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시카고>는 1926년에 쓴 모린 달라스 왓킨스의 동명 연극을 각색한 작품이다. 원작인 모린의 희곡은 1920년대 시카고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토대로 만들었다. 록시 하트가 모델로 삼았던 블라 세리프 아난(Beulah Sheriff Annan)은 정부와 다투던 끝에 그를 쏘았다. 강간을 하려는 남자를 쏘았다고 남편에게 전화를 걸기 전 두 시간 동안 ‘훌라 루’ 음악을 반복해서 들으며 춤을 췄다고 한다. 벨마 켈리의 모델은 보드빌 가수였던 벨바 거트너(Belva Gaertner)였다. 벨바는 남편을 자신의 차에서 죽였다. 집 안에서는 진을 비롯한 수많은 술병이 발견됐고, 그녀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둘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시카고 법정은 배심원제로 이루어졌는데 대부분의 배심원은 남자였다. 시카고 법정에서는 예쁘고 매력적인 여성은 사형을 당하지 않는다는 자조 섞인 말들이 떠돌았다. 뮤지컬 <시카고>는 살인 사건도 대중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가십으로만 여기는 당시 언론과 사회를 풍자하면서 작품을 지배하는 형식은 보드빌 스타일을 취한다.
보드빌과 드라마가 뒤섞인 컨셉 뮤지컬
<시카고>는 특별한 무대가 없다. 무대 위에는 오케스트라가 있고 사회자가 쇼를 소개하듯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러한 특징은 첫 곡 ‘올 댓 재즈’에서도 드러난다. 벨마 켈리가 ‘올 댓 재즈’를 부르는 동안 한쪽에서는 록시 하트가 자신의 정부를 살해하는 장면이 펼쳐진다. 배관공과 바람을 피우고 있는 록시 하트는 정사가 끝나고 그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는 것을 알고는 그를 쏴버린다. 이때 배경처럼 벨마는 섹시한 춤을 추는 코러스와 함께 ‘올 댓 재즈’를 부르는데, 이 노래의 가사는 록시 하트의 이야기와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다. 가사는 이렇다. “컴온 베이비 우리 함께 즐겨봐, 올 댓 재즈/ 무릎을 세우고 스타킹 벗고서 올 댓 재즈/ 짜릿하고 멋진 곳으로 가, 술은 차갑고 음악은 뜨거워, 밤마다 화끈하게 즐길 수 있는 곳, 올 댓 재즈” 뮤지컬에서 노래는 대화의 연장선이거나, 속마음을 드러내거나, 아니면 분위기를 형성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첫 곡 ‘올 댓 재즈’는 일반적인 뮤지컬 넘버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노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고민할 필요는 없다. 롭 마샬 감독이 영화 <시카고>에서 친절히 보여준 것처럼 이것은 벨마가 보드빌 쇼를 하고 있는 장면이다. 벨마는 보드빌 가수이고 감옥에 갇히기 전 쇼를 하고 있는 장면과, 록시의 살인 장면을 시간과 공간을 해체해서 섞어 놓은 것이다.
뮤지컬 <시카고>는 어떤 의미에서 컨셉 뮤지컬이라고 할 수 있다. 첫 장면에서 드러나듯이 작품 전체가 드라마와 보드빌 양식이 결합되어 있다. 롭 마샬 감독은 이러한 뮤지컬의 특징을 잘 간파해 뮤지컬 영화를 만들 때 드라마가 전개되는 흑백 톤의 현실 장면과 쇼가 진행되는 컬러풀한 세트 장면을 구별해서 촬영했다. 19세기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대중 쇼 형식인 보드빌(Vaudeville)은 노래와 마임, 단막극, 슬랩스틱 코미디, 서커스 등이 조합된 대중 쇼였다. 영화가 등장하기 전까지 큰 인기를 끌었지만 유성영화가 본격적으로 시도되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 보드빌은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보드빌에 바치는 헌사
보드빌의 흔적은 작품 곳곳에 배어 있다. 일단 사회자와 오케스트라를 거리낌 없이 노출한 형식 자체가 보드빌 스타일이다. 극이 강한 뮤지컬에서는 오케스트라 존재를 최대한 숨기려고 노력한다. 드라마의 집중을 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카고>에서는 일반 보드빌 공연처럼 오케스트라를 노출시키고 사회자를 통해 마치 쇼를 진행하듯 다음 장면을 소개한다. 벨마는 유명한 보드빌 가수였고, 록시 하트는 보드빌 가수를 꿈꾸는 코러스 걸로 등장한다. 처음 감옥에서 록시와 벨마가 만났을 때 벨마는 록시를 무시하지만 변호사 빌리의 도움으로 순식간에 록시가 언론에 조명을 받게 되자 벨마는 록시에게 듀엣으로 보드빌 공연을 하자고 제안한다. 벨마가 두 명의 역할을 한꺼번에 맡아서 설명하는 노래 ‘I Can't Do It Alone’은 실제 둘 다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진 후 작품의 마지막에 둘의 보드빌 쇼로 볼 수 있다.
