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안 그레이>, <페스트>, <프랑켄슈타인> 등 최근 2~3년 사이 대형 창작뮤지컬 중 소설에서 원작을 취하는 작품이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뮤지컬은 탄탄한 드라마와 익숙한 스토리가 강점인 반면, 소설의 문학성을 무대의 연극성, 특히 노래와 춤이 위주가 되는 뮤지컬에 맞게 옮겨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최근 소설 원작 뮤지컬의 등장이 두드지고 있다. 이번 호에서는 공연 중인 대표적인 소설 원작 뮤지컬 <페스트>, <키다리 아저씨>, <씨왓아이워너씨>, <도리안 그레이>, <몬테크리스토>, 다섯 편을 원작과 비교해 분석해 보았다.
<페스트>
고통 속에 피어나는 인간애 미래로 끌어온 오랑의 비극
1947년 발표된 소설 『페스트』는 20세기 실존주의 문학을 상징하는 작가 알베르 까뮈의 대표작이다. 1940년대 알제리의 항구 도시 오랑을 배경으로, 페스트란 재앙에 대응하는 사람들의 각기 다른 모습을 담담한 문체로 그렸다. 묵묵히 환자들을 치료하며 이 상황을 관찰하고 기록해 나가는 의사 리유, 속수무책인 현실에 저항하며 보건대를 모으는 타루, 행복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지만 리유 일행에 감흥을 받아 생각을 바꾸는 신문기자 랑베르, 인간의 구원에 대해 성찰하는 파늘루 신부 등 이들은 모두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공동체의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를 통해 작품은 비극에 맞서는 것이 행복에 대한 의지이며,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것이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진정한 투쟁임을 역설한다.
뮤지컬 <페스트>는 소설의 핵심 모티프를 끌어오되 이야기에 대대적인 변화를 가한다. 서태지의 음악으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인 만큼, 음악과 이야기의 조화를 찾기 위한 실험적인 시도로 보인다. 소설에서 묘사하는 오랑은 언뜻 보기에 ‘평범한 도시’이고, 기후의 영향인지 사람들은 열광적이면서도 무심한 성향을 보인다. 반면 뮤지컬은 배경을 2096년 오랑시티로 옮겨간다. 미래 도시 오랑은 ‘기억 제거 장치’, ‘욕망 해소 장치’ 등에 의존해 사람들의 행복을 통제하고 그것을 평화라 여긴다. 오랑의 특징은 1막 초반에 등장하는 곡 ‘Take One’과 ‘Human Dream’을 통해 잘 묘사된다. 완벽해 보이는 사회 통제 시스템과 이에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 이는 페스트의 파괴력을 더 극단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여겨진다.
한편 소설에서는 화자가 3인칭의 시점에서 담담하게 오랑에 덮친 페스트의 비극을 전해 준다. 그리고 작품의 말미 이 화자가 의사 리유임이 드러난다. 반면 뮤지컬은 기자 랑베르를 내레이터로 내세운다. 시대 배경에 맞게 랑베르는 첨단 기술을 활용해 능숙하게 도시의 실상을 기사로 기록한다.
미래도시 오랑에는 소설에 없는 시장 캐릭터도 새롭게 등장한다. 권력자의 욕망을 대변하는 인물인 오랑의 시장 리샤르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페스트로 혼란에 빠진 시민들에게 사실을 은폐하고, 급기야 오랑을 폐쇄한다. 하지만 혼란스런 시국에 혼자만 살기 위해 오랑을 빠져나가려다 결국 그 죗값을 치르게 된다. 소설에도 리샤르란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는 시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의사다. 소설 속 리샤르는 비중이 작지만, 의사 리유의 반복된 요청에도 페스트란 재앙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이를 해결하는 데 소극적인 입장을 보인다. 뮤지컬은 이러한 리샤르의 기본 성향을 가져와 ‘은폐하는 자’라 지칭하고, 오랑의 시장으로 설정을 바꿔 비중을 키웠다.
