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꽃
“어머, ‘안녕하세요’ 보셨어요? 제가 그걸 지우려고 얼마나 열심히 활동했는데요! (웃음) 그래도 요즘엔 유튜브 재생 목록에서 많이 뒤로 갔어요.” 이지수는 청량한 웃음으로 데뷔 전 출연한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 관해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 방학, 남동생이 재미 삼아 보낸 사연은 ‘뮤지컬에 미친 누나’로 그녀의 뮤지컬 사랑을 전국에 알렸다. “사실 부모님께서 반대를 심하게 하셨어요. TV에 출연했지만 부모님의 마음을 돌리기엔 어려웠죠. 평범하게 수능을 본 후에 ‘이제는 내 세상이다’란 생각이 들어 인터넷으로 뮤지컬 오디션을 전부 다 찾아봤어요.”
그렇게 도전한 오디션은 바로 한국 초연을 앞두고 있던 <레 미제라블>이었다. 상당히 엄하면서도 길기로 소문난 작품의 오디션은 이지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게다가 오디션 자체가 처음이었던 그녀에겐 모든 것이 낯설었던 환경. “저는 일단 오디션 자체가 처음이었죠. 그런데 제겐 <레 미제라블>의 오디션이 하나의 수업이었어요. 스태프들이 제 안에 있는 어떤 걸 꺼내려고 하셨는데 모든 과정이 마치 연기를 배우는 느낌이었어요.” 10번의 길고 긴 오디션이 끝난 후 이지수가 손에 쥔 것은 판틴의 딸이자 장 발장의 양딸인 코제트였다. 그녀는 이렇게 코제트를 시작으로 <프랑켄슈타인>의 줄리아/까뜨린느, <스위니 토드>의 조안나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그동안 이지수가 맡은 대부분 캐릭터는 상당히 연약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녀의 목소리나 고운 의상 그리고 소프라노 음역대의 노래들이 이런 이미지에 한몫했으리라. 그러나 격투기장의 하녀로 고통을 받았던 <프랑켄슈타인>의 까뜨린느를 제외하면 이지수가 맡아온 캐릭터는 여성스러움 안에 자기 주장과 의지를 품은 여인이었다. 때문에 비극적인 상황이 닥쳐와도 자신의 신념을 굽히거나 쉽게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으며, 관객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지수가 <블랙메리포핀스>를 선택한 것도 안나에게서 강한 의지와 단단함이 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블랙메리포핀스>의 출연은 다소 급박하게 이뤄졌지만,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그리 길지 않았다. 결정을 도와준 것은 바로 <블랙메리포핀스>의 초연을 관람하던 당시 느꼈던 ‘짜릿함’이었다. “고민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그런데 작품이 가진 매력과 안나라는 캐릭터를 향한 마음이 자꾸 생각났어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자신감도 있었죠.” 여기에 작품의 커다란 매력으로 꼽히는 중독성 강한 음악과 독특한 소재도 이지수의 마음을 흔들었다.
<블랙메리포핀스>는 독일 나치 정권에서 발생한 심리학자 그라첸 박사 저택 화재 사건과 살인 사건을 다룬다. 그라첸 박사에게 입양된 네 남매 중 유일한 여자인 안나는 비극적 사건의 주요한 인물로, 어린 시절부터 성인을 넘나들며 다양한 감정을 표현해 내야만 한다. “과거와 현재의 차이를 크게 두고 싶어요. 그래서 조금 더 성숙하게, 조금 더 아이 같은 면을 강조하며 안나를 만들어가고 있죠. 지금은 그 무엇보다도 안나를 잘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여기에 헤르만과 안나의 미묘하고 애틋한 관계는 극의 빼놓을 수 없는 묘미다. 두 사람은 연인처럼 서로를 의지하지만 비극적인 사건을 맞아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헤르만과 안나는 어렸을 때 어떤 한 사건을 겪고 헤어졌다가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만나요.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채로 말이죠. 마음껏 사랑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어서, 두 사람이 더 애틋하고 슬퍼요.” 그렇지만 안나는 마냥 슬퍼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안나는 자신을 밀어내는 헤르만을 향해 멀리서나마 지켜보려고 찾아가기도 한다”면서 그녀의 적극적인 성격을 설명했다. “전체적으로 작품을 보면 결국엔 안나가 남매들에게 방향성을 제시해요. 그만큼 안나는 내적으로는 강인한 여자죠. 그래서 한스도, 헤르만도, 요나스도 모든 인물을 품어줄 수 있던 거죠.” 작품은 우리에게 기억과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즐거운 기억, 나쁜 기억, 슬픈 기억. 이 모든 것들이 다 합쳐져서 행복을 만들어요. 결국 안나도 똑같아요. 그녀의 모든 기억이 합쳐져 안나가 존재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안나의 기억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싶어요.”
이지수는 웃음이 상당히 많다. <블랙메리포핀스>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뮤지컬 넘버인 ‘메리를 기억해’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도 마음 놓고 웃을 수 있기 때문이란다. “많은 분이 제가 조용하고 여성스럽다고 생각하시는데 그렇지 않아요. 심지어 한 번 웃음이 터지면 참지 못해서 난감할 정도라니까요. (웃음) 행복하게 웃는 게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이지수가 무대 위에서 마음껏 행복한 때는 과연 언제일까. “정신없이 공연에 몰두하다가 마지막 막이 딱 올라가는 커튼콜이요. 관객들의 표정이 제 눈에 들어올 때 가장 뭉클하고 행복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8호 2016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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