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침없이
후회도 없이
신년호를 기념해 한자리에 모인 네 명의 젊은 배우들, 유주혜, 유리아, 박란주, 김다혜의 공통점은? 한 장의 사진에서 물씬 느껴지듯 네 사람 모두 뚜렷한 개성이 있는 배우라는 점, 그리고 그 개성을 무기로 한 뼘씩 성장하며 자신이 있어야 할 위치를 스스로 찾아왔다는 것! 만약 아직까지 무대에서 이들의 활약상을 확인하지 못했다면, 이제부터라도 이 네 사람의 행보를 주목하자. 젊고 당당한 네 배우는 분명 지금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을 이유가 있다.
거리낌 없는 씩씩함
유주혜
“도전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들이 잘 모르는, 어쩌면 저도 몰랐던 제 다른 면을 봐주신 것 같아서 감사했고요.” <스모크> 개막 하루 전, 인터뷰로 마주한 유주혜는 적당한 긴장감과 설렘의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특히 이미지 변신을 해야 한다는 점이 그녀를 긴장하게 했는데, 캐릭터 소개에 따르면 홍은 ‘부서질 듯한 아픔을 가진 치명적인 여자’여야 한다는 것. “동안 이미지 때문인지 주로 소녀 같은 역할만 맡다 보니, 내가 과연 성숙한 여인의 캐릭터를 감당할 수 있을지 한동안 꽤 고민했거든요. 솔직히 걱정도 됐고요.” 지난 2011년, 사춘기 십대들의 성장통을 다뤄 많은 신인 배우를 발굴한 <스프링 어웨이크닝>으로 얼굴을 알린 배우답게 그녀에게 덧입혀진 소녀 캐릭터는 영광인 동시에 넘어야 할 산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배우 정체성에 대한 걱정을 잠시 미뤄두게 한 것은 그녀가 보여준 <커피 프린스 1호점>의 은찬이나 <러브레터>의 소녀 이츠키가 매력적이었던 것은 소녀 캐릭터이기 때문이 아니라 유주혜라는 배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실력으로 기대감을 주는 유주혜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연극은 물론, 드라마로 활동 영역을 한 뼘씩 넓혀가는 중이다. “주변 사람들이 제 공연을 보고 나서 이런 점이 좋았다고 객관적인 평가를 해줄 때, 내가 시간을 그냥 흘려보낸 건 아니구나 싶어요. 제가 생각해 봐도 스스로 많이 발전한 것 같고요.”
서른을 맞는 새해. 새해 계획은 세웠을까? “아뇨, 계획을 세워도 계획대로 잘 안 되니까. 하하하. 음, 큰 계획은 고양이들이 아프지 않게 잘 돌보는 거예요. 집에서 고양이들을 키우거든요. 그리고 자주 여행 다니기!” 배우 일에 거창한 욕심을 안 보인다고 해서 그녀의 앞날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유주혜는 만약 배우가 아닌 다른 일을 할 수 있다고 해도 그녀는 계속 배우로 살아가겠노라 말하는 배우니까.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해도 계속 배우를 할 거예요. 다시 태어난다면 안 할 것 같은데, 이번 생에는 해야 할 것 같아요.”
순수하고 용감한 돈키호테
유리아
차분하고 가녀린 이미지를 지닌 배우, 유리아. 하지만 인터뷰 자리에 나온 그가 자신의 롤모델로 <렌트>에 나오는 행위예술가 모린을 꼽는 순간, 그가 알려진 이미지와는 다른 사람이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모린은 정말 멋진 여자예요. 자신감 넘치고, 신념이 뚜렷하고, 그 신념을 예술로 승화해 사람들에게 전달할 줄도 알죠. 남들 시선 같은 건 두려워하지 않고 말예요.” 실제로 엉뚱하면서도 자신의 뜻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는 유리아의 성격은 모린과 닮은 구석이 있다. 어릴 적부터 노래와 영화를 좋아했던 유리아는 우연히 중학교 음악 선생님이 보여준 뮤지컬 <명성황후> 실황 영상을 보고 뮤지컬 배우를 꿈꿨다. 하지만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혀 예술 고등학교가 아닌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겉보기에는 공부밖에 모르는 착실한 모범생으로 3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런 그가 수능 시험을 코앞에 두고 무작정 국민대 연극영화과 수시에 지원해 합격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연기학원 한 번 다니지 않은 제가 높은 경쟁률을 뚫고 수시에 합격하자, 부모님도 비로소 절 인정해 주셨어요.”
