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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COVER STORY] <잃어버린 얼굴 1895> 김선영 [No.157]

글 |안세영 사진 |심주호 스타일링 | 김보라 헤어·메이크업 | 이창은 2016-11-04 6,440

여왕의 귀환


2014년 10월 <위키드> 종연 이후 긴 휴식에 들어갔던 김선영이 마침내 무대로 돌아온다. 복귀작은 서울예술단의 대표 레퍼토리 <잃어버린 얼굴 1895>. ‘명성황후의 사진은 단 한 장도 남아있지 않다’는 사실에 착안해 그의 삶을 새롭게 들여다본 작품으로, 주인공 명성왕후 역을 맡은 김선영은 엇갈린 역사적 평가에 가려진 한 인간의 민낯을 보여줄 예정이다. 그동안 깊이 있는 연기와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개성 강한 캐릭터들을 소화해 온 ‘뮤지컬 여왕’ 김선영. 다시 돌아온 그에게서 우리는 또 어떤 얼굴을 발견하게 될까.




다시 출발선에서

지난 9월 열린 국내 첫 야외 뮤지컬 페스티벌 <자라섬 뮤지컬 페스티벌>에서 김선영은 오랜만에 동료 배우들과 한 무대에 올랐다.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와 그를 반기는 관객의  환성이 그야말로 ‘여왕의 귀환’을 실감케 한 자리였다. 올봄 뮤지컬 배우 김우형과의 사이에서 고대하던 아이를 출산한 뒤 육아에 전념해 온 김선영. 그런 그가 2년이라는 긴 휴식기를 끝낼 작품으로 <잃어버린 얼굴 1895>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 “복귀 시기나 조건에 대해 미리 생각했던 건 아니에요. 마음에 맞는 작품을 만나지 못하면 아이를 키우며 내년까지도 기회를 기다릴 생각이었죠. <잃어버린 얼굴 1895>의 명성황후 역을 제안받았을 때도 처음에는 고민했어요. 작품과 역할이 지닌 무게감 때문에요. 과연 출산 6개월 만에 소화할 수 있는 작품일까 고민됐지만, 오히려 그래서 확 뛰어들어 보고 싶은 마음도 들더라고요. 결정적으로 하고 싶다 쪽으로 마음이 기운 건 작품의 메인 테마곡인 ‘잃어버린 얼굴’을 듣고 나서예요. 명성황후의 고통스런 심경을 표현한 곡인데, 음악이 너무 무겁거나 장황하지 않고 아름다워서 더 마음에 파고들었죠.”


이번 작품은 김선영과 서울예술단의 14년 만의 재회라는 점에서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999년 <페임>으로 뮤지컬에 데뷔한 김선영은 2001년 서울예술단에 입단해 <태풍>, <바람의 나라>, <로미오와 줄리엣> 등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배우 활동을 시작했다. “감사히도 데뷔 직후부터 큰 주목을 받았지만, 일이 년 활동하다 보니 문득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실력을 쌓고 싶다는 생각에 문을 두드린 곳이 서울예술단이었죠.” 복귀를 통해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시점, 뮤지컬 배우로서 시작을 함께한 단체와 재회하게 된 김선영. 오랜만에 돌아간 고향집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를 맞아주었다. “연습실 위치만 바뀌었을 뿐 반가운 얼굴은 그대로였어요. 저와 같은 기수의 배우는 물론 선배님들까지 건재하게 남아 계시더라고요. 마치 어제 만난 사람들처럼 인사를 나누는데 기분이 참 묘했어요.”


한국적인 가무극을 선보이는 서울예술단과의 작업은 그간 주로 라이선스 뮤지컬에 참여해 온 김선영에게 신선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한마디로 외길을 가는 거잖아요. 그렇게 뚜렷한 방향성을 갖고 끊임없이 작품을 창조해 낸다는 게 새삼 대단한 일로 느껴졌어요. 그 가운데서 일관성 있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단원들도 존경스럽고요. 한 선배님은 올라오는 모든 뮤지컬을 보진 못해도 새로 올라간 창작뮤지컬만은 꼭 찾아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동안 창작뮤지컬과 인연이 없어 아쉬웠는데, 복귀작으로 잘 만든 창작 작품에 합류하게 되어 기뻐요.”





사라진 한 여자의 민낯

<잃어버린 얼굴 1895>는 조선의 마지막 왕비 명성황후의 삶을 재조명한 작품이다. 명성황후는 열강의 침탈 속에서 뛰어난 외교술로 나라를 지킨 여걸, 그리고 외척 세도정치와 사치로 나라를 망친 악녀로 극명하게 평가가 엇갈리는 인물. 그런데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황후’와 김선영의 조합, 어쩐지 낯설지가 않다. 그가 이전에 연기한 아르헨티나의 퍼스트레이디 ‘에비타’와 오스트리아의 황후 ‘엘리자벳’ 역시 역사적 평가가 엇갈리는 실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성황후는 유독 더 어려운 것 같아요. 우리나라 인물이기 때문에 쉬울 것 같지만, 그래서 더 조심스럽고 더 자세히 알고 싶어지거든요.”


