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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처 | [CULTURE IN MUSICAL] 망국의 왕 혹은 구국의 왕, 고종 [No.157]

글 |안세영 2016-10-14 5,870

10월 공연하는 <잃어버린 얼굴 1895>, <곤 투모로우>,  <노서아 가비>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세 작품 모두 구한말 조선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고종은 흔히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아내 명성황후의 세력다툼 속에서 자기 뜻을 펼치지 못한 무기력한 왕으로 묘사되곤 한다. 세 작품 속에서 그려지는 고종의 모습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고종과 그 주변인물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역사의 격변기에 부국강병을 위해 노력한 고종의 다양한 면모가 다시 조명받고 있다. 






<잃어버린 얼굴 1895>  고종과 명성황후       

가무극 <잃어버린 얼굴 1895>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은 조선의 마지막 왕비 명성황후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여기서 고종은 흥선대원군을 두려워하고, 왕후와도 거리를 두며 명성황후의 시위 상궁이었던 엄상궁과만 어울려 왕후를 외롭게 만드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실제 고종과 명성황후의 관계는 어땠을까?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이었던 고종이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고종의 나이가 어려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지만, 실권은 부친인 흥선대원군에게 있었다. 즉위 3년 뒤, 고종은 자신보다 한 살 위인 여흥 민씨 집안의 딸을 왕후로 맞이했다. 이때만 해도 고종이 왕후에게 무관심했던 건 사실이다. 당시 고종의 마음은 궁녀 출신의 영보당 이씨에게 가있었기 때문이다. 영보당 이씨는 왕후보다 먼저 완화군을 출산해,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대원군의 지지를 받으며 왕후와 대립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던 왕후는 점차 고종과 함께 위태로운 정국을 해쳐나가는 든든한 동반자가 되었다. 명성황후는 고종이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끝내고 친정을 펼칠 수 있도록 돕고, 정치 경험이 부족한 고종과 국사를 함께 논의했다. 이때부터 명성황후는 민씨 일족을 요직에 앉히고 외척 세도정치를 주도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대원군 추종 세력이 정권을 잡고 있던 상황에서 고종이 전략적으로 왕비의 척족인 민씨를 자신의 지지 세력으로 키웠다고 볼 수도 있다. 명성황후와 민씨 일족은 유교적 윤리관에 따라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정면대결을 할 수 없었던 고종을 대신해 권력 다툼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존재였다. 고종이 명성황후를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로 아꼈다는 사실은 고종이 직접 남긴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종은 왕후가 사망한 뒤 지은 <왕비행록>에서 왕후가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마다 정치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왕비가 기억력이 비상하고 책 읽기를 좋아하여 그 지식을 바탕으로 자신을 도왔다는 기술에서 왕후에 대한 고종의 깊은 신뢰가 엿보인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 왕후가 일본 낭인의 칼에 목숨을 잃자, 고종은 자신을 충실히 보필한 왕후를 보호해주지 못한 것에 큰 죄책감을 느꼈다. 고종의 문집 <주연집>에 실려 있는 왕후를 위한 제문 16편에는 그러한 그리움과 회한의 감정이 절절이 담겨 있다. 또한 1896년 궁궐에 전화가 가설된 뒤, 고종은 명성황후의 무덤이 있는 홍릉에 전화를 설치하고 아침마다 안부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곤 투모로우> 고종과 김옥균  

뮤지컬 <곤 투모로우>는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 지식인 김옥균이 일본으로 망명한 뒤, 고종의 명을 받은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한 사건에 기반한 작품이다. 여기서 고종은 김옥균을 믿고 정변을 지지했으나, 정변 실패 이후 김옥균이 자신의 곁을 지키지 않고 일본으로 떠나버리자, 극도의 배신감에 집요하게 그를 죽이려 드는 히스테릭한 인물로 그려진다.


하지만 과연 실제로도 고종이 갑신정변에 동조했을까? 한때 고종이 김옥균을 개화의 동반자로 여기고 총애했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는 조선이 청의 속박에서 벗어나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이루길 꿈꿨다는 점에서 고종과 뜻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청과 수구파의 압력으로 개화파가 점점 위기에 몰리자, 김옥균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정국을 주도할 계획을 세웠다. 일본도 청을 견제하려는 속셈으로 그에게 협조를 약속했다. 거사 전, 고종과 독대하여 긴박한 정세를 설명하고 친필 호신부를 받아낸 김옥균은 고종이 자신들의 계획에 암묵적으로 동조한다고 확신했다.


