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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ODD NOTE] 경성의 동성연애 [No.159]

글 |나윤정 사진 |- 2016-12-16 8,608

1931년 4월 8일, 양장을 곱게 차려입은 신여성 두 명이 서로 부둥켜안은 채 영등포역 기차선로에 몸을 던졌다. 불안한 시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목숨을 바친 두 여인 김용주와 홍옥임. 이들의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창작뮤지컬이 바로 <콩칠팔 새삼륙>이다. 이렇듯 경성을 들썩였던 신여성들의 동성연애. 무엇이 그녀들의 마음을 뒤흔들었을까.

 


동성 간의 더 친밀한 교감   
1920~1930년대 근대 교육을 받은 여학생들 사이에 동성연애가 유행했다. 그녀들에게 동성애는 이성애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1910년대 일본에서는 유럽의 성과학 담론이 유입되면서 동성애 관련 논의들이 활발해졌고, 그 영향을 받아 1920년대 식민지하에 있던 조선도 이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이성 연애는 정상적인 행위, 동성연애는 일탈적 행위로 범주화되었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동성연애는 당시 신여성의 상징적인 특징 중 하나로 떠올랐다.

 

실제로 1920년대 초반, 이화학당, 경성여고보, 평양여고보 등 여학교 기숙사를 중심으로 동성연애가 유행했다. 학교에서 이를 단속할 정도로 동성연애는 빈번한 현상이었다. 여성잡지 <신여성>(1923년 11월 호)에 실린 ‘요때의 조선신여자’란 제목의 글은 당시 여학교 사이에 유행하고 있는 동성연애를 이렇게 서술한다. “사랑-애형, 애제! 이것은 주로 여학생 사이에, 여학생 중에도 기숙사에 들어있는 학생 사이에 잇는 일이거니와, 그들 사이에는 남자 편으로 치면 ‘짝패’라 할 만한 사랑이란 것이 있다.”

 

 

이러한 여학생들의 동성연애를 두고 다양한 해석이 분분했다. 육체적 욕망이 부재하는 높고 깨끗한 사랑이라는 의견도 있고, 상대에 대한 감정적 밀착이 강한 여성의 특이한 기질 때문에 더 위험한 사랑이라 경계하는 시선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당시 여학생들의 동성연애는 분명 현대의 그것과 차이를 보였다. 동성연애를 경험한 여학생 대부분이 졸업 후에는 남성과 결혼을 해 평범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당대 여학생들이 동성애에 빠진 근본적인 원인을 가부장적 가족 제도로 꼽는 의견이 많다. 아무리 자유연애가 도입되었다지만, 여성은 순결하기 바라는 사회. 딴 남성과의 연애는 허용하지 않아도 여성과의 연애는 문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여학생들의 동성연애는 근대적 연애와 여성이 만나는 지점에서 양산된 관계로도 여겨진다. 근대적 제도의 일부로 만들어진 교실과 기숙사, 이 공간의 폐쇄성은 근대 연애의 물결에 휩싸인 사춘기 소녀들의 감성을 증폭시켰다. 학생들의 이성 교제를 가로막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한 공간에 모인 여성들은 자연스레 서로의 외로움을 달래주게 된다. 특히 여성 특유의 감성적 교류와 정서적 유대감은 이성애에서 얻을 수 없는 긴밀한 교감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여성 간의 교감이 폭발적인 열정을 불러일으킨 경우도 발견된다. 대중잡지 <별건곤>(1930년 11월 호)은 여류 명사들의 동성연애 경험담을 전하며, 평생 이성과의 결혼을 포기하거나 동성 연인에 대한 질투로 사랑싸움이 벌어진 사례 등을 보여준다. 이렇듯 1920~1930년대 신여성들의 동성연애는 기숙사 동료에게 느끼는 가벼운 설렘부터 정사로 이어지는 열정적인 사랑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되었고, 혼란의 시대, 이유 있는 반란이었다.

