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해피 엔딩
<키다리 아저씨>
해피 엔딩이라구요? 그럴 리가요. 소설 『키다리 아저씨(Daddy-Long-Legs)』의 결말은 분명 새드 엔딩입니다. 백번 양보해도 ‘불안한’ 엔딩이지요. 아직 읽어본 적이 없으시거나 아주 어릴 적 읽어 기억이 어렴풋하실지 모르니, 짧게 요약해 보지요. 소설은 고아원 출신 여대생, 제루샤 애봇이 자신을 대학에 보내준 후원자, 존 스미스 씨, 또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5년 동안 보낸 편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짧은 프롤로그가 끝나면 제루샤의 편지만 이어지지요. 수백 통의 편지 끝, ‘키다리 아저씨’가 실은 제루샤가 좋은 감정을 키워 나가던 제르비스 펜들턴이었다는 것이 밝혀지고, 제루샤와 제르비스가 결혼하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자신이 오랜 시간 사랑과 존경을 키워왔던 두 사람이 ‘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제루샤가 그 ‘한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편지가 소설의 마지막입니다. 분명 이 편지 속 제루샤는 사랑을, 행복을 말하는데, 저는 어쩐지 그 편지가 몹시도 불편합니다. 제르비스인지 ‘키다리 아저씨’인지, 이 사내는 엄밀히 말하자면, 그 오랜 시간, 심지어 청혼의 순간까지 제루샤를 속이는 거짓말쟁이니까요. 정말 제루샤를 이 ‘엉큼한 아/저/씨’(심지어 영어 원제로는 daddy!)와 결혼시켜도 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뮤지컬을 보고서야 깨달았습니다. 두 사람이 진정 행복한 결말을 맞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줄거리가 바뀌었느냐고요? 아닙니다. 소설 그대로입니다. 결말도 그대로입니다. 변한 것은 제르비스에 대한 제 마음뿐입니다. 제르비스를 연기한 배우의 매력이 큰 역할을 했습니다. 누구는 ‘배우의 현존성’이라는 어려운 말도 합니다만, 쉽게 말하자면, 배우의 몸을 얻은 제르비스는 어떻게 봐도 ‘엉큼한 아저씨’는 아닌 거죠. 열두 살의 롤리타를 탐하던 중년의 아저씨, 험버트 험버트의 이미지를 상상한 게 미안할 따름입니다. 허나 배우 때문만은 아닙니다. 공연은 극의 구조, 배우의 연기, 무대 공간의 활용, 이 모든 것을 통해 제르비스는 늙지 않았다, 그는 제루샤와의 사랑으로 성장하고 있다, 말합니다. 참으로 공들여 그를 ‘사랑에 서툰 어린 사내’로 무대화합니다.
소설이 제루샤의 편지만 담고 있는 것과 달리, 2인극으로 구성된 뮤지컬은 제루샤와 제르비스, 두 사람을 무대 위에 세우고, 그 둘 모두의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공연의 대부분은 둘이 마치 듀엣곡을 부르듯 제루샤의 편지를 함께 노래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제르비스의 속내도 들려줍니다. 제르비스의 첫 대사/가사를 기억하시나요? 극 초반 어둠 속에서 관객을 등지고 앉아 있던 제르비스가 관객에게 얼굴을 내보이며, 노래합니다. “나 늙었대. 까칠하고 차갑대. 아 이건 정말 아닌데.” 그렇게 그는 늙었다고 오해받아 속상한, 아직은 젊은 사내로 관객과 처음으로 만나게 됩니다.
게다가 그는 마음도 어린 사내이지요. 두 사람이 만나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제르비스는 항상 무대 뒤쪽에 꾸며진, 서재처럼 보이는 공간에 앉아 있습니다. 그 좁은 공간, 언제나 같은 책들에 둘러싸여 있는 그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책장 속 책은 모두 다 읽었는데, 책 속에서 무언가 놓친 게 있는 건지, 사랑을 보낸다는 그녀의 말, 너무도 어렵다고. 무대 위에 뛰어올라 너는 사랑에 빠진 거야라고 일러주고 싶을 지경인데, 다행히 제르비스가 알아서 나옵니다. 서재에서 나와 제루샤와 함께 이야기하고, 걷고, 여행합니다. 여행 가방으로 보이는 소품으로 그녀와 함께 앉을 ‘의자’를 만들고, 그녀에게 선보일 ‘맨해튼’을 짓고, 피크닉을 즐길 ‘산’을 세웁니다. 그를 이토록 변화시키고, 성장시키는 것을 보니, 그는 분명 사랑에, 그것도 꽤 좋은 사랑에 빠진 것 같습니다.