각종 사료를 뒤지며 역사 공부를 하느라 바쁘다는 김선영이 특별히 주목한 건 명성황후에 대한 서양 공사들의 기록이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명성황후의 사실적인 모습을 통해 자신과 맞닿는 면을 찾고자 한 것이다. “사료를 읽어보니 명성황후에게 우리가 생각하는 대차고 기백 있는 모습만 있는 건 아니었더라고요. 서양 공사들이 만난 명성황후는 총명하고 열정적인, 무척 매력적인 여자였다고 해요. 하루는 궁으로 초대받은 러시아 공사가 러시아의 발전된 모습을 담은 영상을 가져왔는데, 고종 앞에서 영사기로 그 영상을 틀자, 병풍 뒤에 있던 명성황후가 홀린 듯 튀어나왔대요. 그러고는 너무 재밌고 신기해하며 공사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는 거예요. 그걸 읽는 순간, 명성황후가 갑자기 살아있는 인물이 되어 제게 다가왔어요. 위인전 속 인물이 아닌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한 여자로요.”



<잃어버린 얼굴 1895> 역시 명성황후라는 이름 위에 겹겹이 덮인 가면을 걷어내고 그의 진짜 얼굴을 묻는 작품이다. 영웅이냐 악녀냐 하는 이중 잣대를 들이대는 대신,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투쟁했던 한 여성의 삶에 주목한다. “명성황후의 인간적인 면을 드러내는 장면이 많아요. 그중에는 어린 시절 조카인 민영익에게 ‘누나가 왕비가 되면 집안이 일어날 수 있대’라고 말하는 장면도 있는데, 이게 그 여자 일생의 출발점을 얘기해 주는 것 같아요. 처음부터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강한 여자였던 거죠.”


김선영은 역사의 격동기 속에서 명성황후가 느꼈을 두려움과 고통에 집중하고 싶다고 말한다. “나라 안팎으로 적이 많았던 명성황후는 항상 누가 나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살았을 거예요. 실제로 어떤 사료에서는 명성황후가 임오군란 이후 대인기피증이 생겨 얼굴을 가리고 다니고, 가족 외에는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사진이 남아 있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요? 얼굴이 노출되면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죽이러 올 수 있잖아요. 이 작품 속에서 명성황후는 악몽에 시달리며 몇 번이나 ‘난 사라지지 않을 거야’라고 울부짖어요. 언제든 내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는 거죠. 위태로운 시기에 위태로운 자리에 있다 보면, 꼭 국모로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대의가 아니더라도, 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든 행동을 취하고 정치에 나설 수밖에 없었을 것 같아요. 영웅이냐 악녀냐 하는 극단적인 평가에 치우치지 않고, 그 사람이 느꼈을 인간적인 정서에 집중하다 보면 설득력 있게 연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삶의 2막

최근 김선영의 삶에 생긴 가장 큰 변화는 두말할 것 없이 새로운 생명과의 만남이다. 배우 일과 육아를 겸하는 게 쉬울 리 없지만, 김선영은 아이가 생긴 이후 오히려 마음이 여유로워졌다고 말한다. “아기가 태어나고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경이로워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어른들이 만들어낸 복잡한 세상사가 별것도 아니게 느껴지죠. 살다보면 뭔가 대단히 이뤄야 할 것 같고, 지금 이게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빠질 때가 많잖아요. 사실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면 삶은 아주 단순한 건데 말예요. 길지도 않은 삶을 왜 그렇게 아등바등하며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마음도 생각도 넓어졌어요. 뭐랄까, 어린 생명이 주는 생명력이 있는 것 같아요.”


결혼과 출산 이후의 행보에 우려의 시선이 없지는 않다. 여성 캐릭터의 스펙트럼이 좁은 뮤지컬계에서 이삼십 대를 벗어난 여배우의 설 자리가 제한적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김선영 자신도 그 사실을 잘 알지만, 섣불리 실망하거나 자신의 가능성을 가둬둘 생각은 없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해요. 시간의 흐름은 자연스러운 건데, 자연스레 흘려보내야 할 것들을 부여잡은 채 욕심 부리고 싶진 않아요. 그렇다고 무조건 다 내려놓고 양보만 하겠다는 뜻은 아니에요. 누군가 내게 나조차 예상치 못한 역할을 제안해 왔을 때, 용기를 내서 과감하게 도전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보면 더 자유롭고 단단한 배우가 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배우 인생의 2막에서 그가 도전해 보고 싶은 역할은 뭘까? “실은 좀 웃긴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뮤지컬에 웃긴 여성 캐릭터가 드물어서 그런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그러다 보니 관객분들이 저를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배우로만 생각하시는 것 같거든요. <살짜기 옵서예>에서 재기 발랄한 기생 애랑을 연기했을 때도 다들 저의 다른 모습을 봤다고 말씀하셨지만, 사실 저를 잘 아는 친구들은 오히려 ‘딱 너네!’라는 반응이었어요. 이제는 저의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 저를 더 풀어놓을 수 있는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저 스스로 재미를 느낄 수 있다면 비중이야 크든 작든 상관없어요.”


아직도 무대에서 보여줄 얼굴이 많이 남아 있는 배우 김선영. 그게 어떤 얼굴이든, 공연을 본 관객의 뇌리에 잊을 수 없는 잔상을 남기는 것이 그가 앞으로도 계속 하고픈 일이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계속 생각나는 모습이 있으면 좋겠어요. 그게 목소리든, 이미지든, 잔상이 남아서 애써 기억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떠오르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7호 2016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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