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낙하산이 아니었어요.” 어엿한 뮤지컬 배우로 자리매김한 이지훈이 지금까지 자신의 출연작을 쭉 훑어본 후 가장 먼저 한 말이다. 그의 말대로 그가 얻은 기회가 노력으로 맺은 결실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어느새 뮤지컬 배우 11년 차를 맞은 이지훈. 데뷔 초 뮤지컬의 재미를 느끼게 해준 <햄릿>으로 9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서는 그와 함께 지난 작품을 되돌아봤다.
혹독했던 데뷔작 <알타보이즈>
“11년 전에 제가 첫 뮤지컬을 했을 때는 지금처럼 연예인이 뮤지컬을 많이 하는 분위기가 아니었어요. 간혹 연예인이 뮤지컬을 한다고 해도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고요. 제가 뮤지컬을 하게 된 건 ‘새로운 도전’이라는 타이틀에 끌렸기 때문이에요. 장르 자체도 새로운데, <알타보이즈>는 파워풀한 댄스와 쇼맨십이 요구되는 작품이라 발라드 가수의 고정관념을 깰 수 있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시험대에 오르는 기분으로 뮤지컬에 도전했죠. 그런데 제가 생각해도 창피할 정도로 못했던 것 같아요. 당연히 혹독한 평가가 쏟아졌죠. 무대에 선 다른 배우들하고 실력 차이가 엄청 났을 텐데, 그 부족한 공연을 봐준 팬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생각해 보면 아직도 죄송해요. (웃음) 첫 무대에서 단단히 쓴맛을 봤죠.”
처음 경험한 희열 <햄릿>
“데뷔작을 못해서 그랬는지 뮤지컬계에서 저를 찾는 연락이 뚝 끊겼어요. (웃음) 그러다 2년 만에 출연 제안이 들어왔는데, 그게 <햄릿>이었죠. 사실 쓴맛을 한 번 봤던 터라 처음에는 출연이 망설여졌어요. 내가 다시 뮤지컬을 할 수 있을까 반신반의했죠. 지금과 비교하면 뮤지컬 배우로서 역량이 턱없이 부족했겠지만, 제가 기량을 펼칠 수 있던 작품을 운 좋게 만난 것 같아요. 엔딩 신에서 거의 숨넘어갈 듯 노래를 마치고 나면 뜨거운 박수가 쏟아졌는데, 그때의 희열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어요. 열심히 준비한 작품에 관객들이 감동을 받고, 그게 다시 박수로 돌아올 때의 기분은 정말 행복하더라고요. 9년이란 오랜 시간이 흐르고 다시 <햄릿>을 하게 됐는데, 초심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돼요.”
이미지 변신 <쓰릴미>
“계속해서 순수한 총각 선생님이나 지고지순한 순정파 같은 착한 캐릭터를 맡다 보니, 자연스레 이미지 변신에 대한 갈망이 생겼어요. 배우로서 특정 이미지로 굳어지는 건 아닐지 고민하고 있을 때, (전)뮤지컬해븐의 박용호 대표님이 <쓰릴미>의 리처드라는 착함과는 거리가 먼 의외의 역할을 제안해 주셨죠. 제 안의 다른 본성을 꺼내보라면서요. 나를 다른 이미지로 봐주시는 분들도 있구나 처음엔 놀랐어요. 처음 해보는 소극장 2인극 공연에 마니아층이 워낙 두터운 작품이라 부담은 됐지만, 작품에 폐가 되지 않도록 혹독하게 노력했던 것 같아요. 한 팀이었던 (오)종혁이랑 서로 리허설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서 밤늦게 만나 새벽 네다섯 시까지 연습하던 게 아직도 생각나요.”
도전 중의 도전 <영웅>
“3년 전쯤 <영웅> 출연과 관련해 제작사 에이콤의 윤호진 대표님을 뵙고 오디션 아닌 오디션을 본 적이 있어요. 그때 대표님께서 말씀하시길, 얼굴에 아직 인생이 덜 묻어나니 10년 후에 다시 보자셨어요. 존경받는 위인 안중근의 이야기를 그린 <영웅>은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작품이라 언젠간 기회가 오겠지 막연하게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기회가 빨리 왔죠. 윤호진 대표님께서 작년 가을에 했던 <킹키부츠>를 보시고선 이제 안중근 역을 시켜봐도 되겠단 생각이 드셨대요. 내가 삼 년 동안 허투루 살진 않았구나 싶더라고요. 제가 표현하고 싶었던 안중근은 흔히 떠올리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강직하고 우직한 이미지가 아니라 그보다 조금 더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청년 이미지였어요. 다행히 제 의도를 알아준 관객분들이 많아서 참 뿌듯했죠.”
자신과의 싸움 <에비타>
“<에비타>를 하기 전에 배우로서 첫 슬럼프를 겪었어요. 초연 창작뮤지컬 <원효>가 예상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 돼서 마음고생을 했거든요. 제작사의 애초 계획은 LED 기술을 사용한 첨단 테크놀로지 작품을 만드는 것이었는데, 무대 어디서도 첨단 기술을 느낄 수 없었죠. 아마 관객들이 더욱 당황했을 거예요. 조금 낙담했지만, 작품 선택에 명확한 기준을 두자는 교훈을 얻었죠. 그런데 <에비타>에서 훨씬 큰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어요. 독설가로 유명한 이지나 연출님이 저를 시험에 들게 하셨거든요. (웃음) 연습 내내 계속된 연출님의 호된 독설에 자존심이 무척 상했지만, 하느님께 매일 눈물로 기도하면서 묵묵히 버텼죠. (웃음) 그 결과 공연 개막 전 마침내 연출님께 인정을 받게 됐는데,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기분이었어요.”
터닝 포인트 <엘리자벳>
“<엘리자벳>의 바로 전작이었던 <파리의 연인> 흥행 성적이 안 좋아서 그랬는지 그 이후로 작품 제안이 다시 한 번 뚝 끊겼죠. 거의 1년 가까이 아무런 이야기가 없다 보니 뮤지컬 배우로서 이력이 이렇게 끝나나 불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러다 <엘리자벳>의 루케니를 만나게 됐어요. 사실 처음엔 황후 시해범이자 극을 이끌어 가는 사회자인 루케니가 저한테 이렇게 잘 맞는 캐릭터가 될 줄 몰랐어요. 2막의 오프닝인 ‘키치’ 장면처럼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장면은 특별한 디렉팅이 없어서 무대를 마음껏 휘젓고 다닐 수 있었는데, 무대에서 편하게 놀다 보니 노래에 대한 부담감도 자연스레 사라졌던 것 같아요. 그 결과 ‘이지훈의 재발견’이라는 칭찬과 함께 한국뮤지컬대상에서 남우조연상까지 받았고요. <엘리자벳>은 배우로서 터닝 포인트가 된 작품이에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4호 2017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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