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
* 공연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66년 발표된 다니엘 키스의 소설 『앨저넌에게 꽃을(Flower for Algernon)』은 32세의 지적장애인 찰리가 뇌 수술을 받고 천재가 되는 이야기다. 뉴욕의 빵 가게 점원으로 일하던 찰리는 저명한 대학교수의 제안으로 뇌 수술을 받고 천재가 된다. 그러나 지능이 높아지면서 삶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된 찰리는 점점 고독해지고, 자신을 인간이 아닌 발명품 취급하는 교수에게도 염증을 느낀다. 결국 찰리는 자신과 같은 뇌 수술을 받은 실험용 쥐 앨저넌을 데리고 도망친다. 얼마 뒤, 앨저넌에게서 퇴행 증상을 발견한 찰리는 자신도 다시 지능이 낮아질 것임을 알게 된다. 찰리의 정신적 방황을 통해 과학과 이성, 지식과 성취만을 중시하는 사회가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위협할 수 있는지 꼬집은 소설은 휴고상과 네뷸러상을 잇따라 받으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2006년 초연한 창작뮤지컬 <미스터 마우스>는 『앨저넌에게 꽃을』을 한국 배경으로 각색한 작품이다. 빵 가게 점원 찰리는 중국집에서 일하는 ‘인후’로, 실험용 쥐 앨저넌은 ‘이누’로 바뀌었다. 주인공의 지능이 갑자기 높아졌다가 낮아지는 흐름은 소설과 같지만, 이야기의 초점은 인후가 헤어진 가족과의 기억을 찾는 과정에 맞춰진다.
타인과 자신을 향한 의심
소설은 찰리가 쓰는 경과 보고서이자 일기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맞춤법조차 엉망이던 글이 논리정연하게 변해 가는 과정은 그 자체로 찰리의 지능 변화를 드러낸다. 1인칭 형식은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화자인 찰리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게 만든다. 처음에 찰리는 함께 일하는 빵 가게 직원들을 모두 자신의 친구로 묘사한다. 그리고 머리가 좋아지면 친구들과 부모님이 자신을 더 좋아해 줄 거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막상 수술을 받고 지능이 높아진 찰리는 지금껏 친구라 믿어온 동료들이 자신을 비웃고 괴롭혀왔음을 알게 된다. 어릴 적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던 고통스런 기억도 떠올리게 된다. 독자는 찰리가 세상과 자신을 재해석하면서 느끼는 고립감을 그의 입장에서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뮤지컬에서 찰리의 변화는 배우의 연기를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관객은 인후의 어눌한 말투와 행동이 점차 사라지고, 전문 지식을 언급하는 것을 통해 그의 지능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1인칭 소설과 달리 관객은 처음부터 인후의 주위 환경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데, 이로 인해 그가 수술 전후의 삶에서 느끼는 괴리감이 소설만큼 부각되지는 않는다. 다만 초반부 인후의 꿈에 등장한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수술 이후 고통스런 기억으로 되살아나는 장면을 통해 그가 자신의 기억을 의심하고 혼란을 겪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소설과 뮤지컬은 모두 주인공이 기억을 더듬어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다룬다. 그러나 직장 동료, 연인 등 현재의 관계에서 겪는 갈등도 비중 있게 다룬 소설과 달리, 뮤지컬은 과거의 가족 관계를 파헤치는 데 집중한다.
헤어진 가족과의 기억
찰리와 인후가 맞닥뜨리는 과거의 실체도 큰 차이를 보인다. 소설에서 찰리의 어머니는 아들이 지적장애아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학대에 가까운 무리한 교육을 강행한다. 그러다가 정상적인 지능을 가진 딸이 태어나자, 딸을 위해 찰리를 보호시설로 보내려 한다. 아버지는 그런 어머니와 줄곧 다툼을 벌이다가, 결국 찰리를 자기 형에게 맡긴다. 수술 후 기억을 되살린 찰리는 아버지의 이발소를 찾아가지만 아버지는 똑똑해진 그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제는 딸과 단둘이 살고 있는 어머니 역시 나이가 들어 정신이 오락가락한 상태다.
뮤지컬은 소설과 다른 과거를 보여준다. 어린 인후는 집에서 불장난을 하다가 화재를 일으키는데, 이 일로 여동생이 죽고, 어머니는 다리를 못 쓰게 된다. 괴로워하던 아버지는 인후를 어딘가로 보내버린다. 하지만 수술 이후 아버지의 이발소로 찾아간 인후는 어머니가 마지막까지 자신을 그리워하다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 역시 자신을 떠나보낸 일을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버지는 (죄책감 때문에 내색하지는 못하지만) 마지막 순간 인후가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차린다. 이렇듯 소설 속 찰리는 마지막까지 부모에게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지 못하는 반면, 뮤지컬 속 인후는 부모가 지능이나 과오에 상관없이 자신을 사랑하였음을 확인하고, 아픈 과거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즉, 인후는 자신이 지능이 낮은 과거에도 존엄한 인간이었음을 부모의 사랑을 통해 확인받는다.
