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있는 도전
올해의 기대작인 대형 창작뮤지컬 <도리안 그레이>가 개막을 앞두고 있다. <도리안 그레이>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오스카 와일드의 대표작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 독특한 작품으로 꼽히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한국에서 뮤지컬로 올리는 과감한 도전에 나선 이들은 바로 조용신 연출 및 평론가와 김문정 음악감독이다. 공연계에서 잔뼈가 굵은 두 사람은 이번 작품에서 작가와 작곡가로서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마음에서 출발한 프로젝트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뮤지컬화 구상은 언제부터 했나?
조용신 2000년 초반 뉴욕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오프브로드웨이에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으로 만든 소규모 연극을 본 적이 있다. 원작 소설을 워낙 좋아해서 챙겨 본 건데, 독특한 소설을 무대화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이 신선했다. 그때 어렴풋이 뮤지컬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했던 것 같다. 본격적인 구상에 들어간 건, 3년 전쯤 문화재단 지원 사업의 일환으로 워크숍 공연을 선보일 기회를 얻게 되면서다.
어떤 점에서 뮤지컬의 가능성을 봤나?
조용신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주인공 도리안이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영원히 간직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파멸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원작은 도리안을 통해 과도한 자기애에 대한 경고를 던지지만, 누구나 한 번쯤은 영원한 젊음을 꿈꾸지 않나. 젊은 시절은 누구에게나 아름답게 기억되기 마련이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젊고 예뻤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나 하니까. 쉽게 생각하면, 소셜 미디어에 자신의 ‘리즈 시절’ 사진을 올리는 것 자체가 도리안 그레이적인 행동인 거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이 쉽게 공감할 만한 소재라고 생각했다.
김문정 작품을 하기 전에 내가 읽었던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은 동화집 『행복한 왕자』가 전부였다. 이 작품을 하면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게 됐는데, 지금과 다른 시대에 눈부시게 아름다운 사람이 있었고, 그게 얼마나 위대한 일이었는지 말하는 이야기가 매력적이더라. 아름다움을 만들 수 있는 이 시대에 우리 작품을 통해 진정한 아름다움은 무엇인가 하는 메시지를 던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
뮤지컬화를 결정하는 데, 독보적인 주인공 캐릭터가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 같다. 관념적인 내용은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 같은데 어떤가.
조용신 오히려 그 반대였다.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들이 워낙 현학적이고 은유적이라 대사로 쓰기에 부적합한 것은 사실이지만, 뮤지컬에서는 음악으로 그런 표현을 대신할 수 있다. 그래서 관념적인 원작이야말로 신선한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좋은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누가 봐도 흠모할 만한 눈부신 외모를 가진 배우를 찾기가 쉽지 않더라. 물론 어떤 작품이든 주인공은 다 멋있어야 하지만, 아름다움의 상징과도 같은 도리안의 경우엔 그 기준이 훨씬 엄격하다고 해야 하나. 워크숍 이후 정식 공연이 좌절됐던 이유 중 하나도 캐스팅 문제였다. 자꾸 캐스팅에 난항을 겪다 보니, 무대화하기 어려운 아이템을 고집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다.
김문정 도리안은 무대에 등장하는 순간, 관객들이 그를 보고 과연 젊음과 아름다움을 지키고 싶어 할 만하다고 느껴야 한다. 그래야만 대본과 음악에 설득력이 생긴다. 그런데 솔직히 상상 속에나 존재할 것 같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무대에서 표현할 수 있을까. 어느 누가 도리안을 맡는다 해도 아마 관객들은 성이 차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많은 팬덤을 거느리고 있는 김준수가 캐스팅된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그리고 립서비스가 아니라 김준수는 에너지가 정말 굉장한 배우다. 충분히 관객들을 설득할 만한 힘이 있다. 이번에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로 많은 안무가 사용되는데,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공연계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두 사람의 만남이라는 점도 작품에 대한 기대를 높이는 부분이다. 어떻게 같이 작품을 만들게 됐나.