장면 곳곳에 보드빌 쇼의 흔적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캐릭터에도 유명 보드빌 가수의 오마주로 가득하다. 벨마는 유명한 보드빌 스타 텍사스 가이넌(Texas Guinan)을 오마주한 캐릭터이다. 텍사스 가이넌은 무대에서 종종 “이봐 애송이들(Hello Sucker)”이라고 말을 했는데, 2막 시작할 때 벨마가 등장해서 관객들에게 하는 대사가 바로 “이봐 애송이들, 화장실은 갔다 왔어?”이다. 록시가 남편에 대한 신뢰와 사랑(?)을 노래하지만 결국 속내를 드러내는 그녀의 첫 곡 ‘Funny Honey’는 헬렌 모건의 노래 ‘Bill’을 오마주한 곡이다. ‘Bill’은 특별할 것 없는 남자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는 곡인데, 헬렌 모건이 노래를 부를 때 피아노에 앉은 자세를 자주 취했다고 한다. 뮤지컬에서도 종종 ‘Funny Honey’는 그랜드 피아노 위에서 노래하는 장면으로 연출된다. 영화에서도 록시 하트를 맡은 르네 젤위거가 그랜드 피아노 위에서 이 노래를 부른다.
감옥의 교도소장 마마 모튼이 등장하면서 ‘When You're Good to Mama’를 부른다. 풍만한 육체와 화려한 의상은 등장부터 소피 터커(Sophie Turker)를 연상시킨다. 특히 이 노래는 소피의 외설적인 내용의 ‘You've Got to See Mama Every Night’를 염두에 둔 곡이다. 이외에도 언론의 관심이 떨어진 벨마가 거짓 상황을 설명하는 ‘When Velma Takes The Stand’에서는 1920년대 한창 유행하던 춤 찰스턴을 선보인다. 변호사 빌리가 “All I Care About”를 부르기 전 “행복하신가요?” 하고 던지는 인사는 재즈 클라리넷 연주자 테드 루이스를 오마주한 것이며, 빌리의 뒤에서 하얀 깃털을 들고 춤을 추는 코러스 걸은 샐리 랜드(Sally Rand)의 팬 댄스를 모방한 것이다. 이처럼 <시카고>에는 보드빌에 대한 헌사로 가득하다.
이 작품을 연출하고 안무한 밥 포시는 1927년생이다. 그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보드빌이 저무는 시기였다. 배우였던 부모 밑에서 자란 밥 포시는 어려서부터 공연장 쇼걸들의 품에서 성장했기 때문에 인기가 저물어가는 보드빌의 향취를 경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카고>는 1975년에 초연했다. 그 당시라면 보드빌 스타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을 때인데도 창작진은 이 작품의 컨셉을 보드빌로 삼았다. 그 이유는 다분히 풍자적이다. 진실이 호도되고 정의가 사라진 1920년대 재판 과정이나 황색 저널리즘이 판치고, 음모와 술수가 만연한 온 세상이 쇼라고 풍자하는 것이다. <시카고>는 1920년대 시카고를 배경으로 당시 서서히 저물어가던 대중 엔터테인먼트 양식인 보드빌로 시대를 풍자하고 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4호 2017년 5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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