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도 소녀시대의 퍼포먼스로 브라운관을 화려하게 수놓은 ‘태연’이 뮤지컬이라는 새로운 무대에 설 준비를 하고 있다. 소설, 드라마, 영화로도 잘 알려진 <태양의 노래> 주인공 아마네 카오루. 자신의 선천적 아픔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음악에 대한 열정으로 삶의 희망을 노래하는 캐릭터다. 화려한 조명과 음악에서 한 걸음 떨어져 새로운 무대를 꿈꾸는 태연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태연, 김태연, 그리고 카오루
대중이 태연의 목소리를 온전히 한 곡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2년 전 드라마 OST를 통해서였다. 드라마 자체도 인기가 많은 작품이었지만, 선이 고운 성숙한 음색과 풍부한 감성이 실린 노래도 꽤나 유명했었다. 아홉 명이 한 곡을 나눠 부르는, 고작해야 2~4마디를 두세 번 읊조리면 그만인 소녀시대의 노래로 태연의 호소력 깊은 보이스를 온전히 느끼기엔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아이돌 스타 캐스팅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 버린 지금,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태연과 뮤지컬이 만날 날을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그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
태연은 대중들의 예상보다 먼저 스스로 이 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듯하다. “데뷔 초부터 뮤지컬에 관심이 많았어요. 소녀시대 활동하느라 자주 보러 다니진 못했는데, 제대로 뮤지컬을 처음으로 본 건 2008년에 국립 해오름극장에서 했던 (옥)주현 언니의 <시카고>였어요. 하고 싶은 마음이 활활 불타오를 정도였죠. 그때부터 마음이 뮤지컬 쪽으로 완전히 굳어졌어요.” 이런 마음이라면 같은 팀에서 함께 보컬을 맡고 있는 제시카가 먼저 뮤지컬로 진출한 것이 내심 자극이 되지 않았을까, 이에 대한 반응이 꽤 쿨하다. “많은 콜을 받았지만, 앨범 혹은 라디오 등의 개인 활동으로 놓친 작품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좋은 작품으로 좋은 기회가 온다면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고 회사 쪽에 강하게 말씀드렸죠. 다행히 앨범 활동을 쉬는 시기에 좋은 기회가 와서, 제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해주신 것 같아요.”
사실, 태연은 <태양의 노래>와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었다. “처음 접한 건 OST를 통해서 였어요. 연습생 시절, 유이(YUI, 영화 <태양의 노래>의 주인공이자 뮤지션)라는 가수를 알게 됐는데, 유이가 부른 ‘Goodbye Days’를 듣고 정말 좋아서 아침마다 연습실에 가서 노래 연습하고 그랬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영화, 드라마, 원작 소설까지 있었던 거죠. 그래서 다 봤어요.(웃음) 뮤지컬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무조건 하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뮤지컬의 어떤 점에 끌렸는지 물으니 재미있는 대답이 돌아온다. “카메라가 없다는 게 진짜 좋아요. 일종의 직업병 같은 건데, 나의 행동과 말이 다시 저에게 돌아오기 때문에 상처나 불안감이 있어요. 뮤지컬 무대를 보면서 자유로움을 느꼈죠. 저 무대에서만큼은 춤과 노래를 다양한 동선으로 할 수 있을 것 같고, 가장 자연스런 저를 보여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자유로워 보였어요. 춤, 연기, 노래 모두가 있는 완벽한 무대인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오르더라고요. 관객으로 볼 때도 그랬는데, 실제 뮤지컬 연습을 하면서도 그런 걸 느껴요. 소녀시대 연습실에서는 거의 안무 위주로, 앨범 준비할 때는 다리 각과 손 각도 하나까지 칼처럼 다 맞추도록 연습해요. 아홉 명이 하나같이 보여야 하니까요. 하지만 뮤지컬 안무는 선이 부드럽고, 자유로운 것 같아요. 각각의 매력이 다 있긴 한데, 내 체형에 맞게, 내 느낌에 맞게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점 때문인지 요즘은 새로 배우고 있는 이 뮤지컬의 자유로움이 좋아요.”
잠시 장면 연습을 지켜보았을 뿐이지만, 옆에 있는 서울시뮤지컬단 단원들과 오랜 동료처럼 어울리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미 5년 3개월이라는 연습생 기간과 데뷔 후 3년, 총 8년간 기다림의 시간들을 지나와서일까. 어디서든 빛나야 하는 아이돌 스타라기보다는 단체 생활에서 자신이 나서야 할 때와 그렇지 않은 때를 아는 사람의 느낌이었다. “아이돌 가수 소녀시대라는 느낌을 버리고 봐주셨으면 해요. 뮤지컬에서 난 연예인이 아니고 최대한 이 분위기에 적응하고 있는 막내일 뿐.” 스물두 살의 아이돌 스타 ‘태연’이 아니라 태양을 볼 수 없는 나름의 사정이 있는 평범한 스트리트 뮤지션 아마네 카오루가 되어, 자연인 김태연을 무대에서 보여주고 싶다는 것이 뮤지컬 데뷔를 앞둔 태연의 바람이다.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덴카와 아야의 원작 소설과 영화 <태양의 노래>의 주제가 ‘Goodbye Days’, ‘It’s Happy Line’, ‘Skyline’ 3곡을 바탕으로 하여 창작뮤지컬로 각색한 뮤지컬 <태양의 노래>에 대한 태연의 애정은 남다르다. “원작의 느낌도 좋고, 원곡도 좋아요. 무엇보다도 카오루란 캐릭터가 매력적이에요. XP(색소성 건피증)라는 병 때문에 태양을 못 보는 불편함과 언제 신경마비가 발병할지 모른다는 불안함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이지만, 그런 점 때문에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아요. 아파서 언제 떠날지 모르지만 살아있는 날까지 노래하고, 내 주위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가진 인물이죠. 무엇보다 뮤지컬로 각색이 되면서 분위기가 한층 밝고 역동적이 되었어요.”
