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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No.74] 최민철 - 한 박자 늦게, 한 걸음 더 멀리

글 |배경희 사진 |심주호 2009-11-18 7,000

 


<올 슉 업>의 연습이 이제 막 시작될 무렵 최민철과 간단히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그때는 “분위기 썰렁하네. 나 따뜻하게 입고 오길 잘했어” 같은 대사 한 마디로 관객들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던 <드림걸즈>의 지미를 연기하고 있을 때였다. <드림걸즈>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최민철에게는 ‘배꼽 빠지게 만드는 배우’ 같은 타이틀이 붙었다. 요컨대 최민철은 느긋한 사람이다. 정상을 향해 무리하게 액셀러레이터를 밝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이 그를 더 오래도록 빛나게 해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드림걸즈>의 지미로 지난 10년치의 스포트라이트를 한번에 다 받은 것 같다. 상도 받았고. 이런 순간이 오길 기다려왔나?


물론이다. 배우가 박수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받은 일인가. 새로운 버전의 초연인데다 스태프들은 외국인이었으니까 의사소통이 안 되는 부분도 있고,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다. 첫 공연이 끝나고 몸살이 났을 정도로 긴장을 많이 했었는데, 그런 반응을 얻어서 기분은 좋았다.


<드림걸즈>를 끝내고 나서 많은 기회가 있었을 텐데, 지미와 상반되는 <올 슉 업>의 데니스를 선택한 이유는 뭘까. 게다가 차기작 <살인마 잭>에서는 살인마 잭을 맡았더라. 작품마다 완전히 반대되는 캐릭터들을 고른 셈인데, 스스로에 대한 일종의 도전인가?


솔직히 나는 아직도 내 스타일을 모르겠다. 내가 어떤 것을 못 하고 또 어떤 것을 잘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고, 아직도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더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거다. 물론 생각만큼 안 되는 경우도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연기도 기대에 못 미치고 잘 안 된다. 그래도 어쨌든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니까.


어렸을 때부터 배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나?


전혀. 꿈에도 몰랐다. 고등학교 때까지 광주에서 살았는데, 지방에서는 공연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 뮤지컬이 뭔지도 몰랐다. 다만 일찌감치 공부는 내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서 다른 일을 할 거라는 건 알았지만. (웃음) 고등학교 1학년 때 음악 선생님이 집으로 전화를 하셨다. 민철이는 노래시켜야 한다고. ‘아, 그래?’ 하고 생각했다.(웃음)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걸 계기로 성악과에 진학하게 된 거다.


지방에서 학교를 다니다 제대 후에 중앙대 성악과로 학교를 옮긴 특이한 이력이 있던데.


군대에 있을 때 이소라가 광주에서 콘서트를 한 적이 있었다. 운이 좋게 휴가를 받아서 그 공연을 보러 갔는데, 원래도 좋아했지만 진짜 좋았다. 그런데 이소라하고 같이 작업하는 작곡가가 중앙대 출신이라는 거지. ‘아, 서울로 대학을 가면 저런 사람들 하고 같이 일을 할 수 있구나.’ 그때 서울로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대 후에 다시 시험을 봤다.

 

뮤지컬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건가.

 

물론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지만, 클래식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자부심이 강하고 꽉 막힌 사람들이 많다. 근데 나는 그런 성격을 못 견디겠더라. 클래식이 나하고 맞지 않는 것 같아서 고민하고 있을 때 <지킬 앤 하이드> 음반을 듣고 뭐 이런 게 있나 싶었다. 가공되지 않은 날것 같은 느낌이 신선했다. ‘컨프런테이션(지킬과 하이드가 공존한 채 괴로움을 노래하는 곡)’이 이중창인 줄 알았는데 그게 한 배우가 두 가지 음색으로 부른 솔로곡이라는거다. 그때 뮤지컬에 대한 매력을 느꼈다. 그걸 알려준 사람이 (박)동하 형인데, 나를 뮤지컬로 이끌어 준 선생님 같은 사람이다. 같이 뮤지컬 공부도 하고 애들 모아서 우리끼리 작품도 만들고 그랬었다. 말도 안 되는 십자가를 만들어서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를 공연했던 기억도 있고. 진짜 학교생활은 하나도 안 하고 동아리 활동만 했었다.


당시로는 최고의 공연이었던 <명성황후>로 데뷔를 했는데, 그때의 기억이 있나.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내가 외계인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뭘 시켜도 못했다. 줄 못 맞춰서 혼나고, 춤 못 춰서 혼나고, 사투리 써서 혼하고. 그런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라고, 러시아 공사관 베베르를 시켜준 거다. 성악과 출신 배우들이 별로 없었을 때니까. 선배들은 춤추면서 땀 뻘뻘 흘리고 있는데,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 놈이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까 내가 얼마나 미웠겠나. 분위기 장난 아니었지. (웃음) 그때 이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과 내가 이 일을 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에서 연기하는 배우로 바꿔줬던 결정적인 작품이 있다면?


배우가 가져야 할 마인드를 심어준 것은 <지하철 1호선>이었고, 내가 ‘배우’라고 느끼게 해준 작품은 연극 <라이어>다. <라이어>를 공연하면서 깨달은 것은 그때까지도 난 노래를 부르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노래를 부르기 위해 무대에 섰었다. 노래에 기댈 수도 없고 오로지 연기로만 일 년 동안 버텼어야 했으니까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는데, 그게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준 것 같다. 아내도 그때 만났다. 


뭐든 이를 악물고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있고, 느
긋하게 그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있는데 아무래도
후자 타입일 것 같다.


(서)범석이 형은 나보고 배짱이라고 한다. 매너리즘에 빠지는 이유가 많은 작품을 대하다보면 어떤 캐릭터를 어떻게 해야 될지를 머리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방법을 알면 능숙하게 되고, 그럼 그때부터 매너리즘에 빠지게 된다. 관객들에게 무대 위에서 일어나는 일은 처음 있는 일인데, 그걸 능숙하게 해버리면 잘해도 재미는 없다. 항상 새로운 생각을 해내야 하는데, 그건 열심히 한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거든. 무조건 정석대로 열심히만 하면 오히려 점점 자기 함정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냥 편하게, 좀더 여유를 가지면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들이 생각난다. 모로 가든 서울만 가면 된다면, 이왕이면 좀더 재밌는 길로 가는 게 좋지 않나. 

 

10년 전, 서울로 올라오면서 품었던 꿈이 있었을 텐
데 어느 정도 이뤘나.


그때 마음먹었던 것보다 더 잘 됐다. (웃음) 내가 이런 인터뷰를 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했으니까. 정말 <지킬 앤 하이드>를 보면서 저 작품의 코러스라도 할 수 있게 된다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물론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으니까. (웃음) 얼마큼 더 잘 되고, 얼마큼의 돈을 더 벌어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다. 그냥 평범하게 좋은 배우가 되고 싶다. 창의력이나 영감이 마르지 않는, 늘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좋은 배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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