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대라는 특별한 공기
어느덧 오종혁에겐 배우란 수식어가 자연스러워졌다. 1999년 열여덟 어린 나이에 클릭비로 데뷔한 그가 2008년 뮤지컬 활동을 시작했을 때, 어느 아이돌에게나 그러하듯 반신반의한 시선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묵묵하게 자신의 무대를 만들어왔다. 마니아층이 두터운 작품인 <쓰릴 미>, 인기 영화를 원작으로 한 창작뮤지컬 <공동경비구역 JSA>, 대작 라이선스 <노트르담 드 파리> 등 다채로운 뮤지컬에 도전한 그는 연극 무대로도 스펙트럼을 넓혀갔다. 선천성 장애를 앓고 있는 <킬 미 나우>의 조이부터 어딘가 엉성한 코믹 캐릭터인 <서툰사람들>의 장덕배까지, 오종혁은 다양한 역할들로 자신에 대한 편견을 하나씩 깨 나갔다. <그날들>의 무영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의 백석 또한 그에 대한 시선을 바꾸게 해줄 기대되는 만남이다.
천천히 시작된 발견
오늘 <그날들> 공연이 있는 날이죠. 무영 역으로 삼연째 무대에 오르는 만큼 이제 마음이 편안해졌을 법도 한데, 공연을 앞둔 날은 기분이 어때요?
공연을 하면서 자주 느끼게 되는 감정이에요. <그날들>뿐 아니라 모든 공연이 회차가 거듭될수록 익숙해지거든요. 몇 시간 전에 대기실에 가고, 또 시간에 따라 순차적으로 준비를 하고. 그런데 이런 상황에 익숙해지는 게 제일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실제로 이 때문에 공연을 망친 적도 있고요. 그래서 저는 최대한 익숙함을 느끼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이 무대와 상황은 오늘 내가 처음 보는 것이란 생각을 하는 거죠. 상대 배우의 대사를 들을 때도 다음 대사를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 템포가 느리더라도 그 대사를 다 듣고 난 후 순간순간의 연기를 하려고 해요.
이번에 다시 만난 무영은 어때요? 이전에 미처 알지 못한 새로운 면을 발견했나요?
삼연 째 무대에 오르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 훅 가슴을 파고들더라고요. 정학과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장난을 칠 때, 문득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순간이 정말 소중하구나! 결말을 알고 있어서인지, 분명히 기분 좋은 장면인데도 울컥해요. 그만큼 정학이가 무영에게 참 큰 존재였더라고요. ‘사랑했지만’ 장면에서 무영이가 정학에게 마지막 말을 남길 때도, 이전에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느낌이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무대에선 참을 수 없는 감정들이 울컥 올라왔어요. 어느 순간부터, 정학을 보지 못하고 떠난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더라고요.
벌써 삼연째 출연이니, <그날들>은 그만큼 특별한 작품이겠죠. 이번 공연을 준비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그날은 언제였어요?
첫 연습에 합류한 날이었어요. 사실 초연, 재연에 이어 삼연까지, 관객들에게 같은 모습을 보여드린다는 것이 굉장히 부담됐어요. 내가 과연 바뀔 수 있을까. 그렇다고 무영을 다르게 해석하거나 단순히 애드리브로 넘어가기는 싫었어요. 뭔가 더 깊이 있고 안정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힘들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무거운 마음으로 첫 연습을 가게 되었죠. 그런데 <그날들> 팀은 정말 <그날들> 팀이더라고요. 마주하는 순간 집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여태껏 혼자 느꼈던 부담감이 싹 사라지더라고요. 첫 연습 날, 새로운 힘을 얻었어요. 그제야 뭐든 할 수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변화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을 텐데, 막상 공연을 해보니 어떤 변화를 이룬 것 같아요?
처음엔 바뀐 모습이 없을까봐 두려웠어요. 그런데 이번 무대에선 노래하는 게 정말 즐거워요. 좀 부끄럽지만, 전작 <노트르담 드 파리>를 하면서 뒤늦게 발성을 새로 배웠거든요. 이전에는 연기를 하면서 그 감정을 이어 노래를 부르는 게 부담스럽고 힘들었어요. 아무래도 노래가 불안하면 감정도 들쭉날쭉 돼버리니까요. 그런데 발성에 안정감이 생기다 보니, 지금은 노래하는 게 재밌어요. 음악적으로 좀 더 깊이 표현할 수 있게 된 것 같아 기뻐요.
<노트르담 드 파리>뿐 아니라 <프라이드>, <서툰 사람들>, <킬 미 나우> 등 연극 경험도 이번 무대에 영향을 끼쳤을 듯해요.