아무리 남다른 애정이라 해도 2010년 들어 소녀시대 정규 앨범에 리패키지 앨범 활동까지 해야 했던 빡빡한 스케줄로 연습에 올인 해야 하는 뮤지컬 출연 결정이 쉽진 않았을 텐데, 자신도 예상치 못했던 상황임을 인정하며 믿음직스럽게 웃는다. “뮤지컬을 하기로 결정을 했을 때는 리패키지 음반 활동 스케줄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어서 이렇게까지 힘들 줄 몰랐죠. 하지만 스케줄이 있었다 해도 이 기회는 놓치고 싶지 않았어요. 선택한 것에 대해선 힘들 각오를 하고 임한 것이니 후회도 없고요.”
연습실 한편엔 ‘Taeyeon’이라 써 있는 기타가 놓여 있었다. “기타는 카오루와 세상을 이어주는 끈이기 때문에 직접 연주해야 할 것 같아 열심히 연습하고 있어요. 공연에서 기타를 치며 불러야 하는 노래는 다 연주하며 할 수 있어요. 리듬을 일정하게 다듬어 가고 있는 중이에요. 연습할 때 최대한 집중하고 있어요. 재미있는 건, 제가 가사를 조금 잘 까먹는 편인데, 자꾸 생각하고 긴장하고 있나 봐요. 기타도 그렇고 대본도 그렇고 한 번 연습하고 다 외웠어요. 스스로도 정말 놀라고 있어요. 하하.” 아무래도 소녀시대가 아닌 태연이란 이름으로 대중 앞에 서는 무대다 보니 긴장이 클 법도 하다. “사실 긴장이 많이 돼서 잠도 잘 못 자요. 멤버 중에 윤아가 드라마를 했을 때, 정말 열심히 혼자 중얼중얼 연습을 했거든요. 그래서 저도 녹음기에 상대 배우인 코지 역의 대사를 간격을 두고 녹음해서 그것을 들으면서 내 대사를 외우죠. 열심히 연습하고 있는데, 숙성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연기가 처음이다 보니 자신이 아닌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부담도 있지만, 하다보니 카오루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면을 찾아내게 되고, 그런 순간 조금씩 부담을 지워가며 자신의 색을 묻혀가고 있다고 한다. “아프다고 너무 요란하지도 않고, 혼자 세상 다 산 사람처럼 슬픈 아이도 아니고. 그저 10대 그 나이의 여느 아이들과 같은 느낌이었어요. 친구랑 이런저런 수다도 떨고, 아빠랑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남자애를 보고 설레어 하기도 하고 똑같더라고요. 그래서 저의 10대를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하려고요.” 처음의 부담과 어색함을 자신만의 자연스러움으로 채워가기로 한 그녀에게 가장 편하고 공감이 가는 장면을 물으니 상대 배역인 코지랑 단둘이 데이트하는 장면을 꼽는다. “제 생각엔 보통의 저와 가장 비슷한 느낌이 나는 장면이에요. 실제 코지 역의 배우 분이랑 있으면 아직까지 약간은 쑥스럽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데, 그래서인지 떨리고 설레더라고요. 연기라 생각하지 않고 실제로 그런 기분이 드니까, 하면서 아, 이런 느낌이구나 싶기도 하고. 참 마음이 편했던 장면이에요.”
태연은 그간 <캣츠>, <미녀는 괴로워>, 최근에는 <형제는 용감했다>를 재미있게 보았다고 한다. “다른 배우들의 공연을 많이 보는 게 도움이 되는 것 같아요.”라며 각 작품에서 얻은 느낌들을 신나게 이야기한다. “<미녀는 괴로워>에서 바다 언니를 보며 깜짝 놀랐어요. 몸짓, 표정이 노래할 때 멋지게 바뀌잖아요. 정말 확확 바뀌는 걸 보면서 순간의 집중력과 몸을 부리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한 작품이었어요. 최근에는 홍록기, 이지훈 오빠의 <형제는 용감했다>를 봤는데, 최근에 봐서 그런지 연기나 동선 부분이 저에게 도움이 가장 많이 되고 있어요. 주현 언니 공연은 일부러 찾아가서 보는 편이고요.” 그간에 본 작품들의 느낌을 무대에 서는 사람의 입장에서 조목조목 이야기하는 모습은 이번 무대가 가수 활동 중 잠깐의 외유보다는 소박하고 알찬 시작이 될 것 같은 인상이다.
맘에 들지 않은 무대를 선보였을 때 어떤 마음이냐고 물으니 “잘못된 것이 무엇인지 하루 종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는 그녀는 자신의 선택과 그것에 따르는 책임을 잘 이해하는 사람이다. 또한, 인간 김태연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싶다는 담담한 의지를 통해 그 부담을 어떻게 즐기고 극복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다. 이제 그녀는 아홉 명의 주연이 함께 나누었던 것을 홀로 짊어져야 하는 무대를 앞두고 숨 고르기를 하고 있다. 그 침착한 심호흡 후 오르게 될 무대, 그곳에서 그녀가 느끼게 될 자유로움이 함께 기대되는 순간이다.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80호 2010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