네, 저는 뮤지컬 속 제르비스에게 마음이 홀렸습니다. 이 젊고 멋진 남자가 제루샤에게 마음 흔들리고, 그녀의 편지 속에 등장하는 다른 사내를 질투하고, 자신의 정체를 고백할까 고민하며 웃고 우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마음이 떨렸습니다. 심지어 그가 제루샤에게 보이지 못한 마음들, 썼다 부치지 못한 편지들을 오롯이 관객에게, 아니 저에게 보내오는 것만 같아 좋았습니다. 제르비스가 자신을 모르는 제루샤의 편지에 마음 흔들렸듯, 저도 저를 모르는 그의 편지에 설렜습니다. 허나 그렇다고, 제가 남의 남자에게, 또는 아들뻘, 젊은 사내(사실은 의붓아들!)에게 연정을 품는 페드라의 마음을 경험했던 것은 아닙니다. 제르비스가 너무나도 제루샤의 짝으로 맞춤해 보였거든요. 그 둘의 사랑이 두 사람 모두를 성장시키는 게 너무도 선명하여, 그 둘의 사랑을 흔연한 마음으로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제루샤도 성장을 했냐고요? 네, 그녀 또한 제르비스와의 사랑으로 성장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상’하여 ‘연민’하는 일을 배우면서 성장합니다. 저만의 생각이냐구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뮤지컬이 인도한 생각입니다. 설명을 해보지요. 뮤지컬은 두 사람의 사랑을 중심으로 소설에 실린 편지들을 갈무리했습니다. 두 시간 남짓의 공연 안에 모든 편지를 소개할 수는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런 각색 과정을 상상해 보면, 뮤지컬에 소개되는 제루샤의 편지 중 제르비스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내용을 주목하게 됩니다. 역설적으로, 이 부분들이 각색에 참여한 사람들이 특별히 중요하다 생각한 대목이었을 것입니다. 고르고 골라 남긴 편지들일 테니까요. 그런 편지 중 하나에 ‘상상력’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제게 뮤지컬 대본은 없으니, 갖고 있는 소설 판본을 옮겨보겠습니다. “아저씨, 모든 사람이 가져야 할 가장 필요한 자질은 상상력이라고 생각해요. 상상력이 있음으로써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처해 볼 수 있게 되지요. 상상력은 친절하고 동정심 있고 이해력 있는 사람을 만들지요.” 진 웹스터, 한영환 옮김, 『키다리 아저씨』, 문예출판사, 2004, 121-2쪽. 제루샤는 이런 편지를 쓰면서도, 마지막에 고백하듯, 제르비스가 ‘키다리 아저씨’라는 뻔한 이야기를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그녀도 저처럼 ‘키다리 아저씨’를 충분히 상상하지 못해,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제루샤는 제르비스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에야 비로소, 자신의 신념을 사는 사람이 되는 셈입니다. 그 오랜 시간 자신을 지켜보며 힘들었을 제르비스를 상상하여, 이해하고, 또 연민하며 말입니다. 이렇게 모두를 성장케 하는, 지금의 자신보다 더 좋은 사람이 되게 하는 사랑은 참으로 옳다 싶어, 이 둘의 결혼이 제겐 비로소, 해피 엔딩처럼 보입니다.
시인 강정은 시를 “진심을 다한 거짓말이거나, 거짓말하게 만드는 진심”이 아니겠느냐고 썼습니다. 강정, 「해설: 진심의 괴물, 혹은 말의 누드」, 이이체, 『인간이 버린 사랑』, 문학과 지성사, 2016, 144-158, 147쪽. 그런 마음으로 시인이 시를 쓴다면, 범인(凡人)은 편지를 쓰고, 사랑을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르비스는 거짓말을 했지요. 그런데 제루샤는 아닌가요? 그녀의 모든 편지가 진실의 초고였을까요? 그녀가 정말 오롯이 ‘진짜’ 자신의 모습을 그 모든 편지에 담았을까요? 그녀가 진심으로 썼으나 모두 진실이었다 단언할 수 없듯, 그가 거짓을 행했다 하여 진심이 아니었다 말할 순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사랑은 본디 진실이 아니라 진심을 나누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런 사랑, 너무 아슬아슬하다 싶은가요. 아니요, 이 둘은 분명 행복할 겁니다. “행복이란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라 배웠다”고 노래하거든요. 둘이 함께 말입니다. 이 뮤지컬 넘버, ‘행복의 비밀’을 흥얼거리며 그 둘의 사랑을 생각하고 있으니 작지만, 충만한 행복감이 찾아옵니다. 뮤지컬 엔딩이 가져다준 바로 그 감정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도 여기에서 맺는 게 좋겠다 싶습니다. 해피 엔딩으로 말입니다.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6호 2016년 9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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