저는 잘 모르겠어요. 아직도 많이 혼나고 있고, 배워야 할 것도 많아요. 그런데 최근에 장유정 연출님이 왜 이렇게 연기가 좋아졌냐는 말을 해주셨어요. 저야 항상 무대에서 그 순간에 움직이는 감정대로 연기하거든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느낌으로 하고 있는데, 그런 말씀을 해주시니 다행인 거죠. 조금이나마 그간의 무대 경험들이 도움이 됐던 것 같아요.
그간의 무대 경험들이 쌓이면서 연기에 대한 재미도 더 커지지 않았나요?
아무래도 연극 무대에 있을 때 그런 감정들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연기가 더해지고 더해지며 에너지가 응축되잖아요. 뮤지컬은 그걸 노래로 해소할 수 있는 반면, 연극은 계속 쌓여 있잖아요. 그럴 때 갑자기 공기가 진하게 꽉 차 있단 느낌이 들어요. 에너지가 꽉 쌓여 있을 때 뭔가 찐득찐득한 느낌이거든요. 그때의 느낌이 참 좋아요. 단순히 재밌다기보단 행복하다고 해야 할까요?
특히 최근에 어떤 작품이 그랬어요?
<킬 미 나우>는 무거운 공기가 감도는 작품이거든요. 결말로 갈수록 그 공기는 더 무거워져요. 마지막 욕조 장면에서 조이가 아빠와 단 둘이 남거든요. 그 순간 정적이 흐르는 것 같았어요. 관객들이 많이 우는 장면인데도, 훌쩍이는 소리는 하나도 제 귀에 안 들렸어요. 아빠의 숨소리, 그리고 욕조의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 이것밖에 들리지 않더라고요. 아, 그냥 정말 평온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 공간 안에 남겨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죠.
묵묵히 이룬 새로운 도전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서 백석 역을 맡았어요. 실제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을 연기하게 된 만큼 배우로서 새로운 도전이 될 것 같은데요?
이 작품 또한 처음엔 너무 어렵게 느껴졌어요. 백석이란 인물이 따뜻하고 매력적인 시인이었지만, 왠지 그게 다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제가 표현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닌 것 같아 두려웠어요. 하지만 대본을 보다 보니 욕심을 낼 수밖에 없었어요. 어려운 역할일수록 이걸 정말 잘 만들면 내 것이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거든요. 내가 가질 수 있는 뭔가가 하나 더 생길 것 같은 기분. 그럼에도 자신이 없어서 계속 고민을 했는데, 박해림 작가님과 오세혁 연출님이 저를 많이 믿어주셨어요. 그 믿음 하나로 선택하게 된 거예요.
실제로 작품에 참여해 보니 어떤 점이 힘들어요?
대사의 단어 하나하나가 다 아름다워요. 쉽게 내뱉을 수 있는 말이 하나도 없거든요. 그래서 어려워요. 모든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자니, 우선순위를 못 정하겠더라고요. 그중에서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말이 있을 텐데, 그걸 잘 못 고르겠어요. 지금은 더 보듬어야 하는 말, 더 담아내야 하는 말들을 가리는 중이에요.
실존 인물을 연기하다 보니 아무래도 역할에 대한 접근 방법도 달라질 듯해요.
이전에 맡은 <쓰릴 미>의 네이슨도 실존 인물이었지만, 명확하게 우리나라 정서에 맞는 실존 인물을 연기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에요. 외국 작품은 그들의 감정을 우리 정서로 희석시켜 다시 만들어내는 과정을 거쳤거든요. 그런데 이 역할은 따로 희석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그 감정이 그대로 느껴져요. 지금도 생각하니 살짝 소름이 돋아요. 같은 민족인 만큼 같은 정서를 느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어떤 감정을 따로 만들어 낼 필요 없이, 이미 그려져 있는 백석의 마음을 잘 좇아가면 되겠다는 확신이 들어요.
작품을 준비하며 백석에 대한 연구도 많이 했겠네요.
어제는 연출님과 배우들이 길상사에 다녀왔어요. 사실 처음엔 감기 기운이 있어서 조금 고민됐거든요. 그런데 (이)상이 씨가 추진력이 엄청나더라고요. 길상사에 가보는 건 어떨까 하고 팀원들이 논의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진 거예요. 그러더니 갑자기 쏘카를 예약하고 와서 ‘갑시다’ 하는 거예요. 그렇게 엉겁결에 가게 됐는데, 와 보길 잘했다 싶더라고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시가 적힌 비석, 그리고 그 시로 향하는 구름다리를 마주했거든요. 자야의 실존 인물인 김영한 여사가 백석을 그리워했던 곳이잖아요. 분명히 백석이 머물렀던 곳이 아닌데도, 자야와 백석이 함께 머무른 공간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저희 작품에서도 구름다리가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는 막연했는데, 실제로 보니 그 느낌이 뭔지 알겠더라고요. 어딘지 모르게 제 안의 빈 부분이 채워지는 것 같았죠.