가냘픈 외모 아래 숨겨진 과감함과 뚝심, 그리고 편견에 굴하지 않고 스스로 가능성을 증명하려는 태도는 무대 위 행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2009년 <렌트>의 앙상블로 데뷔한 유리아는 <두 도시 이야기> 초연에서 단역에 불과했던 재봉사를 매력적으로 소화해 단숨에 주연 배우로 발돋움했다. 지난해에는 여린 이미지를 깨고 한층 다양한 역할에 도전했다. <키다리 아저씨>에서 작가를 꿈꾸며 독립적인 여성으로 성장하는 제루샤를 연기한 데 이어, <씨 왓 아이 워너 씨>에서 애인을 살해하려는 여자, 마약에 중독된 배우 등 강렬한 인물로 연기 변신에 나선 것. “사실 뮤지컬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는 대부분 비슷하잖아요. 그동안 나 이런 역할도 잘할 수 있다고 보여드리고 싶어도 기회가 없었는데, 감사하게도 작년에 그 기회가 왔어요. 저한테는 선물 같은 한 해였죠.” 차기작인 <레드북>에서는 보수적인 빅토리아 시대에 야한 소설을 쓰는 여성 작가 안나를 연기한다. 이번에도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 끌렸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여자다운’ 행동을 하지 않는 여자예요. 야한 소설을 쓰는 여자라고 말하지만, 달리 말하면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쓰는 여자인 거죠. 저는 안나야말로 누구보다 순수함을 간직한 인물이라고 봐요.”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하는 유리아를 보고 있자니, 그가 안나를 통해 어느 때보다 투명하게 자신의 매력을 뽐낼 수 있으리란 예감이 들었다. 앞으로 맡고 싶은 배역을 묻는 질문에 “<슈렉>의 피오나 공주! 남녀 구분 없이 도전할 수 있다면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를 외치는 그의 내일을 어떻게 기대하지 않을 수 있을까.
켜켜이 쌓아올린 시간의 반짝임
박란주
“어렸을 때 사촌 언니네 집에 놀러 가면 희곡집이 많았어요. 그것도 『파우스트』같은 고전이.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끼리 그걸 펼쳐놓고 역할을 나눠 읽고 놀았죠.” 뮤지컬 배우를 꿈꾸게 된 계기를 묻자 박란주는 잠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렸다. 노래를 좋아해 들어간 예술 고등학교에서 처음으로 뮤지컬을 접했다는 박란주. 노래와 연기를 겸하는 이 낯선 장르에 금세 빠져든 건 어쩌면 이미 어릴 적부터 그에게 연기가 곧 놀이였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뮤지컬을 알기 전까지 배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와 돌아보니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온 듯해요.”
