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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ULTURE INTERVIEW] 드래그 퀸 모지민 [No.165]

글 |배경희 사진 |김호근 2017-07-05 7,768

드래그 퀸 모지민

나는 나일 뿐


지난 2012년 게이 커플의 이야기를 그린 <라카지>를 본 사람이라면, 드래그 퀸 클럽 ‘라카지오폴’의 아름다운 무용수들 사이에서 흑조 의상을 입은 유독 돋보였던 한 사람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그의 이름은 바로 ‘모어’로 활동 중인 드래그 퀸 모지민. ‘나는 나일 뿐’이라는 <라카지>의 노랫말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가는 그를 만났다.




남다를 수밖에 없었던 시작

                     

자신을 소개한다면 어떤 수식어를 가장 앞에 두고 싶나.

드래그 아티스트 모어(More). 사회 이름이 모지민이라 성을 따서 지은 건데, 2006년 즈음부터 이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 드래그 퀸 외에도, 발레 전공을 살려 무용 관련 일을 많이 한다. 무용 공연을 하거나 안무를 하기도 하고, 학원에서 아이들도 가르친다. 아, 뮤지컬도 잠깐 했다. 이것저것 하는 일이 많아서 어떤 사람들은 나보고 넌 도대체 정체가 뭐냐, 너를 뭐라 설명하기가 애매하다 그러는데, 내 주된 콘텐츠는 누가 뭐래도 드래그 퀸 쇼다. 


최근 드래그 퀸 쇼를 보러 갔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무척 뜨거워서 놀랐다. 그런데 대부분의 호감이 호기심에서 비롯되는 것 같았달까. 사람들에게 그저 특이한 존재, 호기심의 대상으로 여겨진다는 게 어떤 때는 좀 서운하지 않나.

클럽에 쇼를 보러 온 사람들이 나한테 하는 질문은 딱 두 개다. 몇 살이에요? 코 수술한 거죠? 드래그 퀸 쇼를 보러 왔는데, 정작 내가 밤새 고민해 준비한 쇼나 의상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은 거의 못 봤다. 나이는 왜 물어보냐고 하면, 언니로 부를지 말지 정하기 위해서란다. 이 재미난 곳에 와서도 서열 정리가 먼저라니, 그런 사고방식이 너무 아쉽지 않나. 그리고 또 많이 하는 얘기 중 하나가 왜 성전환 수술을 안 하느냐는 거다. 드래그 퀸은 남성이 여성을 표현한 게이 문화 중 하나이지, 트랜스젠더가 아니라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설명하느라 입이 아프다. 외국에서는 드래그 퀸 쇼가 예술의 한 분야로 자리잡았는데, 우리나라에선 아직 인식이 부족한 것 같다.


드래그 퀸 쇼는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2000년 밀레니엄에 처음으로 드래그 퀸 쇼를 했다. 당시 이태원에 일본인 관광객을 상대로 하는 쇼 클럽이 있었는데, 거기 공연 팀에 투입된 거다. 드래그 퀸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때였는데, 주위에서 ‘너 한번 해볼래?’ 그래서 무작정했다. 그리고 그때 ‘트랜스’ 사장님이 가게를 지나가다 우연히 날 보고 ‘너 우리 클럽에 와서 공연해라’ 해서 별 생각 없이 시작했던 게 여기까지 왔다. 트랜스는 요즘 주말에도 공연하는데, 참고로 이곳은 1990년대 중반에 문을 연 이태원에서 제일 오래된 드래그 퀸 쇼 클럽이다. 역사적인 곳이다.


처음 공연하던 때 어땠는지 생각나나.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왜냐면 너무 어렸으니까. 우리가 어릴 때는 생각이 없지 않나. (웃음) 지금이야 나만의 철학을 가지고 있지만 그땐 뭔지도 모르고 막 했는데, 어쨌든 끼가 있었으니까. 생각해 보면 아마 처음엔 드래그 퀸의 허구성이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드래그 퀸 쇼의 대표적인 것 중 하나인 ‘립싱크 쇼’를 하는 게 재밌었다. 예를 들어, 내가 비요크의 노래로 공연한다면 그 순간에 난 비요크가 될 수 있는 거다.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내 나름대로 재창작한 쇼로 말이다. 그 점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예술

                     

지금까지 한 많은 공연 중에 특별히 기억에 남은 게 있을까.

2006년 엠넷 MKMF(지금의 MAMA) 엄정화 무대에 참여했는데, 나중에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로 굉장한 화제를 모았다. 10년 전 TV 시상식에 나 같은 애들이 나와서 춤을 췄으니까 컬처 쇼크일 수밖에. (웃음) 이후 이은미, 백지영, 이효리 같은 우리나라 디바 여가수들과 작업하게 됐는데, 준비 과정에서 고생은 했지만 결과물은 다 마음에 들었다. 트랜스에서 처음 공연하던 것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한복 차림에 어우동 모자를 쓰고 달타령을 해서 다들 ‘쟨 뭐야, 또라이 아냐’ 하는 반응을 보였거든. (웃음) 근데 그땐 지금보다 에너지가 많아서 그 모든 것에 당당했다. 또 언제 한번은 쇼 중에 소 간을 먹은 적이 있다. ‘글램’이라는 이태원 클럽에서 할로윈데이 쇼를 할 때 황병기 선생님의 ‘미궁’을 틀어놓고 간을 먹은 거다. 그냥, 남들처럼 가짜 피 묻히고 나와 공연하긴 싫더라.


