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을 위하여
10년이라는 기다림 끝에 <뮤지컬 밑바닥에서>의 재공연 소식이 들려왔다.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이야기로 호평을 받았다. 최우혁은 이번 <뮤지컬 밑바닥에서>에서 백작을 대신해 감옥에 들어갔다가 출소한 청년 페페르를 연기한다. 그가 보여줄 절망과 희망의 모습은 어떨까.
뮤지컬 무대에서 느낀 희열
최우혁은 요즘 보기 드문 버라이어티한 삶을 거쳐 왔다. 복싱을 하다가 사촌 형의 권유로 연기에 뛰어들었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삼수로 어렵게 입학한 대학까지는 그렇다 쳐도, 대극장 창작뮤지컬로 마니아층을 보유한 <프랑켄슈타인>에서 단번에 주인공인 앙리이자 괴물을 꿰차며 데뷔한 것은 파격적이었다. 난다 긴다 하는 선배들 사이에서도 기죽지 않고 무사히 데뷔작을 마친 그는 뻔한 선택 대신 유쾌한 코미디 작품인 <올슉업>으로 색다른 도전장을 내밀어 보란듯이 변신에 성공했다. 그런데 <올슉업>이 끝난 지 한참이 지나도 최우혁의 차기작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그전부터 좋지 않았던 다리가 문제였다. 양쪽 무릎에 철심을 박는 수술을 마친 그는 긴 시간을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반년이란 시간 동안 숨을 다잡은 최우혁은 복귀작으로 역시나 ‘예상할 수 없는’ 패를 꺼내 들었다. 바로 10년 만에 돌아오는 <뮤지컬 밑바닥에서>다. 러시아의 극작가 막심 고리끼의 대표작을 원작으로 선술집에 모인 다양한 인물을 그린 작품은 지난 2005년 한국에서 초연된 이후로 웰메이드라는 호평을 받았다. <뮤지컬 밑바닥에서>의 반가운 재공연 소식과 함께 캐스팅에도 관심이 집중됐고, 여기에 최우혁은 주인공 페페르로 이름을 올렸다. 이번에 최우혁이 내민 패는 바로 ‘도전’이다. “<뮤지컬 밑바닥에서>를 직접 보지는 못했어요. 처음 재공연 소식을 듣자마자 ‘아, 이건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심지어 소극장이었죠. 제 속에 숨겨진 도전 본능이 샘솟았어요. 꼭 도전하고 싶었죠.”
심지어 최우혁은 이번 작품을 통해 처음으로 소극장 무대에서 원캐스트로 공연한다. 비극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의 원캐스트,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또 배우의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객석과의 거리는 연습에서조차 긴장을 풀 수 없다. 좁은 공간에서 미리 약속된 모든 것을 정확하게 지켜야 한다는 사실도 연습에 온 힘을 쏟게 만드는 이유다. 처음 느껴보는 색다른 환경이 뿜어내는 중압감이 그를 눌렀지만, 최우혁은 역시나 이번에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신을 다잡는 중이라고 했다. 그의 모든 것을 ‘올인’한 결과를 아직 섣불리 판단할 수 없지만, 그가 <뮤지컬 밑바닥에서>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고 있음은 틀림없어 보였다. “비극과 희극이 함께 있는 작품이라 어떻게 완성될지 궁금해요. 원캐스트라 어렵겠지만 공연을 너무 보고 싶어요. 객석에서 보는 페페르는 어떨까. 공연 분위기는 어떨까. 이 인물은 어떻게 해석될까. 너무 궁금하죠. 이런 기대에는 저 혼자 페페르로 무대에 서는 것에 대한 중압감도 있어요. 솔직히 고민도 많아요. 그렇지만 고민과 질문을 계속해서 이어가다 보면 결국엔 무대에서 더 행복해지더라고요.”
<뮤지컬 밑바닥에서>의 페페르는 불쌍한 남자다. 꿈을 꾸다가 또 눈앞에서 절망으로 떨어지는 페페르를 향해 최우혁은 안쓰럽다고 말한다. 그는 “<뮤지컬 밑바닥에서>의 인물들은 모두 안타깝다. 페페르가 제일 불쌍하다고 말할 수 없지만 제겐 참 안쓰러운 인물”이라며 “한순간에 희망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무너지기 때문”이라고 페페르를 향한 애틋함을 드러냈다. 극과 극을 넘나드는 페페르를 연기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감정을 적정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자칫하면 페페르라는 인물이 넋이 나간 사람이 되거나 바보가 되기 때문. 물론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최우혁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인생의 밑바닥으로 떨어지는 페페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했을까. “그런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오잖아요. 페페르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하면 끝도 없겠지만, 절망은 늘 주위에서 일어나요. 제 생일 때 오랜만에 친구랑 술을 한잔했어요. 웃으면서 헤어진 친구가 3주 동안이나 연락이 안 되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의 아버지가 바로 그날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거죠. 누군가가 장난치는 것 같았어요. 넋이 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잖아요. 불과 몇 시간 전에 같이 밥을 먹었던 가족이 잠깐 외출하고 돌아왔더니 세상을 떠났다는 게. 그렇게 악몽 같은 경험을 페페르의 상황에 빗댔어요. 연습할수록 페페르가 느끼는 감정이 버거워져요. 마냥 어렵죠.”
