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더 포 투>
희극성과 놀이성의 애매한 조화
호모 리시오, 웃는 인간
미국 금리의 오름세에 따라 대출금리가 들썩이는 데 마음 졸이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닐 게다. 아, 언제쯤 여유 있게 살 수 있을까. 하지만 내심 알고 있다. 빠듯한 삶에 경제적 여유는 요원하다는 것을. 그래도 우울하지 않은 건 삶의 여유가 단지 경제적인 데서 오는 것은 아님 또한 알기 때문이다. 삶이 불편하지 않기 위해서는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야겠지만, 삶이 비루해지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다운 여유가 있어야 한다. 자기의 삶에 틈새를 낼 수 있을 만큼의 여유도 없는 사람에게 쌓이는 것은 돈이겠지만 잃어버리는 것은 인간다움이니, 여유로움은 인간다움의 포기할 수 없는 보루인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다움을 잃지 않기 위해 발휘할 수 있는 여유의 최고치는 무엇일까?
앙리 베르그송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웃음이다. 웃음은 세상에 사로잡힌 자의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이다. 세상에 주눅 들지 않은 사람의 우월한 자존감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사람의 애달픈 양식은 시와 노래이겠지만 그런 이들에게만 허락된 것이 있으니 곧 매이지 않은 자의 자유이다. 이 자유를 아는 사람이 웃을 수 있는 거다. 호쾌하게 웃어젖히는 패기, 통렬하게 비웃는 용기, 소소하게 미소 짓는 따뜻함, 깔깔깔 소리 내어 웃는 유쾌함 등등. 우리가 되찾아야 할 웃음은 그 종류가 많기도 하다. 요즘 유행하는 호모 뭐시기로 이름 붙여보자면 우리는 호모 리시오(risio), 웃는 인간인 거다.
코미디가 가장 인간적인 장르인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가 웃는 존재임을 재료 삼고 일깨우는 유일한 장르니까. 그래서 코미디는 경직되고 완고한 사람에게 잘 맞지 않는다. 이건 배우에게나 관객에게나 마찬가지다. 릴렉스, 릴렉스. 몸에 힘 빼시고 마음의 벽도 내려놓으시고 느슨하게 여유 있게 즐기세요. 여긴 극장이잖아요. 여기서 우리 같이 놀아봅시다. 신 나게 웃어 보자고요. 코미디는 배우와 관객에게 놀이의 즐거움과 웃음의 자신감을 경험케 하는 멋진 장르이다. 코미디가 드문 것이 아쉽고 드문 코미디가 웃기지 않은 것은 더 아쉽지만 그래도 코미디는 언제나 진리다.
<머더 포 투>의 웃음
뮤지컬의 브랜드를 달았지만 음악의 지분보다는 웃음의 분량이 월등히 많은 <머더 포 투>가 반가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종종 선보이기는 하지만 작품 수량으로 보자면 절대적으로 부족한 코미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라이선스 초연으로 새로운 작품을 보게 된다는 설렘도 좋았지만, 오로지 웃기겠다는 일념에 이글거리는 작품이 기대되지 않을 리 없다.
이 작품의 구성은 단출하다. 피아노 한 대에 배우 두 명. 물론 피아니스트가 있고 그 또한 나름의 역할이 있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이 작품은 남자 배우 두 명이 이끌어가는 코미디이다. 웃음의 코드도 분명하다. 그건 바로 역할 바꾸기. 이야기의 틀은 살인 사건의 범인을 찾는 추리극인데, 사건 현장에 있던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두 명의 배우가 도맡아 이끌어가는 방식이다. 취조하는 사람 쪽의 역할을 한 명이 맡고, 취조당하는 사람 쪽 역할을 또 한 명이 맡는다. 여기서 역할 배분의 불균형이 만들어지는데, 그러다 보니 후자의 배우가 그야말로 역할 바꾸기의 독박을 쓰게 되는 셈이다. 이게 재미의 포인트다. 땀을 뚝뚝 흘리며 숨을 몰아쉬도록 잠시도 쉬지 않는 배우들(안창용과 특히 박인배!)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그들의 고생에 빠져들고 만다. 그러면서 떠오르는 명언. 배우의 고생은 관객의 기쁨이라던가.
