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의 뜨거운 공연 트렌드
장면 1.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계단 밑의 어둡고 좁은 공간에 있는 의자에 앉는다.
머지않아 앳된 얼굴의 한 여자가 다가와 옆에 있는 화장실에 들어가 씻으려는 듯 옷을 벗기 시작하며
자신이 사랑에 빠졌던 경험을 조근조근 얘기해 준다. 그러다 묻는다.
“너도 사랑해 본 적이 있어?” 표면적으로는 관객과 배우로 역할이 구분돼 있는 상황이지만,
한 명의 관객과 한 명의 배우, 단 둘이 마주한 이 순간의 친밀함은 관객과 배우라는 공적인 관계를 뛰어넘는다.
장면 2. 불그스름한 조명이 비치는 넓은 공간에서 턱시도 차림의 남자와 파티 드레스를 차려 입은 여자가
열정적으로 춤을 춘다. 하얀 가면을 쓴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면, 갑자기 남자와 여자가 군중을 뚫고 달린다.
사람들 중 일부는 그들을 따라 같이 달리고, 일부는 그 자리에 남았다가 또 다른 공간으로 움직인다.
어두운 조명 아래에 무리 지어 있는 하얀 가면의 사람들은 귀신처럼 보이기도 하고, 오컬트 집단 같기도 하다.
장면 3. 화려한 파티복 차림에 그로테스크한 동물 가면을 쓴 사람이 다가와 전화기를 압수하고,
검은 천으로 관객의 눈을 가린다. 눈을 가린 채 지시에 따라 손을 내밀면 칼로 손을 지그시 누르며
바깥에 나가 이 시간, 이 공간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해 발설하면 보복이 뒤따를 것이라고 조용히 경고를 준다.
위의 세 장면 모두 최근 뉴욕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끄는 공연 트렌드 중의 하나인 ‘이머시브 시어터(Immersive Theater)’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다. 객석에서 정해진 무대 위 배우들의 연기를 수동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관객이 작품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형식을 통틀어 이머시브 시어터, 우리말로는 관객 참여형 공연이라 하는데(특수한 시나리오 안에서 관객이 한 명의 배우로서 공연을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관객 몰입형 공연이라는 번역이 조금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최근에 유행하는 것은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고 모든 공간을 무대로 활용하는 이머시브 시어터다.
이머시브 시어터 열풍의 기폭제 <슬립 노 모어>
이머시브 시어터의 트렌드를 선도한 작품은 지난 2011년 영국에서 건너온 극단 펀치드렁크의 <슬립 노 모어(Sleep No More)>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모티프를 따온 작품이다. 2000년 영국에서 예술감독 펠릭스 바렛의 지휘로 시작된 펀치드렁크의 정식 이름은 ‘Punchdrunk Theatrical Experiences(펀치드렁크 연극적 경험)’로, 이름에서 기존의 연극과는 다른 지향점을 추구하는 극단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난다. 2000년 게오르그 뷔흐너의 고전 <보이첵>을 시작으로 현재까지 10편이 넘는 이머시브 공연을 선보였는데, 2003년 런던에서 초연한 <슬립 노 모어>가 그 대표작이다. 미국 공연은 2009년 보스턴에 위치한 아메리칸 레퍼토리 시어터가 공동 제작을 맡아 보스턴 근교에 위치한 낡은 학교에 처음 올라갔으며, 그때의 호평으로 2011년 뉴욕에 입성했다.
뉴욕 공연은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대형 공연의 프로듀서로 활동한 조너선 호크월드와 소규모 극장인 더 박스에서 주로 벌레스크 공연을 만들었던 랜디 위너, 뉴욕 부동산계의 신예인 아서 카파티가 이머시브(발음은 같지만 Immersive가 아닌 Emursive)라는 이름의 제작사를 만들어 올렸다. 첼시의 하이라인 공원 근처에 위치한 매키트릭 호텔을 공연장으로 사용했는데, 매키트릭 호텔은 1939년에 설립돼 제2차 세계대전 즈음 운영이 중단된 후 창고로 사용하던 5층짜리 건물을 공연에 맞게 낡은 호텔로 개조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관심을 모았다. 덕분에 뉴욕 초연 당시 특별한 홍보를 하지 않고 100달러가 훌쩍 넘는 비싼 가격에 티켓을 판매했음에도 연일 매진을 기록하는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공연이 순항하자 프로듀서들은 옥상에 칵테일 바를 만들어 영화 상영회 같은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하고 공연 외에 다양한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공연장을 재창조해 공연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얻기도 했다.