그렇다고 페페르가 마냥 절망에 빠진 청년은 아니다. 선술집에 새로 들어온 종업원 나타샤를 통해 사랑에 눈을 뜨고 새로운 삶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기도 한다. “페페르는 착하고 순수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나타샤를 향해 고백조차도 못하죠. 처음에는 나랑 다른 세상의 사람인 나타샤에게 호기심을 갖지만 어느 순간 정이 들고 좋아하게 되는 거예요. 온통 검은 빛의 세상이었던 페페르에게 나타샤는 밝은 빛으로 다가온 거죠.” 안타깝게도 그에게 사랑의 단꿈은 아주 잠시다. 페페르는 나타샤와 옛 연인 바실리사 사이에서 복잡한 삼각관계를 이어 나간다. 무엇보다 바실리사와 페페르가 보여주는 사랑의 모습은 치정을 연상시킬 정도로 질퍽한 분위기를 풍긴다. 최우혁은 “굉장히 복잡한 관계지만 충분히 현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모습이다. 옛 연인에 대한 마음은 접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과거를 완전히 떨쳐 낼 수 없는 상황이니까. 그런데 또 두 사람을 각각 바라보면 ‘왜 이럴 수밖에 없었는지’가 이해가 된다”고 설명했다.
페페르에게 벌어진 사건만 아니라 <뮤지컬 밑바닥에서>에서는 등장하는 모든 인물의 에피소드를 통해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대부분의 감정을 쏟아낸다. 특히 배꼽이 빠질 것만 같은 유쾌하고 재미있는 장면이 곳곳에 숨겨져 있는데, 한참 웃다 보면 작품의 비극이 한층 더 깊게 다가온다. 특히 클라이맥스에서는 희망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모든 사람을 어둠 속으로 내던져 버린다. 최우혁은 “아무리 슬퍼도 아주 조금의 희망은 있기 마련이지만 <뮤지컬 밑바닥에서>는 전혀 없다. 그래서 오히려 더 여운이 있는 것 같다”고 작품을 향한 애정을 드러냈다.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
배우는 배역을 만나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최우혁을 만들어간 인물들,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려고 했던 과학자이자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를 찾아가는 괴물, 흥에 넘치는 슈퍼스타 그리고 곧 세상에 선보여지는 꿈을 잃어버린 불쌍한 청년에게 드는 생각은 무엇일까. “<프랑켄슈타인>을 돌이켜보면 부끄러운 점이 많았어요. 그래도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온몸을 내던졌죠. 앙리/괴물은 ‘내가 배우라는 직업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희망을 줬어요. <올슉업>에서는 밝고 장난 많은 엘비스 프레슬리가 마치 저와 많이 닮아서 좋았지만, 웃음과 진지함 사이의 적당함을 알기까지가 힘들었어요. 배우는 개그맨이 아니므로 마냥 웃기는 것이 아니라 웃음 속에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잖아요. 엘비스 프레슬리를 통해 이런 부분을 배웠죠. 지금은 페페르라는 인물에게 또 배우고 있어요. 음, 뭐랄까. 페페르는 제게 연기가 마냥 달콤하지는 않다고 알려주고 있어요. 그래서 페페르를 만날 때마다 행복해요. 또 페페르의 다양한 성격을 통해서 연기하는 재미를 느끼고 있어요.”
그는 이번 <뮤지컬 밑바닥에서>를 새로운 출발선이라 정의했다. “출발이 반이라고 하지만 전 언제나 모든 작품에서 시작하는 느낌이었어요. 이번에도 다시 시작이죠. 그동안은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앙상블 선배들이나 주변 분들께서 만들어 주셨다고 생각해요. 제겐 아직 배우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아요. 밑바닥부터 다시 차근차근 채워 나간다면 제게도 배우라는 수식어가 아주 조금이나마 어울릴 수 있지 않을까요?”
인터뷰가 끝날 무렵 최우혁은 “<뮤지컬 밑바닥에서>가 끝난 후에 웃으며 술을 마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말엔 최우혁이 가진 모든 꿈과 희망으로 빚어낸 페페르를 무사히 완성한 후 성장한 자신을 보고 싶단 뜻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이번 공연이 끝난 후, 최우혁과 페페르는 서로의 술잔을 마주치며 어떤 말을 건넬지 궁금해졌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2호 2017년 3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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