리샤르의 사례처럼, 뮤지컬 <페스트>에는 소설 등장인물의 기본 성향을 가져와 새로운 캐릭터로 바꾼 작업이 눈에 띈다. 미래 도시라는 설정에 맞춰 재탄생한 또 한명의 인물은 행복유지프로그램 개발 회사의 CEO 코타르다. 그는 신약 개발을 통해 페스트란 위기를 기회로 삼아 더 큰 권력과 부를 얻으려 하는 인물로, 뮤지컬 넘버 ‘시대유감’을 통해 자신의 욕망을 내뿜는다. 물론 소설 속 코타르 또한 페스트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받아들이는 인물이다. 코타르는 과거에 죄를 저지른 인물로 자살을 시도하며 우울해하지만, 페스트로 인해 경찰들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자 이내 활력을 찾는다. 페스트로 인해 모두가 불행하지만 유일하게 불행하지 않은 인물. 하지만 작품 말미 페스트가 종결되자 그는 시민들에게 총을 쏘며 이상행동을 보이고 결국 경찰에 붙잡힌다. 뮤지컬은 이러한 코타르의 특징을 바탕으로, 기득권자의 욕망을 드러내는 역할을 재창조했다.
코타르 : 검게 물든 입술 정직한 사람들의 시대는 갔어
숱한 가식 속에 오늘의 아우성을 들을 수 있어.
왜 기다려왔잖아 모든 삶을 포기하는 소리를
이 세상이 모두 미쳐버릴 일이 벌어질 것 같네
그럼에도 빛나는 건
사랑
비극에 맞서는 오랑 사람들의 각기 다른 모습. 그럼에도 사람들은 희망을 놓지 않았기에 시간은 흘렀고 결국 페스트는 종결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빛난 두 인물은 묵묵히 자신의 소명을 실천하는 의사 리유, 그리고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인간애를 실천한 타루였다. 뮤지컬은 이러한 원작의 메시지 중 인간애를 조명하며, ‘사랑’이란 테마를 강조한다. 그로 인해 리유와 타루의 관계에도 사랑이 싹튼다. 물론 이를 위해 뮤지컬은 소설에선 건장한 남자였던 타루를 당찬 여성 캐릭터로 변화시켰다. 열정적인 식물학자 타루는 페스트에 걸린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선다. 그러면서 정의에 저항하는 오랑 시립병원 신임 원장 리유와 점차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원작 속 타루가 페스트에 희생되었듯 뮤지컬에서도 타루는 죽음을 맞이한다. 비극적인 이별을 앞둔 리유와 타루의 애틋한 마음은 듀엣곡 ‘비록’을 통해 잘 표현된다. 비록 타루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인간애를 오래토록 기린다.
리유 : 어떤 말들로 널 위로
해야 할지도 난 비록 서툴고도 투박하지만
그저 내 체온이 전해지길 너에게
타루 : 가여운 마음이 나를 재촉해
내 마음 뒷면의 아픔도 보이고파
리유&타루 : 지나간 시간 우리 서로에게
상처 입힌 날들조차 그저 다시 사랑스럽다 해요.
한편 극 중에는 사랑을 추구하는 또 한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바로 20세기 인류문화박물관의 코디네이터 그랑이다. 따뜻한 청춘을 대변하는 그랑은 아름다운 잔을 사랑하게 되고, 그녀가 페스트에 걸린 후에도 변함없이 곁을 지킨다. 이후 잔은 새로운 백신으로 치료를 받는 대상이 되고, 랑베르의 제안에 따라 그 과정이 시민들에게 생방송으로 공개된다. 결국 치료는 실패하지만, 그 모습에 충격을 받은 많은 시민들이 고통에 맞서기 위해 보건대에 지원하고, 약혼자를 만나기 위해 도시를 떠나려 했던 랑베르 또한 오랑에 남아 이들을 돕기로 마음을 바꾼다.
이렇듯 마음속에 사랑을 품고 있는 그랑의 특성은 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소설 속 그랑은 오랑시의 말단 공무원인 노인으로 등장한다. 그랑은 젊은 시절 이웃의 처녀 잔과 결혼했지만,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일을 했고 점점 무심한 사람이 되었다. 그로 인해 잔은 그를 떠났고, 그랑은 늘 잔을 그리워하며 그녀에게 편지 한 장을 써 보내고 싶어 했다. 뮤지컬은 사랑을 그리워하는 그랑을 젊은 청년으로 변모시키고, 소설에서는 그랑의 회상 속에서만 존재하던 잔을 극 중 캐릭터로 살려냈다. 그리고 이들의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 이야기를 더하며, 작품의 메시지인 인간애를 부각시켰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7호 2016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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