사람들 반응이 극과 극이었을 것 같은데.

물론 호불호가 나뉘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쇼는 쉽게 수용하기엔 너무 특이하고 세니까. 보통 사람들은 브리트니 스피어스나 비욘세, 레이디 가가 같은 대중적인 노래로 쇼하는 걸 더 좋아한다. 그런데 난 늘 의외의 선곡을 한다. 몇 달 전에 ‘신도시’에서 열린 매거진 <뒤로> 발간 파티에서는 양희은 선생님의 ‘봉우리’라는 노래로 공연을 했다.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 봤던 작은 봉우리 얘기해 줄까’ 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하는 노래인데, 그 가사에 맞춰 딜도를 꺼내들었더니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우는 사람들도 있었다. 좀 거창하게 말하면, 이번 생은 이렇게 남들이 하지 않는 거 하면서 살아야 할 것 같다.


아티스트로서 당연히 자기만의 색깔을 지향해야겠지만, 그래도 유독 남들과 다른 걸 고집하는 이유가 있을까?

취향의 문제인 것 같다. 잘난 척하려는 게 아니라, 어렸을 때부터 보는 영화, 듣는 음악이 너무 달랐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고등학생 때 영화 <서편제>를 보고 감동받아서 학교 가서 그 이야기를 엄청 했다. 예고를 다녀서 학교에 국악 하는 애들이 있었는데, 국악반 애들한테 너무 감동적이지 않냐고 했더니 다들 세상 지겹다는 거다. 도대체 그게 뭐가 재밌냐고. 나는 비디오테이프 사서 테이프 늘어지도록 보면서 엔딩 신에서 안숙선 선생님이 부른 ‘심청가’를 따라하고 그랬다.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좀 달랐는데, 이게 되게 외롭다. 좋아하는 거에 대해 같이 얘기할 사람이 많이 없으니까 너무 외롭지.


어쩌다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면 구원받는 듯한 기분이 들겠다.

정말 그렇다. 최근에는 뮤지션 이랑이 내 인생의 가장 핫한 존재다. 중요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 만나게 될지 모른다고, 몇 년 전에 미미시스터즈 콘서트에 게스트로 춤추러 갔다 거기서 이랑을 알게 됐다. 미미시스터즈랑 친해서 공짜로 갔던 건데, 만약 내가 그때 노 개런티로 그곳에 가지 않았다면 이랑을 못 만났을 거다. 나이 먹을수록 세상에 그냥 일어나는 하찮은 일은 없단 생각이 든다. 어쨌든 이랑은 요즘 내게 굉장히 영향을 끼치는 존재라 최근에 ‘나는 왜 알아요 / 웃어, 유머에’ 뮤직비디오를 촬영했을 때 장소도 무료로 제공해 줬다. 그 장소라는 게 우리집이지만. (웃음) 이 인터뷰를 하게 한 인스타그램(이번 인터뷰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성사됐다)도 원래는 비공개 계정이었는데 이랑 때문에 전체 공개로 바꾼 거다.


SNS를 비공개 계정으로 운영한 이유가 있었나.

나를 아름답다고 생각해 주는 분들도 있는 반면 가십거리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때때로 불특정 다수의 공격 대상이 되는 것도 싫었다. 최근 대선 후보 토론에서 동성애 이슈가 수면 위로 떠올랐을 때, 세상에 여전히 많은 호모포비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나. 사실 나는 이런 부분에 대해 대화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가령 내가 누군가를 만난다고 했을 때, 사람들에게 ‘축하해’라는 말을 들었으면 하지 ‘상대가 여자야, 남자야’ 하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냥, 된장찌개를 좋아하느냐, 김치찌개를 좋아하느냐 같은 취향 문제인데, 그걸 마치 나라는 사람의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게 싫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어렸을 때는 살 수 없을 정도의 고통을 겪었다. 당연히 죽을 생각도 많이 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나에게 돌을 던졌으니까. 내가 단지 여성스럽단 이유만으로 말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남들과 다르단 이유로 자살을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사람은 누구나 존재 자체로 아름답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에게 당신을 더 알릴 수 있을까.

아니, 괜찮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아도 된다. 내게는 내가 하는 행위 자체가 중요하다. 누가 보든 안 보든. 아니, 물론 누가 보긴 해야겠지만. (웃음) 개인적으로 안은미 안무가를 정말 존경하는데, 선생님은 지금도 빚져가며 마이너스 통장으로 공연하신다. 그러면서 항상 하시는 말씀이 사람들은 만 원, 이만 원 모아서 아파트 사는 게 중요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당신은 당신 작품이 중요하다는 거다. 그걸 아무도 몰라도 되고, 자기만 알고 죽으면 된다고. 육십 가까운 연세에 예술을 위해 몸 바치며 사시는 선생님이 늘 너무 아름답게 느껴진다. 사실 나도 그렇고, 내 절친 이랑도 그렇고, 우린 다 가난하다. 가난하지만, 그냥 예술이 좋다. 예술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돈이 안 되도 하는 거다.


당신으로 하여금 예술에 몸 바치게 한 예술가는 누구인가.

조니 미첼, 케이트 부시, 애니 레녹스, 비요크. 비요크의 ‘It’s Oh So Quiet’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립싱크 쇼 레퍼토리 중 하나다. 다른 세 사람도 내게는 다 신 같은 존재고. 사람마다 삶의 기준은 다르겠지만, 난 만 원짜리 CD 사서 그거에 감동받는, 영혼이 부유한 사람으로 살다 가고 싶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5호 2017년 6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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