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무엇이 보고 싶은가
<씨왓아이워너씨>
진실과 거짓
요즘 신문을 도배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진실이다. 밝혀져야 할 진실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고위 관료의 축재가 그렇고 최고 권력을 등에 업은 모녀의 비리도 그렇지만 가라앉은 배의 맥락도 어서 밝혀져야 할 진실이다. 사실 이런 문제의 진실은 ‘상식적으로’ 이미 파악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들의 거짓에는 그럴듯함조차 없고, 그것이 거짓임을 사람들이 모를 리 없다. 원래 거짓은 진실의 옷을 입어야 하건만 우리가 마주하는 거짓에서는 ‘거짓다움’마저 찾아보기 힘들다. 진실과의 관계에서 헷갈리기가 아니라 은폐하기만을 목적으로 삼는 거짓은 철학의 주제가 아닌 사법의 대상에 불과할 뿐. 그래서 이런 이야기가 영화나 드라마로 가면 통쾌한 법정 드라마나 신 나는 형사 액션물이 되는 거다.
하지만 원래부터 진실과 거짓은 인간의 시선을 표피에서 심층으로 이끄는 철학의 질문이었다. 진실과 거짓은 정반대의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진실이 없으면 거짓은 아무 의미도 없을 터. 진실은 ‘있는 그대로’ ‘정말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기에 중립적이지만 거짓은 ‘그렇게 보이기 위한’ 것이기에 목표 지향적이다. 언제나 진실을 의식하는 거짓의 시선은 자기의 관점에서 진실을 조망하고 해석하여 조율한다. 왜? 진실처럼 보여야 하니까. 진실에 다가가기 위해 거짓을 통과해야 함은 이 때문이다. 무엇이 진실인지 알고 싶은가? 그렇다면 답하라. 무엇이 거짓인가?
<씨왓아이워너씨>는 진실의 상대성을 다룬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이 작품에서 보이는 것은 각자의 진실다움이 아니라 각자의 거짓다움이다. 진실의 상대성이 되려면 등장인물 모두의 이야기가 ‘진짜처럼’ 들려야 하지만 아무리 봐도 모두가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 같으니 말이다. N개의 진실은 곧 N개의 거짓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라쇼몽>의 작가인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여러 소설을 원작 삼은 이 뮤지컬은, 진실의 존재 방식을 묻는다는 점에서 여전히 원작의 문제의식을 잇고 있다. 작품의 주제와 형식은 그 위에서 구획되는바, 멋스러움은 여기에서 배어 나온다.
라키우사의 자산
이러한 멋스러움은 뮤지컬의 전형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작가이자 작곡가인 마이클 존 라키우사의 뮤지컬은 계보학적으로 볼 때 뮤지컬보다는 문학과 연극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어렵고 낯설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야기부터가 그렇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해답을 내놓는 서사가 아니라 질문을 던지는 서사이다. 해답을 내놓는 서사가 대중 장르의 것이라면 질문을 던지는 서사는 문학의 것일 터. 라키우사의 창작 목록을 보면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로르카를 거쳐 마르케스에 이르기까지 문학 작품을 토대 삼은 뮤지컬이 적지 않다. 흥행? 대부분 실패했단다. 그래도 문학의 무게감이 하나도 유실되지 않고 고스란히 뮤지컬로 자리 이동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작품은 눈 크게 뜨고 뜯어봐야 할 텍스트임에 틀림없다.
물론 이 작품의 서사에도 빈틈은 있다. 이 작품은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이야기의 키워드는 진실이다. 하나의 죽음에 세 명의 당사자가 있고 한 명의 목격자가 있다. 누구의 이야기가 진실일까. 그런데 산 자의 이야기와 죽은 자의 이야기를 나란히 놓았을 때 어떤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까라는 상식적인 질문에 이 작품의 답은 변변치 못하다. 두 번째 이야기도 그렇다. 두 번째 이야기의 키워드는 믿음인데, 자기 믿음에 맹목적으로 빠져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조금은 애매한 것이, 희화적으로 보기엔 무겁고 진지하게 보기엔 단순하다. 첫 번째 이야기가 던진 진실의 질문에 두 번째 이야기가 믿음이라는 주제로 부연하는 것 같은 구성도 작품의 세련됨에 비하자면 조금은 설명적이다.