1884년 음력 10월 17일, 김옥균 일파는 우정국 개국 연회 도중 별궁에 불을 지르고, 고종과 명성황후를 피신시킨 뒤 수구파 수뇌들을 대거 살해했다. 거사 성공을 확신한 김옥균은 고종에게 자신이 정변을 일으켰음을 고백하고, 개화파 위주의 새 내각을 조직해 발표했다. 그러나 정변 과정에서 김옥균이 행한 일들은 고종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김옥균은 민씨 일족을 비롯한 친청파 인사들을 모두 개혁의 걸림돌로 여기고 제거하려 했지만, 고종에게 이들을 집권 기반의 한 요소이기도 했다. 또한 김옥균은 일본 근대화의 계기인 메이지 유신에 주목, 내각 중심의 정치를 시행하는 입헌군주제를 지향했는데, 전제군주로 왕권 강화에 힘써온 고종으로선 김옥균이 자신을 기만했다고 여겼을 가능성이 크다. 김옥균의 또 다른 실책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의도를 읽지 못한 채 외세 축출을 위해 또 다른 외세를 끌어들였다는 것이다. 일본을 등에 업고 임금을 인질로 삼은 행위는 민중들에게 극악무도한 범죄로 비춰졌다. 결국 왕의 마음도 민중의 마음도 얻지 못한 거사는 청의 군사가 반격을 가하고, 지원을 약속했던 일본 공사가 배신하면서 불과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이후 고종은 김옥균 일파를 역적으로 규정짓고, 프랑스 유학생 출신의 홍종우를 시켜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을 암살하게 했다. <곤 투모로우>에서는 홍종우가 김옥균의 이상에 감화되어 개화파로 돌아서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로 홍종우는 외세의 힘을 빌려 근대화를 꾀한 김옥균과 달리, 황제 중심의 주체적 근대화를 꾀한 인물이었다. 결국 갑신정변 10년 뒤인 1894년, 홍종우에게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체는 조선으로 건너와 능지처참되었다.



<노서아 가비> 고종과 커피   

고종은 쇄국정책을 펼친 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반대로 선진 문물 도입에 적극적인 ‘얼리 어댑터’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등, 전화, 전차 등이 모두 고종 때 도입되었다. 고종은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애호가이기도 했다. 그가 커피를 처음 접한 건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한 1896년 아관파천 시절이었다. 당시 고종의 커피 시중을 든 사람은 러시아 공사의 처형이었던 독일계 러시아인 손탁으로, 사교계의 유명인사이기도 했던 그녀는 1902년 ‘손탁 호텔’을 지어 조선 상류층에게 커피를 팔았다. 고종은 훗날 덕수궁으로 환궁한 뒤에도 서양식 건물 정관헌에서 대신들과 커피를 즐겼다. 당시 커피는 영어 발음을 따서 ‘가배차’ 혹은 ‘가비차’라 불렸다.


뮤지컬 <노서아 가비>는 손탁을 대신해 고종의 커피 심부름꾼으로 들어간 한 사기꾼 여인의 이야기로, 1898년 실제로 일어난 고종황제 커피 독살 음모에서 영감을 얻었다. 아관파천 시절 세도를 부렸던 러시아어 역관 김홍륙이 고종의 환궁 이후 거액을 착복한 사실이 발각돼 유배를 가게 되자 앙심을 품고 저지른 사건이었다. 다행히 평소와 맛이 다른 것을 눈치 챈 고종은 입에 머금은 커피를 그대로 뱉어냈지만, 한 모금을 마신 황태자 순종은 건강을 크게 해치고 말았다. 훗날 순종의 이가 모조리 빠져 의치를 하게 된 것도 이날의 후유증 때문이라는 얘기가 전해진다.




참고문헌          

이상각 『이경 고종황제』 (추수밭, 2008)
장영숙 『고종 44년의 비원』 (너머북스, 2010)
조재곤 『그래서 나는 김옥균을 쏘았다』 (푸른역사, 2005)
강준만·오두진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인물과사상사, 2005)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7호 2016년 10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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