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게 빛나는 에너지
지난 2014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개막한 <미스 사이공> 25주년 기념 공연에 대한 국내 팬들의 관심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공연 기간 2년 동안 이례적으로 세 명의 한국 배우가 출연진에 이름을 올렸기 때문이다. 스물세 살의 앳된 신인 김수하도 그 영광의 주역 중 한 명. 특히 김수하는 웨스트엔드 무대가 그녀의 데뷔였다는 점에서 더욱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한국에서 나고 자란 소녀는 어떻게 ‘글로벌한 킴’이라는 애칭을 얻게 됐을까.
“아직도 믿기지 않아요!” 싱그럽게 빛나는 신인 김수하는 배우라는 타이틀을 갖게 된 지난 일 년 동안 그녀에게 벌어진 모든 일들이 여전히 꿈같은 듯 말했다. 인생의 첫 신고식은 누구에게나 설레는 일이지만, ‘웨스트엔드 진출’이라는 거창한 데뷔는 어려서부터 줄곧 뮤지컬 배우를 꿈꿔 왔던 그녀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마법 같은 일이었으니까. “초등학생 때 부모님하고 뮤지컬을 보러 갔다가 반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춤추고 노래하는 걸 좋아했거든요. 뮤지컬 배우라는 막연한 꿈을 가지고 예고를 나와 예대에 들어갔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재능을 의심하게 됐어요. 내가 정말 배우가 될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죠. 그런데 제가 웨스트엔드 무대에 서게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지난해 봄, 여느 청춘처럼 미래에 대한 걱정 속에 졸업을 준비하던 그녀가 <미스 사이공> 25주년 오리지널 프로덕션에 주인공 ‘킴’의 얼터네이트(주당 일정 회차의 출연을 보장받는 배우)로 합격한 것은 주위 사람들에게도 놀랍긴 마찬가지였다. “오디션 합격 소식에 주위 친구들 모두 깜짝 놀랐어요. 왜냐면 제가 영어를 못한다는 건 다들 익히 알고 있었거든요. 아마 해외 프로덕션에서도 이 정도로 못할 줄은 몰랐을 거예요. (웃음) 밝고 활발한 제 성격을 아는 사람들은 제가 비련의 여주인공 킴을 한다는 사실에 한 번 더 놀랐고요.” 쉬운 영단어 말고는 잘 읽지도 못했던 그녀가 과감히 웨스트엔드 무대에 도전하게 된 것은 소속사 대표의 권유로 올해 공연이 예정돼 있던 <미스 사이공> 일본 프로덕션 오디션에 참여했던 게 계기가 됐다. “일본 공연 오디션에 지원할 때만 해도 외국에 나가 본 경험이 없었어요. 그래서 오디션을 보러 일본에 간다는 사실 자체로 들떴는데, 2차 오디션 때 공연이 올라갈 극장을 직접 보니까 이 무대에 서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간절하게 드는 거예요. 그런데 오디션에서 만난 오리지널 스태프에게 영국 공연 오디션에도 지원해 보라는 제안을 받았을 땐 차마 하고 싶다는 생각조차 못했어요. 정말 운이 좋았죠.”
지난해 4월 런던으로 건너가 불과 한 달 사이에 낯선 환경에 놓이게 된 그녀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앙상블로 무대에 선 지 한 달 만에 킴으로 성공적인 신고식을 치른 것도 그녀 스스로 이뤄낸 성취였다. “이미 공연이 개막한 후에 참여하게 된 거라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았어요. 원래 킴 얼터네이트를 맡고 있던 배우가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 거였거든요. 처음엔 당장 가사를 외우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그래도 다행히 점점 부담을 떨칠 수 있었어요. 킴으로 무대에 섰던 서른 번이 적다면 적고, 많다면 많은 횟수인데 제겐 소중한 경험이에요.” 베트남 전쟁을 배경으로 미국 병사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빠지는 베트남 여인이란 버거운 캐릭터는 그녀를 배우로 성장하게 했지만, 일 년 남짓한 동안 선망의 무대에서 얻은 가장 값진 소득은 견고한 자존감이다. “어렸을 때 예쁘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외모에 대한 자신감이 항상 부족했죠. 그런데 이번에 런던에 있는 동안 예쁘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몰라요! (웃음) 내 매력을 다른 사람과 비교할 필요가 없구나,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을 사랑하자는 마음을 갖게 됐죠.”
이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다음 무대는 오는 10월 도쿄에서 개막하는 <미스 사이공> 일본 프로덕션 공연이다(일본 공연은 런던에 가기 전 일찌감치 합격을 따놓았다). 게다가 이번엔 킴의 얼터네이트가 아닌 킴으로 무대에 선다. 이례적으로 해외 무대에서 배우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김수하에게 앞으로 얼마간은 ‘한국 최초의’라는 영광의 수식어가 따라붙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남다른 시작이 스스로에게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직 한국 무대에 선 적이 없다 보니 저를 향한 기대의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해요. 웨스트엔드 공연에 참여했다고 하면 ‘얼마나 잘하는 거지?’ 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냥 어쩌다 보니 거창하게 데뷔했을 뿐이지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스스론 그렇게 생각하려고요. 자만하지 않고 오래도록 무대에 설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5호 2016년 8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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