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으로 향한 길
슬럼프에 빠진 작곡가 라흐마니노프가 정신의학자 니콜라이 달을 만나 치유되는 과정을 그린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이 작품의 무대에는
라흐마니노프와 달이 기거하는 현실의 공간과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연상되는 내면의 공간이 공존한다. 고정된 세트 안에 상처와 치유의 흐름을 담아낸 김대한 무대디자이너와 김정란 소품디자이너 부부에게 그 디자인 과정을 들어보았다.
악보
무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천장을 뒤덮은 악보들. 두 디자이너는 실제 라흐마니노프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던 중, 그가 악보를 사용하기보다는 머릿속으로 작곡하기를 즐겼다는 기록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공연에서도 소품으로 사용하는 악보는 최소화하고, 천장에 악보 모양 조형물을 달아 그의 머릿속에 흘러넘치는 악상을 표현하기로 했다. 이 악보는 실제로는 종이가 아닌 천으로 제작되었는데, 종이를 사용하면 조명과 가까워 화재의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악보 모양으로 출력한 천 뒤에 일일이 철망을 대서 흩날리는 형태로 완성하기까지 손이 많이 갔던 세트라고. 한편, 라흐마니노프의 방 천장에는 돌돌 말린 종이가 철망에 종유석처럼 꽂혀 있는 부분이 있다. 이는 김대한 무대디자이너가 교회에서 신에게 보내는 편지를 말아 꽂아놓은 사진을 보고 디자인한 것으로, 라흐마니노프가 죽은 누나 옐레나에게 쓴 편지를 상징한다. 그가 천국에 있는 누나를 위해 ‘하늘에 닿는 노래’를 쓰겠다고 한 가사와 맞닿는 이미지다.
라흐마니노프의 방
흔히 천재들이 관심 있는 대상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듯, 무대 위 라흐마니노프의 방도 불필요한 요소를 배제하고 그가 좋아하는 요소로만 꾸며졌다. 방 안에는 그의 분신과도 같은 피아노, 곡을 쓰기 위한 테이블과 의자, 실제 라흐마니노프가 차를 좋아했다는 점에 착안한 찻잔만이 간결하게 놓여 있다. 다만 그 간결함 속에서도 라흐마니노프의 심미안이 드러날 수 있도록 독특한 디자인의 가구를 공수하는 데 힘을 쏟았다. 피아노 역시 다른 가구와의 디자인적 통일성을 고려해 선택했다. 원래는 피아노 상판을 떼어내고 내부 건반이 움직이는 모습을 노출해 라흐마니노프의 머릿속을 표현할 계획이었으나, 소리가 변하는 문제 때문에 현재처럼 하판만 떼어내고 사용하고 있다. 문 위에 걸린 그림에도 특별한 의미가 숨어 있다. 안개에 싸여 알아보기 힘든 그림 속 풍경은 다가가고 싶지만 다가가기 힘든 라흐마니노프의 내면 공간을 상징한다. 즉, 이 그림은 무대 위에 난 ‘내면의 길’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달의 방
라흐마니노프의 방과 달의 방은 전체적인 가구의 분위기는 비슷하되, 공간의 성격상 뚜렷한 대비를 이루도록 디자인했다. 라흐마니노프의 방은
타인의 침범을 거부하는 혼자만의 공간이다. 오로지 라흐마니노프 자신만을 위해 꾸며진 방에는 앉을 수 있는 의자도 딱 한 개뿐. 반면 달이 머무르는 게스트 룸은 수많은 사람의 흔적이 축적된 공간이다. 라흐마니노프의 사촌 형 실로티와 심리 치료를 위해 방문한 여러 박사 등이 거쳐 간 방에는 그들이 남긴 책과 노트, 메모가 즐비하다. 언제든 손님을 맞이할 수 있는 넓은 테이블과 여러 개의 의자, 충분한 양의 와인도 갖춰져 있다. 이처럼 두 방은 ‘혼자만의 공간’과 ‘함께하는 공간’이라는 상반된 성격을 지닌다. 극 중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방을 빠져나와 달의 방에서 대화를 나누면서 마음의 빗장을 열고 기억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게 된다.
내면의 길
무대 앞쪽이 현실의 공간이라면, 뒤쪽은 허상의 공간, 기억의 공간으로 구성된다. 무대 중앙을 가로질러 내면으로 향한 길 옆에는 부서진 기억의 잔해가 쌓여 있다. 앞에 장식된 멀끔한 가구와 달리 박살 난 채 나뒹굴고 있는 가구는 라흐마니노프의 상처받은 마음을 말해 준다. 과거의 인물과 얽힌 구체적인 소품도 존재한다. 길 오른편에는 아버지의 묘비와 군화, 깨진 와인병이, 왼편에는 스승인 쯔베르프의 자켓과 묘비, 누나 옐레나의 초상화와 그녀를 위해 라흐마니노프가 쓴 악보, 편지가 뒤섞여 있다. 달 역의 배우가 잠깐 동안 기억 속 쯔베르프를 연기해야 하는 장면에서는, 쯔베르프를 상징하는 붉은 자켓에 조명을 비춰 배우의 역할 변신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내면의 길 끝에는 옐레나의 공간이 자리 잡고 있다. 엘레나의 죽음은 라흐마니노프에게 가장 들춰 보기 싫은 아픈 기억이므로, 무대에서도 가장 깊숙한 위치에 배치했다. 또한 이곳은 공연 내내 어둠에 싸여 있다가 마지막에 라흐마니노프가 당도했을 때에야 밝은 조명 아래 형태를 드러낸다. 작은 소파와 가냘픈 스탠드 불빛, 그 뒤의 라벤더 꽃밭은 라흐마니노프의 머릿속 옐레나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일반 사이즈보다 작게 제작된 소파는 병약한 소녀 옐레나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객석에서 봤을 때 실제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효과를 거둔다.
연주자
<라흐마니노프>는 이인극 뮤지컬이지만, 무대 위에 배우 말고도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피아니스트와 현악 6중주단이다. 음악가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 만큼, 악기와 연주자를 무대 위에 올려 하나의 배경으로 활용했다. 다만 다른 세트와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내면의 길 안에 악기를 배치함으로써, 거기서 연주되는 음악이 라흐마니노프의 마음속에서 확성기를 타고 울려 퍼지는 것처럼 연출했다. 특히 여기 놓인 그랜드 피아노는 라흐마니노프가 작곡할 때 사용하는 방 안의 업라이트 피아노와 달리 진짜 관객 앞에서 연주할 때의 라흐마니노프를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피아니스트는 쯔베르프 교수가 라흐마니노프에게 요구하는 곡을 연주하는 등 수시로 극에 개입하여 무대 위 제3의 배우로 활약한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2호 2017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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