<슬립 노 모어>는 관객이 두세 시간 동안 1층에서 5층까지 호텔 전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공연을 볼 수 있는데, 어느 순간에 어디에 있는지에 따라 각각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특징이다. 이미 5년 이상 공연했기 때문에 지금은 인터넷에 다양한 관람 가이드가 존재하지만, 사람에 따라 특별한 목적 없이 건물을 돌아다니기도 하고 배우를 쫓아다니며 공연을 보기도 하는 등 관람 방법은 다양하다.
『맥베스』에서 모티프를 얻은 내용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총 스물다섯 명의 배우들 모두 『맥베스』에 등장하는 인물을 맡아 연기하는데, 맥베스의 죽음이나 던컨왕의 무도회 등 모두 열 가지가 넘는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1층부터 5층까지 무도회장, 로비, 호텔방 등의 일반적인 호텔 구조로 구성되어 있지만 각 층의 성격에 따라 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다르다. 예를 들어 1층의 무도회장은 공연에서도 무도회장으로 쓰이고, 3층의 호텔방은 맥더프 가의 방이나 맥베스의 침실로 쓰이는 식이다. 배우들은 대사 없이 잘 짜인 동작과 안무로 상황을 보여주는데, 운이 좋으면 배우들 손에 이끌려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공간에 들어갈 수도 있다(이미 온라인상에 무도회 장면에서 몇 번째 나무 근처에 서 있으면 배우에게 잡혀갈 수 있다는 등 많은 정보가 돌고 있으니 공연을 보기 전에 온라인 가이드를 보는 것도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이다).
대표 이머시브 시어터 극단 서드 레일 프로젝트
<슬립 노 모어>가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면서 이머시브 공연 자체에 대한 관심이 커지긴 했지만, 사실 이전부터 다양한 이머시브 공연을 제작해 온 단체들도 있다. 서드 레일 프로젝트(Third Rail Projects)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예술감독을 맡고 있는 잭 모리슨, 톰 피어슨, 제닌 윌렛 세 사람 모두 안무가 겸 연출가로, 2008년 뉴욕의 시티/댄스 시리즈인 댄스페이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장소 특정적 현대무용 공연 <배니싱 포인트(Vanishing Point)>을 선보이면서 출발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9년 뉴욕 로어이스트사이드의 문화유산인 아브론스 아트센터에서 무용, 행위예술, 설치미술 요소를 적절히 섞어 관객들의 참여를 유도한 <스팀펑크 하운티드 하우스(Steampunk Haunted House)>로 뉴욕 공연계에 극단의 이름을 알린다. 서드 레일 프로젝트의 대표작은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댄 쉬 펠(Then She Fell)>로, 2012년에 개막해 현재까지 전 공연 매진을 기록하며 인기를 끌고 있다.
<댄 쉬 펠>은 과거 정신병동이었던 지상 2층짜리 건물을 공연장으로 탈바꿈해 공연 중인데, 매회 12명의 관객만 입장할 수 있다. 관객들이 자유자재로 공연장을 나올 수 있는 <슬립 노 모어>와 달리 <댄 쉬 펠>은 공연의 시작과 끝이 정확히 정해져 있다. 의사 사무실처럼 꾸며진 곳에서 의사복 차림의 남자가 관객들의 휴대폰을 비롯한 소지품을 수거한 후 공연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해주는 것으로 공연이 시작되는데, 이후 1960~70년대 스타일의 간호사 복장을 한 배우들이 한 명 또는 두 명씩 관객들을 데리고 나간다. 배우들의 손에 이끌려 공간을 이동하면서 각각 다른 장면을 보게 되지만 결국 철저한 계산 아래 공연의 거의 모든 장면을 다 보게 된다는 점에서 <슬립 노 모어>와 차이가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모티프를 가져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나 작가인 루이스 캐럴의 전기적인 이야기도 다룬다. 따라서 우리에게 친숙한 앨리스나 모자 장수, 흰 토끼, 하트의 여왕 등 외에 낯선 캐릭터도 등장한다. 소아성애자라는 의심을 받는 캐럴과 동화의 모티프가 되었던 소녀 앨리스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순수함과 어두움이 공존하는데, 두 대립되는 이미지를 안무로 표현하는 것이 가장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앨리스와 캐럴이 함께 춤을 추는 장면이나 앨리스가 혼자 독방에서 부자연스러운 동작으로 자학하는 듯한 춤을 추는 장면이 그렇다. 이외에도 루이스 캐럴인 듯한 인물이 다가와 자기의 편지를 대필해 달라고 하는 장면이나 어두운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있으면 누가 들어와 거울 나라의 앨리스의 한 장면(마치 자기 전에 책 읽어주듯)을 읽어주는 장면 등은 <슬립 노 모어>와는 다르게 내러티브가 좀 더 명확하다. 원작의 아기자기함을 잘 살렸다는 점에서 좀 더 매력적이기도 하다.