조용신 몇 년 전에 어느 웹진의 의뢰로 김문정 감독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했던 얘기가 업계에 몸담은 지 오래된 이 시점에 무언가 의미 있는 도전을 해야 하지 않겠냐는 거였다. 그래서 언젠가 같이 작품을 만들자고 약속했는데, 기회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창작 작업은 서로 마음이 잘 맞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도리안 그레이>를 쓰게 됐을 때 바로 작곡을 맡아 주십사 연락했다.
김문정 아마 그때 별다른 고민 없이 바로 알겠다고 했던 것 같다. 공연계에 정통하고 있는 조 감독님이 준비하는 거라 일단 믿음이 갔고, 음악감독으로서 갈증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음악감독은 작곡가가 쓴 곡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중간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 아무래도 내 뜻대로 곡을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 그래서 오랜만에 작곡가로 작품에 참여한다는 사실 자체가 재밌게 느껴졌다.
열정이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김문정 감독의 경우, 2008년 <내 마음의 풍금>에서 작곡가로 나선 이후 다시 작곡을 맡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김문정 작곡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그런데 <내 마음의 풍금> 이후에 비슷한 유의 작업 의뢰만 들어왔고, 무엇보다 애들이 한창 엄마의 손길이 필요했을 때라 시간 여유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마음의 풍금>을 쓴 게 거의 기적처럼 느껴진다. 매일 애들에게 ‘엄마 곡 쓰게 제발 좀 자!’ 애원해 가며 곡을 써야 했으니까. (웃음) 오 년 정도 지나 아이들이 좀 크면 꼭 다시 작곡에 도전해 보자고 결심했는데, 진짜 이렇게 뜻을 이루게 됐다. 그리고 내 입으로 이런 말하긴 그렇지만, 얼마 전에 <내 마음의 풍금> 공연 영상을 다시 보니까 우리 꽤 괜찮은 작품을 만들었더라. (웃음) 좋아하는 작품이라 꼭 다시 공연됐으면 좋겠다.
한 분야에서 다른 포지션을 취하게 된 셈인데, 오랜 이력이 도리어 부담스럽게 느껴지지 않나.
김문정 그동안 음악감독으로서 진짜 많은 대가들의 작품을 해오지 않았나. 스티브 손드하임, 앤드루 로이드 웨버, 클로드 미셸 쇤베르크, 실베스터 르베이…. 뮤지컬계 위대한 음악가들의 곡이 내 머릿속에 있는 뮤지컬 곡인데, 그와 비교하자니 내가 쓴 건 너무 형편없게 느껴졌다. 그게 너무 괴로웠다. 행여나 나도 모르게 내가 알던 곡과 비슷한 걸 썼을까봐 끝없는 자기 검열을 하는 것도 힘들었고. 그리고 명색이 작품 좀 했다는 사람인데, 킬링 뮤지컬 넘버를 한두 곡은 써야지 않나 하는 부담도 컸다. 오죽하면 『미움 받을 용기』를 사서 열심히 읽었겠나. (웃음) 그래도 다행히 슬럼프를 한 번 겪고 나니, 잡생각은 버리고 플롯에 충실한 곡을 쓰는 데 집중하게 됐다. 그러다 소위 말하는 ‘오디션 전용곡’이 탄생하면 감사한 거고. 어쨌든 온전히 작곡가로만 참여하기 위해 음악감독을 겸하지 않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여러모로 색다른 경험을 하고 있다.
조용신 나는 작가에 특별한 욕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공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소설을 무대로 옮기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또 평소에 무대화에 적합한 타 장르 작품을 찾는 것에도 관심이 많다. 그러다 좋은 기획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찾는 식이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뮤지컬은 여러 사람이 협업해야 하는 작업인 만큼 이견이 생길 때 회귀점이 될 수 있는 원작이 있는 작품이 좋은 것 같다.
워크숍 공연과 비교해 어떻게 달라지나.
