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의 아내> 김호정, 순수의 시대
삼국유사에 나오는 웅녀 신화를 모티프로 삼은 연극 <곰의 아내>가 공연된다. 고연옥 작가의 제5회 벽산희곡상 수상작으로, 고선웅 연출이 참여하면서 일찌감치 평단과 관객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 <곰의 아내>에서 김호정은 숲에서 길을 잃은 뒤 곰의 새끼를 낳고 살아온 한 여자를 통해 맑고 순수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다. 김호정은 자신과는 너무 다른 여자를 답답해하면서도 그녀가 보여주는 사랑이 대단하다고 말한다. 김호정이 만들어낸 곰의 아내는 어떤 모습일까.
나를 사랑하지 않는 그대에게
<곰의 아내>에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요?
사실 그동안 고선웅 연출가의 작품을 보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연극을 계속해 왔지만 그렇게 많은 작품을 한 배우는 아니잖아요. 연극이란 게 명성을 많이 누리는 것도 아니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아니에요. 제게 연극은 그야말로 자존심이고 열정인데, <곰의 아내> 는 이런 점에서 딱 맞아떨어진 작품이에요. 또 작품이 올라가는 극장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예전부터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요. 여러 가지가 맞물려 잘 흘러가게 됐죠.
고연옥 작가와 고선웅 연출이 만났어요. 굉장히 독특한 작품이 탄생할 것 같아 기대감이 높아요.
고연옥 작가의 대본은 쉽지 않아요. 굉장히 문학적인 요소가 많죠. 제가 궁금했던 것은 ‘고선웅 연출이 이 작품을 어떻게 만들까’였어요. 대본 안에 펼쳐진 희극적인 요소들이 무대에서 어떻게 형상화되고 얼마나 역동적으로 나타날까. 이 점이 가장 궁금했어요. 워낙에 고선웅 연출의 방법이 독특하잖아요. 또 희곡을 읽었을 때의 느낌에 고선웅 연출만의 명쾌한 연출로 또 다른 무언가가 더해질 거에요. 고선웅 연출의 비법을 통해 고연옥 작가의 주옥같은 글이 어떻게 펼쳐질지 저 또한 기대돼요.
작품에 대한 느낌은 어떤가요?
최근에 제가 우울한 작품을 많이 했잖아요. 그래서 슬픈 작품은 한동안 안 하려고 했어요. (웃음) 처음 작품을 보고는 “우울하다. 힘들다”고 그랬는데 고선웅 연출이 “굉장히 생동감 있게 만들 거다”라고 하더라고요. 실제로 역동적이고 생동감이 있어요. 제가 그동안 안 보여드렸던 모습을 무대에서 보실 수 있을 거예요.
살짝 힌트를 준다면요?
어둡지 않아요. 작품이 슬프지만 중간중간 웃음이 있기도 하고 마지막엔 감동도 있죠. 아마 관객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을까 싶어요.
<곰의 아내>의 여자는 어떤 인물로 그려지나요?
굉장히 순수한 영혼이에요. 인간 사회에 적응을 해보려고 하지만 결국은 버림받고 말죠. 그런데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함을 유지한 채, 곰과 살았던 자연으로 돌아가려 해요. 거추장스러운 현대 사회에서 볼 수 없는 인물이에요.
여자를 통해 <곰의 아내>가 말하고 싶은 본질은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 태어났을 땐 순수하잖아요. 그러다 성장하면서 잘 살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변해 가고, 때로는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죠. 그런데 여자는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인간 세상에 발을 들이면서 살아보려고 하지만 결국 잘 안 되는 거죠. 결국, 또 버림받지만 여기서 절망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지닌 순수함을 끝까지 지키려고 해요.
그래서 여자를 보면 외유내강이 생각나기도 해요.
솔직히 말하면 처음 대본을 읽었을 때 굉장히 답답했어요. (웃음) 어떻게 이렇게 계속 순수해? 좀 이해가 안 되기도 했어요. 그만큼 제가 때가 묻은 거죠. 하지만 공연에서는 이런 여자의 본성이 관객에게 충분히 이해되고 순수한 여자의 모습이 드러날 거예요.