무대를 보자면 이 작품이 설정한 자기정체성은 더 분명해진다. 피아노가 있는 중앙 무대를 중심으로 그 양면에는 배우의 분장실이 있는데, 배우는 공연이 시작하기 전에 무대 위 분장실에 먼저 나와 몸도 풀고 목도 풀고 물도 마시고 공연을 준비한다. 공연 중간에도 때때로 분장실 공간에서 잠깐 숨을 돌리는 것을 보자면 무대 위 분장실은 배우의 속 공간을 겉으로 끄집어낸 실용적인 선택이자 시각적인 설정인 셈이다. 즉 이 작품의 관심은 온전히 역할 놀이에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소소한 웃음의 지점들은 곳곳에 포진해 있다. 추리극을 표방하지만 희극의 촘촘함보다 소극의 난장판에 가까운 이야기에서 나오는 웃음도 있고, 의도적으로 어처구니없게 설정된 인물들에게서 오는 웃음도 있으며, 뮤지컬의 전형적인 장면을 가져와 웃음을 끌어내는 건강한 자의식도 있다. 하지만 이런 부분들은 역할 놀이의 역동성에 비하자면 모두 부수적인 것에 불과해 보인다. 뒤집어 말하자면 역할 바꾸기가 다른 웃음의 가능성을 가려버린 건 아닌가 싶은 거다. 이 작품의 웃음이 단순해진 이유이기도 하다.
놀이가 웃음이 되기 위해서는
사실 <머더 포 투>가 재미있는 작품임을 아는 데도 웃음이 터져 나오는 순간은 의외로 많지 않다. 극 후반으로 갈수록 배우가 반복하는 고생 때문에 웃음이 번져가긴 하지만 빵빵 뿜어져 나오진 않는다. 왜 그런 걸까. 여러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텐데 일단 연출이 만들어내는 극의 호흡이 바쁘고 분주하기만 한 것은 여러모로 아쉽다. 극이 바쁘게 흘러갈수록 숨도 쉬고 웃을 수 있는 호흡을 만들어냈다면 좋았으련만 연출의 시선은 그저 배우의 역할 놀이를 바쁘게 반복하는 데만 가있는 것 같더라. 시간이 흘러도 관객의 눈에 보이는 것은 배우가 만들어내는 역할이 아니라 몇 개의 소품으로 몇 명의 인물을 만들어내느라 바쁜 배우일 뿐이니 말이다. 이런 식의 재미는 반복될수록 반감되게 마련이다. 배우가 역할을 바꾸는 것이 웃음의 시작이라면 웃음의 증폭은 역할이 극 안에서 살아 움직일 때 이루어지는 법. 하지만 이 작품에서 역할은 그저 배우의 놀이 도구일 뿐이니 웃음의 포인트는 출발점에서 조금도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배우가 열연하지만 그 빛이 바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박인배. 진지한 박인배가 할머니의 스카프를 두르고 섹시 여배우의 반짝이 구두를 신는 모습에 웃지 않을 사람은 없겠지만, 계속 반복되는 역할 바꾸기에서 박인배는 가벼운 순발력의 소유자라기보다는 묵직한 무게감이 더 잘 어울리는 배우임을 다시 확인하게 되더라. 머리로는 웃긴 걸 알겠는데 몸이 들썩이게 웃기진 않은 거다. 물론 배우로서는 재미난 경험이었을 거다. 새로운 도전의 결과가 썩 성공적이진 않지만 이런 낯선 도전에 뛰어든 배우들의 열심에는 박수를 치고 싶다.
이 작품이 더 큰 웃음을 붙잡지 못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놀이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 있다. 『호모 루덴스』를 쓴 호이징가의 논의에 따르면, 놀이는 본질적으로 진지한 행위이다. 가상의 시공간을 만들고 거기에만 통용되는 규칙을 만들어서 그 규칙에 어긋나지 않게 몰입하는 행위가 바로 놀이인 것이다. 그래서 놀이를 통한 재미란 현실을 잊어버릴 만큼의 집중도가 발휘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성과이다. 그렇다면 연극이 놀이가 되는 토대는 다름 아닌 극 상황 자체인 셈이다. 역할 바꾸기는 재미난 설정이자 배우의 역량과 재치가 빛날 만한 장치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역할 놀이가 빛나기 위해 살아나야 할 것은 역설적으로 극적인 집중력이다. 이 작품이 내세우는 추리극이라는 설정은 소극에 가깝도록 우스꽝스럽지만, 그것을 능청스럽고 진지하게, 마치 진짜 추리극처럼 대하는 말도 안 되는 몰입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몰입을 깨고 나오는 의외성이야말로 희극성의 젖줄이 되었을 터. 하지만 이 공연이 구현한 놀이는 그러한 의외성을 기대하기엔 그저 바쁘고 분주할 뿐이다.
그래도 말이다, 최소한의 배우 최소한의 음악이라는 간결함을 통해 연기하는 배우를 돋보이게 하는 공연으로 <머더 포 투>는 분명한 의미를 갖는다. 조금 덜 웃기면 어때. 채울 것도 없는 허세보다는 채워 나갈 게 많은 미완이 훨씬 보기 좋은 것을. 이 작품이 좀 더 재미있어지길 기대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3호 2017년 4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