2007년 동국대학교 연극학과에 입학한 박란주는 바로 그해 <오! 당신이 잠든 사이> 오디션에 합격해 뮤지컬에 데뷔했다. 워낙 어린 나이에 데뷔하다 보니 올해로 벌써 경력 10년 차. 그동안 그가 무대 위에서 가장 많이 보여준 건 바로 교복 입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박란주 스스로도 ‘여고생 담당’이라고 말할 만큼 <스프링 어웨이크닝>, <번지점프를 하다>, <사춘기>, <무한동력>, <안녕! 유에프오> 등 여러 작품에서 여고생을 연기했다. “데뷔를 일찍 한 데다 또래에 비해 작고 앳된 이미지 때문에 어린 역할이 많이 들어왔어요. 20대 중반이 넘어서도 계속 소녀 역할만 맡는 게 고민인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할 수 있을 때 실컷 하자는 주의예요. 어차피 곧 하고 싶어도 못하는 때가 올 텐데요, 뭘. (웃음)”
서른 살을 맞는 올해는 <청춘 18대 1>의 나츠카로 한결 성숙한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조선인 독립운동가를 사랑하는 일본인 나츠카는 아내이자 어머니, 또 독립운동에 가담한 무모한 청춘의 한 사람으로서 섬세하면서도 강단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역할. 부담이 될 법도 하지만 오히려 그간 맡은 역할 가운데 자신과 가장 닮은 역할이 나츠카라는 게 박란주의 설명이다. “연습을 하다 보니 저랑 닮은 점이 많더라고요. 아닌 건 바로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든가,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려는 태도가요. 이래 봬도 제 별명이 ‘애늙은이’거든요. (웃음) 굳이 어떤 캐릭터로 접근하지 않아도 내 마음 쓰듯이, 내 생각 하듯이 연기하면 될 것 같아요.”
지난해 연극 <올모스트 메인>에도 출연하며, 뮤지컬과 연극 무대를 넘나들고 있는 박란주. 노래가 좋아 뮤지컬 배우가 되었지만, 이제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연기를 통해 관객과 교감하는 배우가 되고 싶다는 게 그의 소망이다. “내가 공감을 끌어내고 울림을 주고 싶었던 부분이 제대로 전달돼서 ‘그 부분이 좋았다’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뿌듯하고 행복해요. 나 혼자 허공에 하이파이브를 한 게 아니라 손바닥이 짝 마주쳤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그 순간 고민했던 시간들을 한꺼번에 보상받는 기분이에요.”
오늘보다 내일 더 당당하게
김다혜
“저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꿈이 바뀐 적이 없어요.” 인터뷰 자리에 앉은 김다혜는 뮤지컬 배우로 무대에 선다는 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는 데 열중했다. “어려서부터 노래하는 걸 좋아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TV에서 어린이 합창단을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직접 원서를 냈을 만큼이요. 오디션에 덜컥 붙어 2년 동안 합창단으로 활동했는데, 커서도 계속 무대에 섰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일찌감치 진로를 정하고 예중, 예고, 예대 진학이라는 정석대로 꿈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간 당찬 소녀. 욕심 많고 의욕도 넘쳤던 만큼 시작도 빨랐다. “갓 스무 살에 <롤리폴리> 앙상블로 첫 작품을 하게 됐어요. 치기 어린 마음에 하루빨리 무대에 서고 싶었거든요. 난 이 일이 좋고, 이건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급했던 것 같아요. 근데 나중에 여러 작품을 통해 많은 스태프들과 배우들, 관객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게 이기적인 생각이었다는 걸 알게 됐죠. 최근엔 부쩍 책임감이 생긴 것 같아요.”
2014년 화제의 문제작 <더 데빌>에 코러스로 참여해 관계자들에게 먼저 얼굴을 알린 김다혜는 지난 2년 동안 다섯 편의 창작뮤지컬에 성실히 출연하면서 그 누구보다 바빴다. 더욱이 올해는 도미 설화를 바탕으로 하는 <아랑가>에서 주인공 아랑으로 예그린뮤지컬어워드 신인상에 노미네이트 됐으니, 뜻깊은 한 해가 아닐 수 없다. “제 고민의 흔적이 담긴 캐릭터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도 안 믿겨요. 누군가 설령 빈말이더라도 제 공연을 보고 위안을 얻었다고 할 때 정말 행복하죠.” 말하는 대로 이뤄진다고 믿는 김다혜는 늘 마음 한구석에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있다. 그럼 지금 그녀의 가장 큰 목표는 뭘까. “언젠가 꼭 하고 싶은 역할이 두 개 있어요. 하나는 <노트르
담 드 파리>의 에스메랄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위키드>의 엘파바예요.” 시원하게 웃는 당찬 얼굴이 단단해 보였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60호 2017년 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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