 

 

신여성의 대표 커밍아웃       

 


숙명여고보 동급생, 이덕요와 이현경
의사, 기자, 근우회 일원으로 활약했던 이덕요. 그녀는 자신의 동성연애를 회상하며 “한창 때는 정열에 들뜬 청춘 남녀 간 연애보다도 몇 층 이상으로 더 격렬했고, 파란곡절이 허다했더랍니다”라고 말한다. 이덕요는 동성연애 잘하기로 소문난 여의사였는데, 그중 숙명여고보 동창 이현경과의 사랑이 격렬했다. 동급생이었던 두 사람은 기숙사 한방을 쓰게 되며 인연을 맺었고, 어느 순간 연인으로 사이가 발전했다. 이들은 어디든 함께 가고, 잠을 자도 한 이불 속에서 같이 잤다. 심지어 이현경은 자기 부모에게 한평생 이성과 결혼하지 않고 이덕요와 살겠다는 선언을 했다.


숙명여고보를 졸업 후 이덕요는 도쿄로 유학을 떠났고, 이현경은 밀양공립보통학교의 선생님이 되었다. 이때 마음이 여린 이현경은 밤낮으로 이덕요만 생각하며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리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연애편지를 이덕요에게 보냈다. 서로 떨어져 있던 동안 두 사람의 사랑은 한층 깊어졌다. 때문에 이덕요가 여름 방학 잠시 귀국해 이현경과 시간을 보내다가 도쿄로 돌아가려고 할 때, 이현경이 자신을 데려가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결국 도쿄에서 함께 살게 된 두 사람, 하지만 이덕요에게 또 다른 여자가 생기자 이현경의 시기와 질투가 심해졌다. 끊임없이 삼각, 사각 관계에 빠진 두 사람, 이현경은 이덕요가 다른 여자와 몸을 가까이 할까봐 한잠도 자지 않고 감시했다. 심지어 이덕요를 죽이고 자신도 죽겠다며 칼까지 품고 다녔다.


하지만 이렇듯 열정적이었음에도 이들의 사랑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도쿄여의전을 졸업해 병원을 개업한 이덕요는 이현경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동아일보 기자인 한위건이란 남성과 결혼했다. 보통학교 교사와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한 이현경 역시 이덕요와의 관계를 끝내고 조선공산당 간부 안광천과 가정을 꾸렸다.

 

 

 

의문의 동반 자살 사건, 홍옥임과 김용주
스물한 살의 여학생 홍옥임과 열아홉 살의 주부 김용주가 한날한시에 서로를 부둥켜안고 질주하는 열차에 몸을 던졌다. 자살의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호주머니 속에서 발견된 두 사람의 사진 한 장이 이들의 관계를 암시해 주었다. 사실 겉보기에 두 사람은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였다. 홍옥임은 저명한 안과의이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였던 홍석후의 고명딸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 입학한 촉망받는 음악도. 김용주는 종로 덕흥서림을 경영하는 김동진의 장녀로, 동막 부호 심정택의 큰아들과 결혼해 부유하게 살고 있는 주부였다.

 
홍옥임과 김용주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였다. 이때까진 그렇게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서로의 처지를 동정하며 교감을 시작한다. 김용주는 봉건적 인습에 사로잡힌 아버지로 인해 괴로워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혼례를 서두르기 위해 동덕여고보로 찾아가 억지로 딸을 자퇴시킨다. 마지못해 결혼을 했지만, 시집살이는 고통스러웠고 철없는 남편은 그녀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고 방탕한 생활을 했다. 한편 지극히 명랑한 모던 가정에서 자란 홍옥임은 학창 시절 동성 애인도 많았고, 여고 졸업 후 이성 연애도 자유롭게 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버지의 스캔들을 접하게 돼 고민에 빠지고, 급기야 애인에게 버림받으며 극심한 우울증을 겪는다. 이렇듯 힘든 시기 김용주와 홍옥임은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 우정은 어느 순간 사랑으로 발전한다. 김용주는 홍옥임을 붙잡고 “인제는 네가 없으면 나는 죽는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결국 두 여인의 도피처는 죽음이었다. 1931년 3월, 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했지만 이는 실패로 끝났다. 이들은 4월 안으로 죽어버리겠다고 결심하고 남은 한 달 동안 원없이 놀기로 했다. 애선사진관에서 죽기 전 마지막 촬영을 하고 동무들에게 사진을 나눠주기도 했다. 마침내 4월 8일, 두 사람은 마치 약속한 듯 아침부터 온갖 멋을 내며 옷을 곱게 차려입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순간에도 꼭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9호 2016년 12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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