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의 경계에서
올 상반기 <쓰릴 미>, <마이 버킷 리스트>, <마마 돈 크라이>를 무사히 마친 임병근은 1884년 조선을 배경으로 한 <곤 투모로우>을 거쳐 해리성 정신장애를 다루는 <인터뷰> 무대에 오른다. <인터뷰>에서 베스트셀러 추리 작가로 변신한 그는 자신만의 캐릭터를 견고히 만들고 있었다. 임병근이 직접 써 내려가는 <인터뷰>는 어떤 모습일까.
빠져들면 들수록
<인터뷰>의 첫인상은 어땠나요?
공연이 시작되기 전 서곡을 들었을 때는 굉장히 스산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한 사건을 깊게 파고들 것 같은 그런 작품이요. 아니나 다를까 공연이 진행되면서 예상 그대로였어요. 여러 자아를 가진 싱클레어가 매력적으로 보였고, 유진킴은 <인터뷰>에서 중심을 잡아가는 역할이었죠. 만약에 ‘내가 작품에 참여하게 된다면 어떤 역할이 더 잘 어울릴까’ 생각을 해봤는데 망설임 없이 유진킴이라는 답이 나왔어요.
<인터뷰>에서 유진킴은 다중 인격인 싱클레어와 호흡을 맞추잖아요.
전에 했던 <블랙메리포핀스>가 도움이 됐어요. 물론 소재는 다르지만요. <블랙메리포핀스>에서 한스는 과거 화재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조사하고, 동생들을 모두 돌보잖아요. 아무래도 그 역할을 했던 경험을 잘 녹여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저는 유진킴이 계속해서 싱클레어가 가지고 있는 자아를 더 끌어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싱클레어의 여러 자아를 통해 사건에 깊게 들어갈 수 있도록 파헤치는 역할이죠.
<블랙메리포핀스>의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인터뷰> 또한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작품이에요.
일단 두 작품이 이야기하고 있는 소재가 우리나라에서 많이 다뤄지지 않는 것이에요. 무엇보다 제게 <인터뷰>는 다중 인격인 싱클레어와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유진킴이라는 인물이 신선했어요. 또 공연을 보면서 참 ‘공을 많이 들인 작품’이라고 느꼈어요. 극에 깊게 빠져들 수 있게끔 작품이 잘 만들어진 거죠.
소재가 소재인 만큼 상당히 난해하다는 평도 종종 들리는 것 같아요.
난해하다고 하면, 난해할 수도 있을 거예요. 사실 <인터뷰>가 쉬운 작품은 아니에요. 한 번에 이해하기엔 어려운 작품이죠. 전 오히려 그런 것 때문에 더 매력적이라고 봐요. 깊게 빠져들 수 있고, 작품을 보고 나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작품이라 더 끌렸던 것 같아요.
해리성 정신장애를 다룬다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풀어 나갈 예정인가요?
저는 모든 사람이 해리성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싱클레어처럼 여러 자아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도 적어도 자아를 두세 개쯤은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저도 물론 그렇고, 자신도 모르는 자아가 있을 거라고 봐요. 사실 이렇게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화가 나면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지거나 분노를 표현하잖아요. 이게 꼭 해리성 정신장애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지닌 성향이라고 보는 거죠. 그래서 오히려 <인터뷰>에서 유진킴으로 싱클레어의 자아를 파헤쳐 나간다기보다는 오히려 사람 임병근으로 누군가의 여러 자아를 파헤쳐 나간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물론 무대 위에서 전 유진킴이 되겠지만, 결코 저랑 멀어지지 않는 선에서 접근하고 싶어요.
<인터뷰>는 반전이 있는 드라마잖아요.
솔직히 유진킴이 범인인 줄 알았어요. <인터뷰>는 열린 결말이지만, 제가 내린 결론은 유진킴이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서 최면으로 가상의 상황을 만든 거라 봤어요. 앞으로 공연을 다듬으면서 그 경계에 대해서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아요. 물론 유진킴의 여러 반전이 있지만요. 사실 <인터뷰>에서 중요한 것은 반전이 아니라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 들이에요. 유진킴이 싱클레어의 자아를 하나씩 하나씩 소환해 내는 과정에 초점을 두고 싶어요.
그렇다면 <인터뷰>가 말하고 싶은 키워드는 무엇일까요?
결국엔 자아의 이야기인 것 같아요. 해리성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는 싱클레어의 모습이 무대에서 보이지만 ‘우리의 자아는 무엇일까’라고 질문을 던지는 거죠.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요. 싱클레어는 여섯 자아를 가지고 있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진짜 자아는 무엇인가. 그런 생각을 한 번쯤 하게 해주는 작품이죠.
행복의 순리
결혼 뒤에 안정을 찾은 배우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 안정의 기준이 뭐죠? (평온해 보인데요.) 아, 그런 말 정말 많이 들어요. 결혼 전에는 내가 불안해 보였나? (웃음) 좋아요, 그런 이야기 들으면. 결혼하면 심적으로 많이 안정된다고 하잖아요. 주위에서 그런 말씀을 많이 하세요. 편안해 보이고, 얼굴이 폈고, 일도 더 많이 하게 되고. ‘결혼하고 나서 정말 잘됐네’라는 말을 많이 하시죠. 저는 아내한테 감사하죠.
최근에 작품을 유독 쉼 없이 하는 것 같아요. 힘들지는 않나요?
사실 한 작품이 끝나면 조금 오래 휴식기를 가졌는데, 올해 초부터는 정말 바쁘네요.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모든 일에는 ‘순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이렇게 바쁠 땐 ‘네가 좋아하는 일을 많이 해봐’라는 것 같아서 정말 열심히 하는 거죠. 휴식기 때는 제가 좋아하는 걸 많이 해요. 사실 아내도 배우이고 옆에서 지켜보니까 작품에서 헤어 나올 때의 모습을 누구보다도 잘 알죠. 전 안 그런다고 생각하는데 역할마다 조금씩 제가 달라진대요. 그래서 한창 <쓰릴 미>를 할 땐, 부인이 싫어했어요. 왜 일상생활에서도 리처드로 살아가느냐고. (웃음)
관객들에게 임병근의 모습이 어떻게 기억됐으면 좋겠어요?
관객들이 봤을 때 행복해 보이는 배우가 됐으면 좋겠어요. 배우가 무대 위에서 행복하지 않으면 관객이 얼마나 불행하겠어요. 그래서 책임감을 느껴요. 제가 배우로서 행복하려면 무대 위에서 잘해야 하고, 작품에 상당히 많이 신경을 써야 하고, 캐릭터를 정말 열심히 연구해야 하죠. 함께 시너지를 내는 거예요. 관객들과 함께.
그렇다면 무대에서 관객을 볼 땐 어떤 기분이에요?
여러 가지 생각이 들어요. 배우가 무대 위에서 관객을 바라보는 시간은 커튼콜이거든요. 사실 공연에서는 관객도 배우라고 생각해요. 관객은 같은 공간 안에서 보는 사람일 뿐이지만 공연에 같이 참여하고 있잖아요. 관객이 무대와 배우를 바라보기만 했던 순간이 커튼콜에서 깨지죠. 무대 위에서 작품으로 인해 행복해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정말 기뻐요. 감명을 받아서 우는 사람이 있으면 ‘아, 공연을 정말 잘 보셨구나’란 생각이 들죠. 전 어떤 말 한마디보다 ‘이 공연을 보고 너무 기분이 좋아졌어요’라는 말을 들을 때가 좋아요. 제가 관객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구나 싶어서요. 그런 관객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말 행복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6호 2016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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