백석이란 인물은 특히 어떤 점이 인상적이던가요?
문학도가 아니다 보니 시의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았거든요. 그런데 백석을 통해 시가 여러 사람의 마음을 두드릴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그의 시를 쭉 보면 좀 투박하다고 해야 할까요?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담백하게 풀어낸 것 같아 그게 참 좋아요. 오세혁 연출님이 백석의 시를 굉장히 좋아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요. 백석의 시 ‘흰 바람벽이 있어’의 한 구절 중 ‘외롭고 높고 쓸쓸하게’를 두고, 당대 시인들이 이건 시인을 위해 쓴 노래라고 했대요. ‘외롭고 쓸쓸하게’라고 했다면 아무도 공감을 못했을 텐데, ‘높다’는 말 한마디가 더해지면서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킨 거죠. 시인은 외롭기도 하지만 높기도 하잖아요. 또한, 시인뿐 아니라 누구나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동안 시에 대해 무지했는데, 백석으로 인해 시를 다시 알게 됐고, 시를 음미할 수 있는 정서가 생긴 것 같아요.
극 중에 등장하는 백석의 매력은 뭐예요.
백석은 잘 알려졌다시피 언변이 좋고, 지적이고 유머러스한 매력이 있어요. 뿐만 아니라 이 극에서는 아이다운 순수한 매력도 돋보여요. 사랑을 하고 싶지만, 그는 무서운 게 많아요. 아버지도 무섭고, 세상도 힘들고, 돈도 없죠. 그렇다고 여자를 떠나서 혼자 외로움을 참아내고 초연할 수는 없는 사람이에요. 그럼에도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죠. 혼자서는 존립 자체가 불가능한 인물이란 점이 굉장히 매력적이에요. 자야를 떠나 있지만 그녀가 있어야 완성이 되는 그런 모습은 이 극에서 만날 수 있는 백석의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백석과 자야는 어디에도 없을 법한 사랑을 한 것 같아요. 이 둘의 사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자야의 사랑은 정말 희생이었죠.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그를 기다리며 일을 했고, 계속된 희생을 보여주었죠.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꿈을 꿀 정도로, 자야는 백석을 위한 삶을 살았어요. 반면 백석은 자야에게 계속 짐이 되는 삶을 살았죠. 백석이 자야의 꿈에 찾아오는 건 후회 때문인 것 같아요. 자야에게 씻지 못할 미안함, 그리고 그녀를 향한 그리움, 이 모든 걸 다시 만회하고 싶은 거죠. 그래서 더 안타까운 사랑 같아요. 이들의 실화를 보면, 둘은 꼭 생이 아니더라도 무언가 이어져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만큼 더 아름답고 안타까운 사랑을 잘 표현해 내고 싶어요.
이번 작품뿐 아니라 지금까지 출연작을 살펴보면 어느 하나 쉬운 배역이 없는 것 같아요. 도전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 작품 선택에 특별한 기준이 있나요?
특별히 도전하려던 건 아닌데 어느 순간 선택돼 있더라고요.(웃음) ‘내가 잘 해내야지!’ 이게 아니라 ‘으,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그랬지’ 하곤 해요. 스스로 스트레스를 만드는 스타일인 거죠. 그런데 이거 하나는 확실해요. 아이돌이란 출신 성분 때문인지,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멋있어 보이는 역은 매력이 없더라고요.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이런 작품을 선택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비록 많이 힘들고 망가지고 찌질하더라도, ‘내가 한번 연기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역할이 좋아요. 제가 쉽게 할 수 있는 역할엔 끌리지가 않아요.
이렇듯 계속 작품에 도전하고, 무대를 찾는 이유는 뭐예요?
제가 계속 무대에 오르는 건 그 공기 때문인 것 같아요. 큐 하는 순간 나오는 인공적인 감정이 아니라, 어느 순간 막 피어나는 따뜻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게 큰 매력이에요. 그 감정을 가까이 있는 상대 배우, 그리고 객석에서 숨죽이고 무대를 보는 관객들과 공유할 수 있다는 것. 그 순간의 공기가 계속해서 저를 무대에 서게 만들어줘요. 작품을 하나씩 끝낼 때마다 아쉬울 때도 있고, 후련할 때도 있어요. 그럼에도 그 하나하나가 쌓이면서 조금씩 제가 배우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록 저 멀리 있는 이야기지만, 눈앞에 조그마한 점이 보이니깐 그 점을 따라 계속 가게 되는 거죠. 진짜 배우가 되고 싶어서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8호 2016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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