서드 레일 프로젝트의 또 다른 작품인 <그랜드 파라다이스>는 <댄 쉬 펠>이 공연 중인 건물에서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부쉬웍 근처에 있는 창고에서 공연한다. 이 작품은 1970년대 리조트로 관객들을 데려간다. 창고처럼 생긴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비행기 티켓처럼 생긴 공연 티켓을 관객들에게 나눠준다. 줄을 서서 기다리면 4~5명씩 그룹을 지어 공연장으로 인도되는데, 들어가는 길에 작은 공간이 있어 그 안에서 기내 안전에 관한 방송을 듣는다. 레트로한 느낌의 안내 방송을 듣고 다른 쪽 문이 열리면 관객들은 이미 그랜드 파라다이스 호텔의 뜰에 들어와 있다. 중간에 분수대가 있는 널찍한 공간을 중심으로 가장자리에는 해변가의 바, 조그만 가지보(천장이 있는 미국식 정자), 해변가의 방갈로 등 공간이 펼쳐져 있다. 관객들이 입장을 마치면, 1970년대 의상 차림의 한 가족이 도착하고, 그 가족이 이 환상 속의 리조트 같은 곳에서 하는 다양한 경험을 관객들도 함께 경험한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리조트의 직원처럼 보이는 사람과 춤을 추기도 하고, 지도를 그리기도 하고, 매듭을 짓거나 남의 옷을 훔쳐 입기도 한다. 공연은 가족들이 환상에서 벗어나서 현실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나는데 <댄 쉬 펠>만큼의 임팩트는 없었지만, 이전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시각적, 음악적 컨셉으로 평단의 사랑을 받았다.
무도회 형식의 이머시브 시어터 <일루미나티 무도회>
인기 이머시브 시어터 작품 가운데 가장 후발 주자이긴 하지만 작년부터 큰 반향을 끌고 있는 <일루미나티 무도회>는 배우, 작가, 연출가, 미술가 등 다양한 이력을 지니고 있는 신시아본 뷰엘러가 연출한 작품이다. 1972년에 실제로 열린 일루미나티 무도회를 바탕으로 관객들이 무도회에 참가하는 컨셉의 작품인데, 한 사람당 450달러를 호가하는 비싼 티켓에도 불구하고 한 달에 1~2회 공연하는 이 공연 역시 거의 매회 매진을 기록한다. 한 공연당 서른 명의 ‘게스트’를 들이는 <일루미나티 무도회>는 저녁 6시에 리무진 버스를 타고 어퍼이스트사이드에서 출발해 뉴욕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호숫가의 맨션에서 파티를 진행한다. 게스트들은 참가 신청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각자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일루미나티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 등의 질문에 답해야 하고, 그러면 주최 측에서 참가 자격을 주는 이메일을 보내준다. 워낙 비밀스럽게 진행되기에 자주 묻는 질문 섹션에는 실제로 컬트에 소속되는 건 아닌지, 섹스 파티는 아닌지, 악마와 계약을 맺는 건 아닌지 등의 질문과 이에 대한 친절한 답변을 주는 흥미로운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턱시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드레스에 정장을 입고 참석해야 하는 이 공연은 확실히 앞에 설명한 다른 공연보다 더 많은 참여를 요구하는데, 그런 의미로 기존 이머시브 시어터의 경계를 더욱 넓히는 공연으로 획을 그었다. 올여름부터는 뉴욕 시내에서 좀 더 작은 규모로, 좀 더 저렴한 무도회를 연다고 하니 그것도 관심이 가는 부분이다.
앞서 예를 든 공연들은 이벤트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최근 브로드웨이에서 인기리에 공연 중인 <나타샤, 피에르, 그리고 1812년의 대혜성>과 마찬가지로, 다른 극단들도 전통적인 연극과 이머시브 시어터 형식을 적절하게 버무려 디너 파티 형식으로 공연을 올리고 있다. 또한 최근에는 이머시브 시어터 형식을 혼합해 마케팅하는 공연 겸 방 탈출 게임 전문 공간도 등장했다. 직접 경험을 해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현세대의 욕구와, 좀 더 새로운 것들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욕구가 잘 결합된 이머시브 시어터 장르는 아마도 앞으로 한동안 뉴욕 공연계의 뜨거운 감자로 남지 않을까 생각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4호 2017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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