 필적할 만큼 재미있다.


그렇다면 즉흥이 구현될 영역은 단연 이야기일 터다. 이야기의 큰 틀은 어드벤처이지만 관객은 그 앞에 멜로, 에로, 액션 등 다양한 수식어를 붙이며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주인공의 캐릭터 설정부터 그 역할을 맡을 배우를 정하는 것까지 모두 관객이 앞장서서 결정해 나가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짚어야 할 핵심 하나. 즉흥이 구현한 결과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야기의 내용이 아니라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관객의 존재라는 점이다. 관객들, 엄청 적극적이더라. 이거야말로 말 그대로의 관객 참여일 것이다. 그동안 관객 참여를 모토로 내세웠던 많은 극들이 관객을 무례하게 사용해 왔던 것에 비하자면, 이 작품에서 관객은 엄연한 공연의 주인이자 대접받는 손님이다. 미리 준비된 이야기의 틀이 있어서 관객의 역할은 설정의 재료를 던지는 데 한정되어 있다는 즉흥의 역설이 있기는 하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관객들은 공연 내내 자기 존재를 드러내면서 색다른 재미를 만끽한다. 관객의, 관객에 의한, 관객을 위한 공연의 발견이다. 고개 한 번만 돌려도 뒤통수가 뜨듯해지는 예민한 관극 문화에 상처받은 관객들이 느꼈을 해방감은 거기에 얹히는 덤이다.



완성되지 않은 즉흥


그렇지만 이 작품의 즉흥이 전적으로 성공적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관객의 참여를 극의 형식으로 완성시키는 책임은 온전히 배우의 몫이다. 관객에게 주도권을 내어주는 즉흥극의 현장에서 배우는 곧 작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처음>의 배우들에게 돋보이는 것은 작가다운 순발력이라기보다는 아직은 배우다운 에너지이다. 관객이 던진 설정을 이야기로 엮는 과정에서 서사가 만들어지기보다는 배우의 개인기가 도드라지니 말이다. 이것은 재미의 요소가 되기도 하지만 극을 끝내 산만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어떤 배우는 말이 너무 많고 어떤 배우는 쉼표가 너무 많아 극의 흐름이 빈번히 깨지는데도 그들은 마냥 즐겁다. 즉흥극이라기보다는 그저 배우들끼리 노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즉흥이라는 틀 안에서 서사를 만들어 나가기에 젊은 배우들의 역량은 아직 충분치 않다.


즉흥의 완성을 판별하는 기준이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음을 기억할 때 상황을 만들어가는 상상력의 느슨함은 무엇보다도 아쉬운 지점이다. 즉흥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설정이 주어져도 원하는 결과물로 연결 지을 수 있는 치밀한 준비가 필요함을 다시금 확인했다고나 할까. 엉뚱한 재료로 근사한 결과물을 만들어낼 때 즉흥의 과정은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막 던진 설정들이 이야기로 잘 구축돼 가는 재미보다는 그 설정들에 황당해하는 배우의 웃음이 더 많았으니, 즉흥의 과정으로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처음>을 지지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흥행을 염두에 둔 비슷비슷한 작품들이 넘쳐나는 창작뮤지컬의 지형에서 이만큼 과감하게 실험을 자청한 작품은 찾기 어렵다. 작품의 완성도나 흥행의 성공 여부를 떠나서 장르의 문법에 거리두기를 하는 작품에서 발견하는 것은 자신감이다. 이런 자신감에서 새로움은 싹틀 것이고 그 새로움은 창작뮤지컬의 영역을 한 걸음 넓힐 것이다. 오늘 처음 만드는 뮤지컬에서 내일 보게 될 뮤지컬에 대한 기대감이 생기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5호 2017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네이버TV

트위터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