하지만 라키우사의 작품이 탁월한 이유는 이야기에 서사만 담긴 것이 아니라 형식까지 담겨 있다는 데 있다. 이야기가 문학에 젖줄을 대고 있다면 형식은 브레히트의 연극을 연상시키는 식이다. 하나의 사실을 각자의 관점에서 말하는 방식은 브레히트가 말한 ‘길거리 장면’의 전형이다. 서로가 말하는 진실이 다르다. 판단은 오로지 관객의 몫. 관객을 판단자로 끌어들이기 위해 무대는 관객에게 온전히 노출된다. 관객 또한 자기의 위치에 따라 등장인물들을 보게 되는 셈이다. 무대 연출과 배우 동선은 이야기 안에 다 들어 있다.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지 분명할 때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진다는 것을 이 작품만큼 잘 보여주는 예도 드물 거다. 뮤지컬의 작가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면서 공간을 상상하는 사람이라는 사실 역시.
무엇이 보이나
공연장에 들어설 때 전체적으로 세련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삼각형으로 구획된 무대도 그렇고, 모니터에 투사되는 영상도 그렇다. 목적이 분명한 무대 구성에 감상의 포인트를 예측할 수 있다는 점도 관객으로서는 흥미로운 일이다. 하지만 설정에 비해 활용이 효율적이었는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세 개의 꼭짓점에 분산된 연기 구역과 두 면에 배치된 관객의 시야 사이에서 종종 배우의 대사는 관객이 없는 벽면을 향하는데 이건 뭔가 어색하다. 극장이 좁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의 주제가 각자의 시선에 포착되는 진실인데, 포착될 것이 없는 ‘비인간적 공간’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 연출의 시도에서 자칫 작품의 일관성이 흐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의 시야에 모든 것을 열어놓은 공간에서 빈번하게 암전을 활용하는 것도 어색하긴 마찬가지다. 열린 무대가 노출이라면 암전은 가림막이다. 가릴 거면 왜 열었나. 공간의 원리에도 맞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그리 효과적이지 않은 거다. 스타일 넘치는 막간극이 암전 이후에 얼마나 주섬주섬해지는지. 배우가 관객에게 시선을 바꾸는 순간마다 암전을 부여하는 것도 공연 언어의 세련된 구사는 아니다. 모니터에서 지속되는 영상도 그 기능이 불분명하고, 가끔은 무대 위 인물의 공간 부여도 어정쩡하다. 세 개의 꼭짓점은 각자의 시점을 드러내는 공간으로서 대결과 긴장의 상징성을 가져야 하건만, 이 공연에서는 인물들이 끊임없이 유동하는 공간으로만 설정된다. 그러다 보니 주변 인물의 자리가 어정쩡해지는 건 당연지사다. 죽은 자를 불러올린 영매만큼 억울할까. 가장 긴장 넘치는 장면에서 가장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았으니.
하지만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에 비하자면 이런 소소한 것들은 부차적인 것으로 미뤄놔도 상관없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배우이다. 노래를 소화하는 능력에서도 연기에 몰입하는 능력에서도 배우들의 열심은 관객의 눈을 무대로 집중시키기에 충분하다. 문혜원에게는 멋이 있고 최수형에게는 힘이 있다. 단조로운 등퇴장이 전부인 공연과는 달리 관객의 시선에 자기를 온전히 노출시키는 무대에서 배우가 움직이기 쉬울 리 없다. 하지만 이 공연의 배우들은 관객의 시선에 눌리지 않는다. 작품을 향한 존중과 긴장이 역설적이게도 자신감이 된 셈이다. 배우들은 이 작품의 결코 쉽지 않은 음악에서도 한 치 밀리지 않는다. 관객의 귀에 꽂히는 선율이 뮤지컬 음악의 사명이 아님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이 지니는 뮤지컬로서의 가치는 더 높다. 배우들은 그 사실을 잘 보여줬다.
이래저래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참 많다. 그중에서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상품이 아니라 작품으로서의 뮤지컬이 동시대의 작가를 통해 지금 여기서 공연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전한 익숙함보다는 위험한 낯섦을 선택하는 뮤지컬의 실험이 우리 시대의 화두임을 보게 되는 것이다. 자본의 해답이 아니라 예술의 질문을 향하는 공연의 실험은 뮤지컬이라는 장르의 틀에 갇히지 않는다. 섣불리 뮤지컬을 향한 권태를 지껄였던 입을 다물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너희가 뮤지컬을 믿느냐. 내가 원하는 것을 봐버렸으니 회심해야 할 터. 극의 마지막에서 홀로 진실을 본 남자가 읊조리듯이 이제 고민해야 할 문제는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것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8호 2016년 11월호 게재기사입니다.
* 본 기사와 사진은 “더뮤지컬”이 저작권을 소유하고 있으며 무단 도용, 전재 및 복제, 배포를 금지하고 있습니다. 이를 어길 시에는 민, 형사상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