이번 작품에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감정들이 다 담겨 있잖아요. 그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 뭐라고 생각해요?
어떤 감정을 꼽기보다는, 남편을 대하는 여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남편은 계속해서 그녀를 괴롭히죠. 그런데도 여자는 남편의 곁에서 살아보려고 노력해요. 남편을 향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당신을 사랑해”라고 계속해서 말하죠. 저랑은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웃음) 누군가가 나를 힘들게 하고 바닥까지 내동댕이칠 때, 끝까지 원망하지 않고 그 사람에게 맞추기 위해 노력할 수 있을까? 한 사람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많이 담겨있어요.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너무 찡했어요. 또 여자가 자신의 아이들에게 하는 말들이 마음에 와 닿았죠. 굉장히 순수하고 대단한 것 같아요. 순수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향한 무한한 모습. 저는 그런 모습을 잘 표현하고 싶어요.
그렇다면 <곰의 아내>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누군가를 향한 끊임없는 열망.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굉장히 순수한 모습으로 다가가고 그를 향한 열망이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그야말로 열정
지난 인터뷰를 찾아보다가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지는 것이 싫다는 기사를 봤어요. 그런데 지난해 연극, 영화, 드라마까지 장르를 넘나들면서 바쁘게 보냈고, 주목을 받았잖아요.
이제는 상관없어요. (웃음) 어렸을 때는 그런 관심이 조금 부담스러웠죠. 저는 사생활을 철저하게 지키면서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거든요. 평범하게 여행도 하고 지하철도 타고 다니는. 그래서 드라마나 영화에 소극적이었어요. 이제는 모든 것을 넓게 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기면서 변하는 것 같아요.
거의 25년을 연기라는 한길을 걸었잖아요. 오랜 시간 한 분야에 몸을 담는다는 건 어떤 기분이에요?
세월은 정말 빠르게 흘러가요. 과거의 열정처럼 미친 듯이 연기를 하고 싶어도 이젠 몸이 그렇게는 안 되고. (웃음) 인간은 늘 승승장구할 수 없거든요. 꼭 걷다가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누구나. 그게 건강 때문이든, 자신의 잘못 때문이든, 여러 가지로. 그 과정을 거치고 많은 것들을 얻죠. 제가 어리고 잘나갔을 때는, 제가 잘나서 그런 줄 알았어요, 정말. 나이를 먹어보니 부족한 부분을 많이 느끼죠. 그걸 깨닫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는데, 연기는 갈수록 힘들어져요. 90년대 김갑수 선배와 작품을 한 적이 있어요. 저는 덜덜덜 떨면서 김갑수 선배에게 “선배님은 좋으시겠어요. 무대에서 하나도 안 떠시니까”라고 말했죠. 그랬더니 김갑수 선배는 오히려 “나는 네가 정상이 아니라고 봐. 너 나이 때는 막 하는 거야. 나이가 들수록 더 떨리지”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저는 그 말이 저를 위로해 주려고 그냥 한 말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진짜로 시간이 갈수록 더 떨려요.
여행을 상당히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최근 다녀온 곳은 어디인가요?
저는 유럽을 좋아해요. 일 년에 한 번씩 베를린에 가죠. 토마스 오스트마이어 연출가를 정말 좋아하거든요. 오스트마이어의 샤우비네 극장 앞에 집을 빌려 공연을 많이 보죠. 왜냐면 현대의 연극 작품은 대사뿐만 아니라 정서, 무대, 조명 등을 통해 연출만의 스타일을 보여주잖아요. 그래서 다양한 공연의 연출을 보고 있어요.
배우로서 무대에서 관객을 바라볼 때 기분은 어때요?
첫 공연을 할 때, 무대에 올라 관객을 보면 꽉 차있을 때 오는 에너지가 있어요. 정신을 잃을 정도로 강력하죠. 그 순간부터 관객은 잊고 나와의 싸움이 시작되는 거예요. 그리고 공연이 끝난 후 박수를 받을 때면 행복해요.
* 본 기사는 월간 <더뮤지컬> 통권 제154호 2016년 7월호 게재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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