조용신 워크숍 공연은 실험실에서 우리가 <도리안 그레이>라는 작품을 만들고 있다는 진행 사항을 보여주는 게 컨셉이었다. 총 여섯 명의 배우가 앙상블을 겸하는 소규모 공연이었고. 하지만 정식 공연은 대극장에 올리게 돼 규모에 맞는 변화가 필요했다. 장면 구성을 대극장에 맞게 바꾸면서 대사나 곡 수정이 불가피해져 기존 대본의 90퍼센트를 다시 썼다. 정식 공연은 워크숍 공연과는 아예 다른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혹시 주요 캐릭터에 변화가 있나?
조용신 원작이 장편소설이긴 한데, 작품 속에 벌어지는 사건 자체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원작의 사건을 충실히 가져오되, 캐릭터나 설정을 소소하게 추가했다. 예를 들면, 순수했던 도리안 그레이가 쾌락에 빠져들면서 그에게 희생당하는 캐릭터를 새롭게 넣는 식으로 말이다. 주요 캐릭터들은 거의 원작과 같게 그려지는데, 도리안을 타락시키는 헨리는 뮤지컬만의 캐릭터로 만들어질 것 같다. 헨리가 그 스스로 쾌락주의자라고 해도, 도리안을 쾌락의 길로 이끄는 이유에 대해 관객들을 납득시키려면 당위성이 필요하니까. 원작과 달리 우리 작품에서 헨리는 인류학자로 나오는데, 완벽한 외모에 양심까지 갖춘 그리스 신화 속 이상적인 인간이 과연 현실에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호기심으로 도리안을 시험에 들게 한다.
각각 개성 있는 캐릭터에 따라 음악이 달라지는 부분이 있을까.
김문정 작품의 중심축을 이루는 도리안, 헨리, 배질은 성격이 다른 인물들이라 당연히 음악 스타일에도 차이가 있다. 도리안의 곡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아무래도 순수와 타락이라는 극단적인 변화를 오가는 인물이라는 점이다. 도리안이 타락해 가는 과정은 서서히 그려지지만, 처음부터 그러한 변화의 조짐이 보일 수 있도록 도리안의 곡들은 기본적으로 어둡다. 그래서 러브 테마조차 음침한 느낌이 담겨 있다. 지성의 상징인 헨리는 음악 자체에 단호하고 냉철한 성격이 담겨 있도록 곡을 썼다. 청량한 고음이 장기인 박은태가 헨리를 맡다 보니, 그런 매력이 잘 살아나도록 하려고 했다. 도리안과 헨리를 연결해 주는 배질은 우리 작품에서 제일 인간적인 사람이라서 따뜻한 선율의 노래를 부른다. 하지만 배질 역시 기본적으로는 괴팍한 예술가라는 점을 잊지 않으려고 했다.
<도리안 그레이>가 공연계에 어떤 질문을 던지는 작품이 되길 바라나.
조용신 우리나라 뮤지컬계에서 서양 시대극은 인기 장르라 서양 문학을 뮤지컬로 만드는 시도 자체가 참신한 건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올라간 대부분의 서양 시대극들이 권력과 사랑이 부딪치면서 벌어지는 로맨스 정치극이었다면, <도리안 그레이>는 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 우리 작품이 공연계에 다양성을 더하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또 상업적인 작품이라고 하면, 흔히 예술성은 기대 안 하지 않나. 감히 <도리안 그레이>로 그런 편견을 깨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
김문정 작가님 말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게 된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웃음) 나는 마지막으로 <도리안 그레이>가 나에게는 터닝 포인트가 됐다는 말을 하고 싶다. <도리안 그레이> 이전에는 어떤 제작사에서 작업 의뢰를 받아야 곡을 쓸 수 있다고 생각했지, 내가 스스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 자체를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우리가 열정으로 만든 워크숍 공연이 실제 무대화되는 경험을 하면서 창작자로서 힘을 얻었다. 내 안에 무언가 있다면 그게 언젠가는 눈에 보이는 결과물로 만들어질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 내게 정말 큰 선물이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6호 2016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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