분열된 자아를 통합하는 사랑
찰리와 인후는 모두 자신을 발명품 취급하는 교수에게 분노하며, 지능이 낮았던 시절에도 자신은 인간이었음을 주장한다. 하지만 소설 속 찰리는 과거와 현재의 자신을 통합하지 못하는 괴리를 보인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그’라고 부르며, 늘 과거의 자신이 현재의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고 느낀다. 특히 찰리가 연인 앨리스와 육체적으로 가까워지려 할 때마다 과거의 찰리가 그를 가로막는다. 뮤지컬에서도 ‘둘만의 이야기’에서 과거의 인후가 현재의 인후와 분리되어 아이 형태의 그림자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그러나 이 그림자는 잊고 싶었던 과거의 자신을 상징할 뿐, 현재의 인후와 갈등을 빚는 존재는 아니다.
찰리가 육체적 관계에게 두려움을 느끼는 원인은 소설의 후반부에 가서야 드러난다. 그가 어머니와 여동생을 다시 만날 때, 노망이 난 어머니는 불현듯 “자기 동생을 그런(성적인) 눈길로 바라보다니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쏟아낸다. 실제로 그가 어릴 적 동생을 성적 대상으로 바라보았는지는 불분명하나, 이 사건을 통해 찰리의 성적 호기심이 어머니의 심한 처벌과 폭언으로 인해 정신적 트라우마로 남았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막연한 두려움의 정체를 직면한 찰리는 마침내 앨리스와 사랑을 나눌 수 있게 된다. 뮤지컬 속 인후가 부모의 사랑을 재확인하며 과거의 상처를 극복한다면, 소설 속 찰리는 연인과의 육체적·정신적 결합을 통해 분열된 자아를 통합하고 고독을 벗어나는 것이다.
뮤지컬에서도 인후가 연애 감정을 느끼는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연구 팀의 일원인 채연이다. 그녀는 지식 쌓기에만 몰두하는 인후에게 춤을 가르쳐주며 ‘가슴으로 느끼는 진실’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채연은 소설에 등장하는 앨리스와 페이가 혼합된 캐릭터다. 앨리스는 수술 전부터 찰리에게 글을 가르친 지적장애성인센터 교사다. 뮤지컬에서는 인후가 우연히 연구실에 찾아왔다가 실험 대상이 되지만, 소설에서는 앨리스가 학구열이 높은 찰리를 실험 대상으로 추천한다. 수술 후 찰리는 앨리스에게 사랑을 고백하는데, 둘의 지적 수준이 역전될수록 찰리는 실망감을, 앨리스는 열등감을 느끼게 된다. 여기에 찰리의 성적 트라우마까지 겹쳐지면서 둘의 갈등은 더욱 깊어진다. 찰리는 한동안 춤을 사랑하는 자유분방한 예술가 페이를 사귀면서 외로움을 달래지만, 결국 자신이 진정 사랑하는 앨리스 곁으로 돌아간다. 이와 달리 뮤지컬에서 인후와 채연의 본격적인 연애나 갈등은 다뤄지지 않는다.
사랑 없는 지능은 무의미하다
뮤지컬은 인후가 자신에게 행해진 뇌 수술의 부작용을 지적하는 논문을 남기고 다시 육체적·지적으로 퇴화하는 과정을 마지막 한 장면으로 짧게 압축해 보여준다. 소설은 찰리의 퇴행 과정을 더 자세히 묘사한다. 그는 늦기 전에 자신의 지식을 지적장애인의 삶에 기여하는 데 사용하고 싶다고 생각하며 연구실로 돌아가 논문을 완성한다. 또 앨리스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자신이 가게 될 지적장애인 보호시설도 미리 방문해 본다. 그는 사회에서 격리된 ‘죽음’의 공간으로만 생각해 온 보호시설이 오히려 경쟁과 차별이 만연한 비장애인 사회보다 서로 돕고 포용할 줄 아는, 인간적 유대가 살아 있는 공간임을 알게 된다. 따라서 찰리 스스로 보호시설행을 택하는 소설의 결말은 마냥 비극적이지만은 않다. 이는 그가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지능이 높은 자신과 지능이 낮은 자신을 모두 수용하게 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험용 쥐 앨저넌과 이누도 마지막에는 무덤에 묻힌다. 앨저넌/이누는 주인공의 동일시 대상이자, 지능이 낮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세상에 대한 비유다. 그러나 소설과 뮤지컬에서 주인공이 진정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과 화합하게 해주는 것은 이성의 힘이 아닌 사랑의 힘이다. 이를 통해 두 작품은 모두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지능이 아닌 애정을 주고받는 능력임을 이야기한다.
“나는 지능만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을 배웠어요. (…)
인간적인 애정의 뒷받침이 없는 지능과 교육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이오.”
『앨저넌에게 꽃을』 중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2호 2017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